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자들의 구미에 맞춘다면서 24시간 영업을 내건 편의점들이 엄청나게 많이 생겼다. 그런데 적지 않은 편의점들이 매출이 늘지 않는데도 잘못된 계약조건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로 심야에도 문을 닫지 못한다. 애당초 본점에서 언질을 줬던 예상매출에 턱도 없이 모자라 폐점을 하려고 해도 엄청난 위약금 때문에 ‘그만둘 자유’마저 없어진 경우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이 최저임금 밑으로 열악하게 일하게 되는 것은 불가피해 보인다. 최근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는 ‘갑’의 횡포에 힘겨워하는 가맹사업자 ‘을’의 한 단면이다. 소비자들이 심야에까지 상품을 구매하는 편리함을 누리고 있는지는 몰라도, 그를 위해 반대쪽에서는 사실상 강제로 심야노동을 하고 있는 셈이다. 오늘날 소비자 입장에서 가장 편리한 상품을 꼽으라면 단연 휴대폰, 특히 스마트폰이 아닐까 싶다. 더구나 한국 제일의 기업이자 애플과 함께 글로벌 최강자 대열에 서있는 삼성전자가 휴대폰과 스마트폰 시장을 이끌면서 엄청난 수익을 창출하고 있으니 더욱 관심이 갈지 모른다. 다른 기업들은 수년 동안에도 달성하기 어려운 8조원 영업이익을 지금 삼성전자는 매 분기마다 달성하고 있지 않은가.그런데 애플과 삼성 등의 브랜드를 붙이고 소비자들에게 전달되는 휴대폰과 스마트폰을 생산하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우선 애플의 아이폰을 살펴보자. 애플의 아이폰은 대만의 폭스콘(Foxcon)이라는 회사에서 위탁받아 조립해 주고 있다. 폭스콘은 애플 제품뿐 아니라 노키아·델·HP 등 전 세계 전자제품 위탁생산의 40% 이상을 차지한다. 하지만 폭스콘 공장은 대만이 아니라 중국 본토에 있다. 100만명 이상의 중국 노동자들이 중국에 있는 폭스콘 공장에서 아이폰을 포함해 전 세계에 유통되고 있는 전자제품을 조립하고 있는 것이다.그러면 소비자들이 구매하는 아이폰 원가가 대략 600달러 정도에 구매한다고 했을 때 중국의 폭스콘 공장으로 돌아가는 몫은 어느 정도일까. 겨우 1% 정도인 6.5달러라고 한다. 애플이 대략 절반을 가져가고 부품을 제공하는 한국과 미국·독일 등이 3분의 1을 나눠 갖는다. 당연히 폭스콘 공장 노동자들의 노동환경과 노동시간 임금조건이 좋을 리가 없다. 지난 수년 동안 언론에 반복적으로 등장했던 중국 폭스콘 공장 노동자들의 자살과 파업사태는 이런 배경을 가지고 있다.삼성전자라고 해서 다를까. 삼성전자 이름을 달고 나오는 전체 휴대폰과 스마트폰 가운데 우리나라의 구미 삼성공장에서 만들어 내는 제품은 겨우 9%에 불과하다. 삼성전자의 스마트폰이 세계적으로 선풍적 인기를 끌고 있는데도 구미공장 노동자수는 여전히 1만명 내외에서 맴돌고 있는 이유다. 대부분의 삼성 핸드폰과 스마트폰은 해외 생산기지에서 만들어진다.대략 중국이 50%, 베트남이 30%, 그리고 인도와 브라질에서 각각 7%, 4% 정도가 생산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모두 싼 임금 때문에 해외생산기지를 만든 것이다. 이 같은 모바일기기 글로벌 생산 네트워크 시스템의 특징에 대해 최근 한국노동연구원은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한때는 전적으로 선진국에서만 생산되고 소비되던 휴대전화가 이제는 진정으로 전 세계적인 상품이 되면서 아프리카의 광부·중국의 조립공·인도의 소프트웨어 개발자·케냐의 판매원·전 세계의 소비자들을 연결하고 있다. 그러나 이 사슬의 주요한 가치창출의 마디는 매우 집중돼 있고 주로 소수의 선도기업이 차지하고 있다”(한국노동연구원, 국제노동브리프) 문제는 이들 생산체계가 “아프리카 탄광의 강제노동에서부터 폭스콘 공장의 학생인턴과 인도 콜센터의 교대근무자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비정규직, 임시노동자들에 의존해 있다”는 점이다. 사실 알고 보면 생산자와 노동자·소비자는 다른 사람이 아니다. 편의점 점주와 아르바이트생, 휴대폰 공장의 노동자와 영업사원들은 모두 이들 제품의 소비자이기도 하다. 생산자와 노동자들에게 소득이 없으면 소비자로서 이들의 구매력은 크게 늘지 않을 것이다. 생산자와 노동자들이 가혹한 노동시간 때문에 삶의 여유가 없으면 아무리 편리한 편의점도, 최신의 스마트폰도 이들에게는 무용한 존재가 될 것이다. 생산자와 노동자에게 열악한 노동환경과 낮은 소득을 강제하면서도 시스템이 일시적으로 작동하고 있다면 그것은 글로벌 생산체계를 통해 문제를 회피하거나 빚을 통한 소비를 부추겨 낮은 소득을 감추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는 지속가능한 방식이 아니다. 소비자이면서 동시에 생산자이자 노동자인 우리 자신의 정체성 가운데 지금은 노동자의 정체성을 더 주목하고 강조해야 할 것 같다. 언론에서는 끊임없이 ‘소비자 주권, 소비자 선택권’을 들먹이며 우리의 한쪽 측면인 소비자를 우대하는 발언을 쏟아 내고 있다. 그러나 그 이면에 우리의 다른 쪽 측면인 노동자의 노동권, 노동자의 인권을 가혹하게 유린하려는 행태를 굳이 보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 스스로 소비자이자 노동자로서의 온전한 모습, 온전한 권리를 되찾아야 하지 않을까.*이 글은 매일노동뉴스에 기고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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