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로존 탈퇴 공포가 긴축정책에 대한 분노를 이겼다.” 지난 17일 그리스 총선 결과를 본 ‘월스트리트 저널’의 평가다. 투표에 참여하는 그리스 시민들의 마음의 일단을 표현하고 있다. 2008년 이후 5년째 이어진 경기후퇴와 2010년 이후 3년째 계속되는 강도 높은 긴축의 악순환으로 더 버티기 어려워진 그리스 시민들의 분노가 이번 총선에서 어떤 선택으로 이어질 것인지 세계가 초조하게 지켜봐야 했다. 아마 그리스 선거 역사상 세계의 관심을 이렇게 끌었던 경우는 없었으리라. 동시에 그리스 시민들의 분노의 폭발을 두려워한 금융시장과 독일 등 유로 핵심 국가들은 온갖 방법을 동원해 그리스인들에게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좌파연합인 시리자(Syriza)를 선택하면 그리스가 마치 즉시 끝장날 것처럼 언론매체들을 동원해 선전했다. 심지어 투표 전날 ‘파이낸셜 타임스’ 독일판은 ‘그리스 국민들에게’라는 사설을 싣고 선거에서 현명한(?) 선택을 하라고 협박해 물의를 일으켰을 정도였다. 좌파연합 시리자는 긴축 재협상을 원했던 것이지, 한 번도 유로존 탈퇴를 주장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들의 집권은 곧 유로존 탈퇴라고 분위기를 몰고 갔다.어쨌든 금융시장과 유로 중심국들의 협박이 먹혔던지 이변은 없었다. 그리스 유권자들은 60% 미만의 전례 없이 낮은 투표율을 보이며 적지 않게 투표 자체를 포기했다. 투표에 참여한 유권자는 좌파연합 시리자보다 약 3% 정도 더 많은 표를 긴축지지 정당인 신민당에게 줬다. 그러자 온갖 언론들이 “금융시장은 안도했다”고 대서특필했다. 그리스 시민들의 심정이 어떠했는지를 취재한 언론은 없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에도 세계는 여전히 시민이 아니라 금융시장을 중심으로 돌고 있었다. 유럽 채권시장의 운명이 유럽의 작은 나라 그리스 운명보다 중요했다.그러나 진정 이번 선거 결과가 그리스 시민들에게 안도할 일인가. 나아가 금융시장과 유로존에게도 안도할 일인가. 선거 전까지 파국을 향해 치닫던 유럽위기가 선거 후에 무엇이 변했는가. 결국 그리스인들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선택을 한 것이다. 그렇다면 안도할 일은 없는 것이 아닌가. 위기의 시계는 계속 작동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버드대학의 케네디스쿨 교수인 대니 로드릭(Dani Rodrik)은 총선 전인 12일 프로젝트 신디케이트(Project Syndicate)에 기고한 ‘우리가 알던 세계의 종언(The End of the World as We Know it)’이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좌파연합 시리자가 승리할 경우 최악의 시나리오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17일 선거에서 시리자가 승리한 후 그리스의 새 정부는 IMF·EU와 맺은 구제금융과 긴축협약에 대한 재협상을 요구한다. 독일 메르켈 총리는 그리스가 기존 협약을 준수해야 한다고 고집한다. 금융의 붕괴가 임박한 것을 우려해 그리스에서 예금인출 사태가 벌어진다. 이번에는 유럽중앙은행(ECB)이 도움을 거절하고 그리스은행의 현금은 고갈된다. 그리스 정부는 자본유출입 통제에 들어가고 마침내 국내 유동성 공급을 위해 드라크마(drachma) 통화를 부활시킬 수밖에 없게 된다.그리스가 유로존을 떠나자 모든 시선이 스페인에 쏠린다. 독일을 비롯한 유로국가들은 처음에는 스페인의 뱅크런을 막기 위해 모든 것을 할 것이라며 단호한 모습을 보인다. 스페인 정부도 추가적 재정 삭감과 구조개혁을 발표한다. 유로안정기구(ESM)의 자금지원에 힘입어 스페인은 수개월 동안 파산을 면한다. 그러나 스페인 경제는 계속 악화되고 실업률은 30%를 향해 올라간다. 마리아노 라호이(Mariano Rajoy) 총리의 긴축조치에 반대하는 시위대들로 인해 총리는 재총선을 소집한다. 그의 정부는 유권자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극도의 정치적 혼란 상황에서 총리는 사임한다. 메르켈 총리는 독일 납세자들이 이미 충분히 도와줬다면서 더 이상의 스페인에 대한 지원을 거절한다. 스페인 상황은 빠르게 뱅크런·금융 붕괴, 그리고 유로 탈퇴로 이어진다.독일·핀란드·오스트리아·네덜란드 등으로 이뤄진 미니 유로 정상회의가 급히 소집되고 공동통화로서 유로를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프랑스와 이탈리아 등 다른 회원국에 대한 금융압력을 증대시킬 뿐이다. 유로존의 부분적인 와해가 현실화하면서 금융 용심 융해(Meltdown)는 유럽을 넘어 미국과 아시아로 확산된다.그런데 이상의 시나리오가 과연 17일 총선에서 좌파연합 정당이 승리해야만 작동할 것인가. 오히려 현재의 총선 결과가 이 시나리오의 작동을 부채질할 개연성도 있지 않을까. 그리스 총선 직후 스페인 국채금리가 7%를 넘어 사상 최고를 기록했다는 소식은 이 가능성을 말해 주는 것은 아닐까.이 글은 매일노동뉴스에 기고한 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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