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머리 흩날리며 언론을 지키는 기자. 언론을 천직으로 삼은 기자에겐 깨끗한 꿈이다. 해직된 후배들이 고생하는 데 나만 편할 수 없다며 교수 제의까지 거부한 송건호 선생을 서울 영등포의 허름한 한겨레 사옥에서 만났을 때다. 하얀 머리칼이 참 눈부시게 다가왔다. 당시 청암의 춘추를 짚어보니 고희 전이었다.2011년 11월 현재 한국 언론계에는 일흔을 넘긴 기자 2명이 현역으로 뛰고 있다. 행운의 주인공은 조선일보 김대중 고문과 중앙일보 김영희 대기자다. 김 고문 보다 김 대기자의 나이가 많다. 1936년생이다. 일흔일곱 살에 현역인 언론인은 마땅히 아름답게 다가와야 한다. 언론계 후배라면 경의를 표하는 게 예의일 터다.하지만 유감이다. 아무래도 그럴 수 없다. 당위와 현실이 달라서다. 청암과 두 사람이 걸어온 길을 대비하고 싶진 않다. 내가 조선일보 고문을 비판해 온 이유 또한 그가 오월의 민주시민들을 살천스레 몰아친 과거 때문만은 아니었다. 자신의 범죄적 보도에 진솔한 반성이 없어서만도 아니었다. 그가 노상 써가는 칼럼이 대한민국의 미래에 짙은 어둠을 드리운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그는 최근 서울시장 선거 국면에서도 박원순의 ‘안보관’을 의심하는 일차원적 색깔론을 무람없이 들이댔다.고문과 대기자의 글은 남북관계에서 차이가 있다. 대기자는 ‘햇볕정책’을 지지해왔다. ‘사주’인 홍석현 회장이 남북관계에 전향적인 ‘배경’도 무시할 수 없겠지만, 적어도 대기자의 글이 고문만큼 수구적이지는 않다. 그래서다. 일흔일곱 대기자의 칼럼에 칼을 들이대기까지 망설임이 컸다. 하지만 대기자의 행복한 노년보다 더 중요한 것은 당연히 우리가 살고 있는 공동체의 미래다.대기자 김영희는 최근 “국가이익에 역주행하는 민주당” 제하의 칼럼에서 현 시국의 첨예한 쟁점인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에 대해 민주당을 날 세워 비난했다. “그들은 이명박 정부 아래서 수출이 늘고 경제사정이 호전되어 사회의 양극화 현상과 2040 세대의 불만이 완화되는 것을 경계한다”고 잘라 말했다. 이어 민주당 국회의원들은 “한국 경제에 좋은 것, 한국 경제의 경쟁력을 높이는 것에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면서 “FTA의 직접적 혜택은 한국경제에 돌아간다. 일자리가 35만 개 정도 늘고 농업의 경쟁력 강화가 기대된다”고 썼다.곧장 묻고 싶다. 사실 확인을 했는가? 칼럼이라고 사실 확인에서 자유롭지는 않다. 사실에 근거하지 않거나 왜곡 위에 주관으로 담는 의견은 저널리즘이 아니다. 기자의 상식으로 돌아가 살펴보자. 민주당이 경제가 호전되는 것을 경계한다는 주장은 기자로선 매우 부적절한 단언이다. 집권당 대변인의 정치공세 수준 아닌가. 농업 경쟁력 강화가 기대된다는 말은 더 뜬금없다. FTA의 직접적 혜택은 한국경제에 돌아간다거나 ‘일자리 35만 개’ 대목은 정권의 홍보성 부르대기일 뿐이다.무릇 기자가 할 일은 정권의 홍보 문구를 옮기는 데 있지 않다. 대기자라면 말할 나위 없다. 더구나 전망은 크게 엇갈리는 상황이다. 이를테면 정책 경험을 갖춘 경제학자 정태인에게 한미 FTA는 “우리 앞날에 어마어마한 걸림돌, 아니 낭떠러지”다. 실제로 한미 FTA를 두고 우리 사회는 분열하고 있다. 언론이 제 노릇을 전혀 못해서다. 신문시장을 독과점한 세 신문사는 다양한 의견을 소통시켜 공론을 형성해가야 할 섟에 오직 정파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김영희 기자가 몸담고 있는 <중앙일보>를 보기로 들어보자. “민노당 2중대 민주당” 따위의 1면 머리기사 제목에서 정파적 사고가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언론인으로서 자기정체성을 지니고 있는 걸까 새삼 궁금하다.두루 알다시피 노무현 정권이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에 나선 순간부터 나는 날선 비판을 해왔다. 다만 2008년 9월 미국 월스트리트에서 금융위기가 터졌을 때, 그 미봉책의 바닥이 드러나 2011년 세계경제가 다시 위기를 맞을 때, 나는 이 땅의 자칭 ‘보수세력’도 한미 FTA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않겠는가 기대했다.하지만 전혀 아니다. 미국 의회 단상에서 의기양양 했던 대통령 이명박의 ‘영혼 없는 연설’을 톺아보라.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은 속성상 그렇다고 치자.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만이 한국 경제의 살 길이라고 아우성치는 저 언론인들의 사고를 정말이지 나는 이해할 길이 없다. 솔직히 부럽기도 하다. 대체 그들은 어떻게 저런 신념으로 무장했을까?일흔이 넘도록 기자 생활을 하면서도 사실 확인조차 무시하거나 노상 색깔공세에 사로잡힌 두 ‘큰 기자’에게 후배로서 예의를 지키는 길은 무엇일까? 훗날 한국 언론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한국 언론계를 이어받을 젊은 언론인들은 김대중과 김영희를 어떻게 쓸까. 상상에 맡기되 분명한 하나만 적시하자. 모두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흰 머리 흩날리며 언론사를 지키는 기자가.이 글은 ‘미디어 오늘’ 에도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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