최근 홍남기 부총리의 행보가 언론의 관심을 끌고 있다. 한 예로 진보 성향 모 언론 매체의 기사 제목은 “홍남기호 50일, ‘청와대 바지사장’ 예상 뒤집고 거침없는 우클릭”이었다. 문재인 정부의 시정 방침인 소득주도 성장론에 맞서 역주행을 시도하고 있다는 분석까지 나오고 있는 형편이다.
홍 부총리의 행보를 거침없는 우클릭으로 보는 근거는 의외로 단순하다. 홍 부총리가 경제 정책의 무게 추를 시장과 기업으로 이동시키면서 기업의 투자 활성화에서 경제 회생의 동력을 찾고 있다는 것이었다. 어찌 보면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통념이 액면 그대로 반영된 시각이라고도 볼 수 있다. 시장과 기업 세계는 보수적 원리가 지배하고 있는 만큼 그런 세계에 동화되자면 우클릭이 불가피하다는 통념이다.
통념은 시장의 핵심 주체인 기업 경영자는 보수적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다는 암묵적 전제 위에서 작동하고 있다. 최근에 만난 벤처기업 경영자는 과거 민주화운동 한복판에 있었고, 사회 정치 영역에서는 여전히 진보적 가치를 추구하고 있다. 그런 그 역시 기업 경영에서만큼은 보수적일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드러냈다. 그래서일까? 현재 한국 사회에서 유일하게 진보적 단체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영역이 경영계이다.
전통적 좌파의 시각에서 보면 문제의 본질은 명확했다. 좌파 시각에서 볼 때 기업 경영은 노동력을 착취하는 공간일 뿐이었다. 좌파들은 경영 행위의 일환인 ‘비즈니스’라는 용어조차에도 강한 거부감을 드러냈다. 그런 이유로 비즈니스라는 용어는 좌파인지 여부를 가리는 리트머스 시험지로 통하기도 했다. 기업 경영자는 보수적일 수밖에 없다는 통념은 영원히 깨지지 않을 불변의 것일까? 여전히 기업 경영자들과 호흡을 맞추려면 상당 정도의 우클릭은 감수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이 지점에서 역사적 전환의 모티브를 마련한 인물이 있다. 현대 경영학의 개척자이자 최고 권위자인 피터 드러커이다. 1991년 사회주의 종주국인 소련이 붕괴했다. 사회주의 이념은 일순간에 휴지조각으로 전락한 듯 했다. 동시에 자본주의여 영원하라!는 외침이 세상을 뒤덮었다.
바로 그 즈음 소련 붕괴 다음 해인 1992년에 드러커는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라는 의외의 책을 출간했다. 핵심 요지는 지식사회의 도래와 함께 자본주의는 수명이 다해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경제를 지배할 핵심 요소는 더 이상 자본이 아니라 지식이라는 것이다. 더불어 지식을 체화한 지식근로자가 새로운 선도 계급으로 부상하고 있다고 파악했다.
드러커는 기업이 좋은 실적을 내자면 종전의 노동자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지식근로자를 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노동자를 비용으로 간주했다면 지식근로자는 자산으로 간주해야 한다. 노동자를 통제 대상으로 보았다면 지식근로자는 파트너로 봐야 한다. 노동자가 기계의 하인이었다면 반대로 기계가 지식근로자의 하인이 되어야 한다. 요컨대 지식근로자는 조직의 부속품이 아니라 중심에 서야 한다.
3차 산업혁명 이후 지식이 새로운 가치 창출의 주요 원천으로 떠오르면서 드러커의 사상은 상당한 설득력을 발휘해 왔다. 적지 않은 전 세계 기업 경영자들이 드러커의 사상을 실천하고 성과를 입증해 왔다. 유한 킴벌리를 무대로 뉴 패러다임 경영을 성공적으로 실험한 문국현도 그 중 한 명이라고 할 수 있다.
필자가 이야기하고 있는 ‘사람 중심 경영’도 드러커 사상의 연장선에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간략히 요지를 소개하면 이렇다. 사람을 경제 활동의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조직의 부속품이 아닌 중심으로, 권력 행사의 대상이 아닌 주체로 간주할 때 가치 창출이 극대화되면서 이해당사자 모두의 이익이 증대될 수 있다.
사람 중심 경영은 기업 경영이 진보적 담론 형성의 주요 무대가 될 수 있음을 암시한다. 이미 중소·벤처기업을 중심으로 사람 중심 경영에 공감하는 경영자들이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 더불어 비슷한 생각을 지닌 경영자들의 네트워크 형성도 함께 모색되고 있다. 경영계는 진보단체가 존재하지 않는 유일한 영역이라는 등식도 머지않아 깨질 것으로 보인다. 은근히 기대가 된다.
(이 글은 2019.2.7 <내일신문> 칼럼으로 게재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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