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2012년 6월부터 27일 열린 새사연 정태인 원장의 강연 <2009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오스트롬 추모: 공유의 비극을 넘어> 에서 배포된 자료입니다. 엘리 오스트롬(Elinor Ostrom)에 대한 소개와 그의 노벨상 수상 소감을 정리한 글입니다.사진을 포함한 더 많은 내용은 보고서 원문을 다운 받으시면 보실 수 있습니다. 엘리너 오스트롬(Elinor Ostrom) 미국의 여성 정치학자이자 경제학자이다. 1933년 8월 7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에서 출생하여 2012년 6월 12일 미국 인디애나주 블루밍턴에서 췌장암으로 별세하였다. 1951년 베벌리힐스고등학교를 졸업하고 UCLA에서 1954년 정치학 학사, 1962년 정치학 석사, 1965년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미국 정치과학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인디애나 대학교 정치학과에서 석좌교수로 재직하였다. 2006년부터는 애리조나 주립대학교에서 연구교수를 겸임하였다. 인디애나 대학교에서 남편 빈센트 오스트롬(Vincent Ostrom)과 함께 많은 연구업적을 남겼다. 2009년 여성으로는 최초로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했다. 스웨덴 왕립과학원은 오스트롬을 수상자로 선정하며 “경제 지배구조(Economic governance) 분석을 통해 공공의 자산이 다수의 경제 주체들에 의해 어떻게 성공적으로 활용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고 평가했다.그가 주도적으로 설립한 연구소들로 인디애나 대학교의 The Workshop in Political Theory and Policy Analysis 와 애리조나 주립대학교의 Center for the Study of Institutional Diversity 이있다.오스트롬이 직접 소개하는 자신의 삶저는 1933년 8월 7일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에서 태어나 대공황을 겪으며 자랐습니다. 다행히도 당시 우리 집에는 채소와 과일을 기를 수 있는 큰 텃밭이 있었어요. 저는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어떻게 야채와 살구, 복숭아가 자라나는지를 배우며 자랐습니다. 2차 세계대전 기간에는 전쟁을 나간 남성들을 위해서 스카프 만드는 법을 배웠습니다. 어린시절 동안은 전통적으로 소녀들이 해야 할 일이라고 여겨졌던 일들을 배우며 지냈습니다. 저의 주된 여가활동은 수영이었습니다. 수영팀에도 들어갔고, 수영대회에도 나갔어요. 대학 학비를 모으기 위해 수영 강사도 했습니다.로스앤젤레스에 있던 우리집은 비버리힐스의 끝자락에 위치해 있어서, 저희 어머니는 저를 비버리힐스고등학교에 보냈습니다. 고등학교에서 토론반에 들어가게 되었고, 우리 주에서 열리는 토론 대회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토론을 배우는 것은 나만의 사고방식을 형성해가는 초기 단계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항상 공공정책 문제에 두 가지 측면이 있다고 배웠고, 그 두 측면을 모두 옹호하고 또 비판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수영팀에 참여했던 것과 함께 토론반에 참가했던 것은 중요한 경험이었습니다. 비버리힐스고등학교는 부자 학교였는데, 그 곳에서 가난한 학생이었던 나로서는 학교생활이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하지만 덕분에 나는 미래에 대한 다른 전망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비버리힐스고등학교의 학생 중 90%는 대학에 갔기 때문에, 고등학교를 졸업 후 대학에 가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일로 여겨졌습니다. 가족들과 가까운 친척 중에 대학에 간 사람이 한 명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대학에 가야겠다고 결심했지요. 하지만 제 어머니는 저의 대학 진학에 필요한 학비를 지원해주실 생각이 없었어요. 어머니 스스로도 고등학교 때까지만 부모님의 도움을 받으셨죠. 다행히도 당시 UCLA는 등록금이 매우 낮았어요. 저는 도서관, 서점, 잡화점에서 일하며 돈을 벌었어요. 입학 후 사화과학 전반을 배웠는데 여름 계절학기를 여러 과목 듣고, 추가 과정을 듣는 방식을 통해서 빚을 지지 않고 3년 만에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그리고 졸업하던 해에 ‘신입생을 위한 경제학(Freshmen Economics)’ 수업을 들을 수 있었어요. 졸업 후 일자리를 찾으면서 고용주들이 원하는 것은 내가 타이핑을 잘 치는지, 속기 자격증을 갖고 있는지 등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당시 여성을 위한 직업은 비서 또는 초등학교나 고등학교의 선생님 정도였거든요. 저는 통신교육 강좌를 통해 속기를 배웠어요. 회사에서 상사의 말을 받아쓰기 위해 사용한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훗날 연구 프로젝트에서 면접 인터뷰를 진행할 때 유용하게 쓰였습니다. 다행히 커다란 사무회사에서 전문 구매자(Export Clerk)로서 1년 정도 일한 후, 비서 외에는 여성을 고용하지 않는 사업체에서 인사관리 부담당자(Assistant Personnel Manager)로 일을 했어요. 저는 이런 일자리를 통해 이십대 초반에 매우 좋은 경험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덕분에 거절당해고 좌절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어죠. 이는 나중에 대학원을 가고, 박사학위를 딸 때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경제학 박사가 되고 싶어 UCLA 경제학과에서 수업을 들었지만, 저는 매우 위축되고 말았습니다. 우선 저는 이전에 수학을 배우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제가 고등학교 때는 다들 여자 아이가 대수학과 기하학을 넘어서는 수학을 배울 필요는 없다고 말했거든요. 경제학과에서의 수업은 결국 제가 그 바깥에 있는 비주류경제학을 찾아서 박사과정을 가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럴수록 박사 학위를 따는 것에 자신이 없어졌습니다. 그 당시 정치학 또한 박사과정에 여성을 받아들이는 것에 회의적이었어요. 오직 시립 대학에서만 여성을 박사로 고용하고 있었는데, 그 조차도 우려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UCLA도 학교의 평판을 위해 저를 받아들이는 것을 꺼려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40명의 정치학과 대학원생으로 다른 3명의 여성과 함께 입학했습니다. 학교를 다니면서 여성을 학교에 받아들이고, 조교로서 일하게 한 것에 대해 비판하는 많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함께 공부하는 남자 동기들은 친절했고, 우리를 격려해주었지요. 1961년 졸업 논문을 쓰기 위해 저는 남부 캘리포니아의 물 산업에 대해 연구하는 팀에 들어갔습니다. 빈센트 오스트롬, 찰스 티보트, 로버트 워런 등이 함께 했습니다. 이 프로젝트의 목표는 남부 캘리포니아에서 지하수를 사용하는 집단들의 정치경제를 분석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태평양 해안을 따라 다수의 도시들이 배치되어 있는 서부 지역을 연구했어요. 로스앤젤레스 시티에서 로스앤젤레스 카운티의 상당부분은 저수지역이 중첩되었습니다. 당시에는 제가 연구하는 것이 공유자원 문제라는 것을 알지 못한 채, 물 사용자들이 자원을 관리하는데 직면하는 문제들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1965년 박사논문을 제출했습니다. 당시는 1968년 가렛 하딘(Garrett Hardin)이 사이언스 지에 “공유지의 비극(The Tragedy of the Commons)”을 선보이고, 1965년 맨서 올슨(Mancur Olson)의 책 <집단행동의 논리(The Logic of Collective Action)>가 출판되던 시기였습니다. 1965년 빈센트는 블루밍턴 인디애나 대학교에서 전임 교수라는 매력적인 자리를 제안 받게 되죠. 하지만 당시에 여성을 교수로 쓰려는 학교를 찾기란 매우 어려웠기 때문에 저는 항상 빈센트에게 붙어 다닐 수밖에 없었어요. 다행히도 나중에 인디애나 대학교의 정치학부에서 화요일, 목요일, 토요일 아침 7시 30분에 ‘미국 정치 입문(Introduction to American Government)’이라는 강의를 가르칠 사람을 필요로 했고, 저에게 방문 조교수(Visiting Assistant Professor) 자격을 주었습니다. 그렇게 신입생들을 가리키며 1년이 지난 후 대학은 대학원생 조언자(Graduate Advisor)를 맡아주면 정규 교수로 채용하겠다고 제안했어요. 인디애나 대학교에서 첫 15년 동안의 연구는 미국 전체의 경찰치안산업(police industry)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이 분야를 연구했던 많은 학자들이 같은 도시 안에서 다양한 주체들이 치안 서비스를 제공하는 상황에 대해 혼란스러워했어요. 그들은 이것이 서비스의 무질서한 분배라고 생각했던 것이죠. 하지만 연구 결과 미국의 거대 도시들에서 다양한 서비스 주체들의 존재는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훨씬 더 효율적으로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100명이 넘는 인력을 가진 경찰서라고 해서 20~50명을 보유한 중소규모의 경찰서를 능가하는 성과를 내는 것은 아니었어요. 순찰, 교통 통제, 범죄수사, 민의해결 등 모든 면에서 그러했습니다. 이후 저는 공유지 연구로 돌아왔습니다. 이번에는 제가 무엇을 연구하는지 확실히 인식하고 있었어요. 국가연구위원회(National Research Council)에서는 1980년대 중반 공유자원에 관한 실증 연구를 검토하는 특별위원회를 만들었습니다. 공유자원에 관한 많은 연구들이 수행되었지만 분야나 부문, 지역에 따라 제각각 흩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아프리카 해안의 어장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아프리카의 다른 자원에 대한 연구는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사회학자들은 경제학자들의 연구를 알지 못했고, 경제학자들은 사회학자들의 연구를 알지 못했습니다. 국가연구위원회에 위원으로 참여하면서, 이제까지 곳곳에서 수행되었지만 종합되지 못했던 거대한 연구들을 살펴보는 것은 저에게 큰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현대 미국 대학교의 조직 체계는 우리의 지식을 쪼개놓는다는 점에서 좋지 않습니다. 학문 분야에 의해서 뿐 아니라 학자들의 연구방식에 의해서도 나뉘어져 있습니다. 통계 자료를 이용하는 경제학자들은 실험을 통해 연구하는 경제학자들에 대해 비판적입니다. 현장 연구를 하는 학자들은 통계를 이용하는 학자들에 대해 비판적입니다.매우 운 좋게도 저와 빈센트 오스트롬은 1970년대 초에 다른 철학적 기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함께 효율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센터를 세웠습니다. 빈센트는 이 센터에 정치이론과 정책분석 워크샵(Workshop in Political Theory and Policy Analysis)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는 워크샵을 통해 과학을 바라보는 다양한 철학적 관점이 더 가깝게 연결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우리 워크샵은 항상 경제학, 정치학, 그 외 다른 분야에 걸쳐서 다양한 학자들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환경적,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으로 다양한 측면에서 제도적 조정을 어떻게 할 것인지를 연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제도적 조정을 통해 도시의 경찰치안 대행자, 관개시설, 숲 자원의 관리 등을 이룰 수 있는지 깊이 있는 연구를 했어요.워크샵의 철학은 매우 큰 국제적 프로그램으로까지 확산되었습니다. 1990년대 초 국제연합식량농업기구(FAO)는 숲의 환경과 그것을 관리하는 방식에 대해 연구해주기를 원했습니다. 우리는 이 연구가 미국 학자들만으로 진행되기에는 부족하다고 생각했어요. 다양한 국가에서 정보를 수집하고 현장을 방문하는 것이 필요했으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숲 자원 관리에 관심이 있는 여러 국가의 학자들과 함께하는 네트워크를 개발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수 년 동안 작업해온 자료를 사용하는데 필요한 매우 수준높은 훈련을 할 수 있었어요. 또한 우리는 계속해서 방법을 찾고 전략을 논의하기 위해 각 지역의 학자들이 만나는 지역 모임을 장려해 왔습니다. 그리고 2년마다 전체 네트워크가 만나면서 서로 계속해서 배워가고 있습니다. 만약 누군가 그저 자신의 연구 결과를 강변하고 싶다면, 도서관이나 협회에 연구 자료를 배치하면 끝입니다. 굳이 워크샵 내에서의 동등한 교류를 추구할 필요가 없죠. 그러나 현장과 실험실에서 어떤 이론을 이해하고 테스트하고자 한다면, 그래서 세계에 퍼져있는 다양한 제도적 조정을 진실로 깊이 있게 연구하고 싶어 한다면, 다양한 지역과 다양한 지위에 있는 동료들과 함께 연구하는 것이 가장 과학적인 방법입니다. 우리가 연구에 사용했던 이같은 방식은 <함께 일하기 : 집단행동, 공유자원, 다중적 실천(Working Together: Collective Action, the Commons, and Multiple Methods in Practice)>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전문을 보시려면 위의 PDF 아이콘을 눌러 파일을 다운로드 받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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