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정책의 컨트롤타워를 놓고 설왕설래하던 정부-‘과학기술출연연(硏) 발전 민간위원회(위원장 윤종용 공학한림원 회장)’이 대승적 차원의 합의를 본 듯하다. 국가과학기술위원회를 장관급의 행정위원회로 격상시켜 국가 연구/개발(R&D) 정책을 총괄 기획하겠다는 것이다. 각 부처로 분산되어 있는 정부출연연구소를 하나로 통합 관리하는 안도 추진되고 있다고 한다. 이명박 정부 들어 과학기술부의 폐지로 패닉 상태에 빠져 있던 과학기술계에 간만의 희소식이 들리는 것 같다. 여전히 예산의 기획/편성/조정권의 확보 문제와 교과부와의 역할 정립 문제 등이 남아 있지만 과학기술 R&D는 국가의 장래가 달린 일인만큼 열린 대화로 과학기술계의 억눌린 소망이 이루어지길 바란다[1].진정으로 과학기술계의 목소리를 듣겠다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번 국가위의 장관급 행정위원회 격상은 과학기술계가 정부를 상대로 당당하게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단계로 접어들었다는 희망을 보여주는 듯 하다. 사실 이번 협상은 기술경쟁시대로 접어든 세계화의 경쟁 구도 속에서 실용정부가 어쩔 수 없이 취해야만 했던 스탠스인지도 모른다. 연구/개발 정책이라 해도 이번 개편에서 중심이 되는 것은 정부출연연구소의 통합관리와 국가의 이익에 부합하는 기술개발이기 때문이다. 당장 연구개발에서 비중이 얼마 되지 않는 기초연구의 예산편성은 교과부에 남게 될지, 국가위가 가져갈지도 불투명한 상황이다[2].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고 국가경쟁력에 직접적으로 관련되는 기술개발연구에 초점이 맞추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런 상황에서 기초과학의 투자를 외치는 것은 역설적으로 투정으로밖에 들리지 않을 것이다. 한 나라의 기초과학에 대한 투자는 먹고 사는 것과는 별개로 정치지도자들의 철학과 관련된 일이다. 이미 반네바 부쉬라는 인물에 대한 이야기(2010.07.09)와 막스플랑크 연구소(2010.05.24)에 대한 언급에서 기초과학은 국가경쟁력보다는 국격과 관계되는 철학의 문제임을 지적했다. 결단은 지도자들이 내리는 것이다.과학기술계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기초과학에 종사하는 과학자로서 거대한 자본이 투자되는 과학기술 R&D 정책의 모든 부분에 관심을 가질 수도, 가지고 싶은 생각도 없다. 과학기술정책의 전문가들이 존재하고 그들이 정책을 결정하는 것도 나름 타당한 논리를 가진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현재 노벨상 수상자들을 배출하고 있는 선진국들의 기초과학정책에는 ‘문화로서의 과학’이라는 사회구성원 전체의 동의가 녹아 있고, 그러한 광범위한 동의 속에서 당장은 돈이 되지 않을 것 같은 연구들이 추진되고 있다는 사실, 나아가 그런 연구들로부터 과학계를 선도하는 주제들이 쏟아져 나오기도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간과하고 있는 것 같다. 실제로 과학기술정책에 대한 과학기술자들의 평가에서 기초과학은 처참한 점수를 기록했다. 과학기술자들이 정부의 과학기술정책예산이 꾸준히 증가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과학기술자들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응용연구와 개발연구가 주를 이루고 있는 상황 속에서 기초과학이 상대적으로 천시받고 있다는 점이야 말로 비판의 핵심이다[3]. <민병구 외 (2001), 표 3-10>또 한가지 지적해야만 하는 것은, 과학기술계의 불만이 터져나올 때마다 우는 아이 떡 하나 더 주는 심정으로 불만을 봉합하려는 관료들의 한심한 작태다. 그들은 현장의 연구자들이 무엇을 바라는지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과학기술자들은 의사나 변호사와 같은 대우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과학기술이 사회에 기여한 만큼의 적절한 대우일 뿐이다. 과학기술인들의 절반 이상은 직업선택의 1순위 동기로 ‘지적욕구의 충족’을 들었다 [4]. 누구나 돈을 많이 버는 것을 원하겠지만, 과학기술인들이 현 직장을 선택한 동기로 꼽은 1순위는 ‘직업의 안정성’이었다[5]. 대학과 출연연의 급여가 비슷한 수준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대학’->’연구소’로 자리를 옮기는 인원은 거의 전무하다는 것만 봐도, 과학기술인이라는 직업군이 지닌 특성을 짐작해볼 수 있다[6]. 그들에게도 욕심이 있겠지만 과학기술인들의 사고는 소박하다. 지적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안정된 직장, 그게 전부다. 출연연의 연구자들이 정부의 정책이 바뀔 때마다 알러지 반응을 보이는 이유가 바로 ‘직업의 안정성’ 때문인 것이다.<박경진(2005), 표 4>한국사회에서 과학자의 사회기여도와 그에 따른 대우일종의 사회적 동의 속에 기초과학에 투자하고 있는 국가들에서, 정책을 이끌어가는 지도자들의 상당수가 과학자 혹은 공학자 출신의 관료들이 다수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정치인들과 국민들이 그렇게도 갈망하는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바로 그런 국가들에서는 과학자와 정치인이 주종관계로 인식되지 않는다. 그들은 동등한 파트너이고 그래야만 한다.물리학 박사 출신의 메르켈 총리가 집권하고 있는 독일의 과학기술 연구개발비 중에서 기초과학이 차지하는 비중은 21.2%로 12.6%에 불과한 한국의 두 배에 이른다. 또한 반네바 부쉬라는 인물이 <과학, 끝없는 미개척지>라는 보고서를 통해 기초연구의 중요성을 역설한 미국에서는 이미 1920년대부터 ‘과학기술인 리더그룹’이 형성되어 정부와 대등한 관계를 이루고 있다. 프랑스와 중국도 엘리트 양성에 초점을 둔 교육제도를 바탕으로 과학기술인이 정부 관료로 진출하는 전통이 정착되어 있다. 물론 국가과학기술위원회를 격상시키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과학기술계는 조금 더 넓게 자신들의 처지를 되새김질해볼 필요가 있다. 한국의 국회의원 중 이공계가 차지하는 비중은 5%에 불과하고, 중국과 러시아는 30%를 훌쩍 넘기며, 가까운 일본조차 10%에 육박한다. 한국에 과학기술인 출신의 리더그룹이 미진하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존경 받을 만한 제대로 된 리더가 없는 곳에서 정책은 방황하고 길을 잃는다.물론 사회적 형평성에 맞추어 과학기술인들의 지위를 요구하는 일이 필요하다. 모든 사람들이 어려운데 과학기술계만 더 많은 자원을 요구할 수는 없다. 기초과학에 대한 투자야말로 사회구성원 전체의 동의가 있어야만 추진할 수 있는 고급투자항목인 것이다. 하지만 황우석 사태와 광우병 사태, 그리고 최근의 천안함 사태를 거치면서 국민들이 과학자에게 바라는 기대감이 어느 정도인지는 이미 확인되었다고 본다. 또한 천안함 사태에서 국내의 과학자들은 입을 닫고, 외국에 거주하고 있는 과학자들만이 그나마 정부에 비판을 제기하는 상황은 한국의 과학기술계가 여전히 스스로를 정부의 하수인에 불과한 존재로 여기고 있으며, 또한 반대로 정부가 과학기술계를 옭매고 있는 강력한 존재임을 시사한다. 하지만 반대로 국민들이 과학기술인들에 대해 가지는 인식은 상당히 온정적이다. 우리 국민들은 과학자의 사회적 기여도를 의사나 변호사와 비슷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그들에 대한 경제적 대우는 바닥이라고 여긴다. 과학자와 공학자들만이 사회적 기여도와 경제적 대우가 역전되는 직업군이다. 이 정도라면 기초과학에 대한 투자를 위한 사회적 동의는 이미 구해져 있는 셈이다. 문제는 누가 그 장기적이고 철학이 필요한 정책을 계획하고 추진할 것인가에 달려 있다.과학기술을 둘러싼 한국사회의 정치구조과학기술인들을 대상으로 한 2001년 설문조사는 현재 과학기술정책에 영향을 미치는 집단이 ‘과학기술관료’와 ‘정치인’이라는 결과를 보여준다. 과학기술인들의 인식을 반영한 설문조사결과처럼 보이지만 이러한 인식은 거의 사실과 부합한다. 실질적인 정책결정자인 정치인들 중 과학기술인 출신이 거의 전무하다는 사실은 자명한 것이다. 아마 현장경험을 지닌 과학기술인으로 기준을 좁힌다면 그나마 드문드문 존재하는 이공계 출신이라는 꼬리표도 거의 사라질 것이다.<송성수(2004), 표 4>국가과학기술위원회의 구성은 상당수의 과학기술계 인사들이 포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과학기술정책전문위원 10명중 7명은 경영학 혹은 행정학 분야의 인물들로 구성되어 있다[7]. 지금까지 국가위의 역할이 자문에 불과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으니, 과학기술정책을 관장하는 전문위원의 대다수가 경영 혹은 행정학 관료들이라는 것은 그다지 중요한 논점이 되지 못한다. 어차피 국가위는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처지가 아니었다. 지금부터가 중요하다. 얼마 전 통합된 한국 연구재단은 연구자 중심의 지원을 약속했다. 현장경험을 지닌 과학자들을 단장으로 삼아 제대로 된 정책을 펼치길 기대한다. 사실 중요한 것은 예산권을 쥐고 있는 기획재정부의 인적 구성일 것이다. 기획재정부에서 연구개발 업무를 담당하는 연구개발예산과의 인원은 8명이다. 일일이 그들의 전공과 경험을 확인해볼 길도 없지만, 예산과 경제 분야를 총괄하는 기획재정부의 인력 중에 과학기술계의 현장경험을 가진 이들이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국가위가 기획재정부로부터 예산권을 되찾아오길 바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국가위는 과학기술관료라기보다는 자문위원들의 집단이다. 장관급의 격상이 있더라도 예산권이 없다면 그 실질적 효용은 전무하게 될지 모른다. 기실 과학기술정책을 집행하는 중간관리계층에는 이제 꽤 많은 과학기술계 인력들이 스며들어 있다. 국가위의 구성과 연구재단의 구성을 보면 이는 자명하다. 하지만 과학기술정책에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상층부 집단이 어떤 철학을 가지고 정책을 입안하는가가 가장 중요한 문제다. 정치지도자들이 과학기술을 바라보는 관점은 한 국가의 과학기술정책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이는 외국의 성공적인 사례들에서 분명해진다.미국의 루즈벨트나 케네디 대통령이 현장경험을 지닌 존경 받는 과학기술자들로부터 조언을 구하고, 과학기술정책을 실질적으로 과학기술자들에게 맡기게 되는 과정과 그 이후 펼쳐진 미국과학기술의 급부상을 보라. 프랑스의 드골 대통령이 국립과학연구센터의 연구기능을 대폭강화하고 과학기술자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정책을 펼쳤다는 사실을 보라. 프랑스의 이러한 과학기술정책은 나폴레옹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독일은 전후 과학기술의 진흥을 위해 하이젠베르크를 중심으로 연구심의회를 만들어 10년 만에 과학기술선진국의 반열에 들어섰다. 영국의 대처 수상도 “훈련 받은 지성을 존중하지 않는 국가의 말로는 뻔하다”라는 말로 기초과학의 지원을 정치의 우선과제로 설정했다. 자유민주주의 국가들 뿐 아니라 러시아의 레닌과 스탈린 시절도 마찬가지다. 역사가들은 그 시기를 러시아의 ‘과학문화 혁명시대’라고 부를 정도다[8]. 또한 일찌감치 과학기술자들이 정부와 대등한 입장에서 정책에 참여했던 미국의 경우, 여러 가지 펠로우쉽을 바탕으로 과학기술자들은 의회, 정부기구, 미디어 쪽에 파견해 실질적으로 정책의 입안에 관여하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한국은 과학기술자가 되면 직업선택의 폭이 상당히 좁은 구조를 갖고 있으며, 바로 이 점이 역으로 과학기술자들의 사회참여와 위상강화에 걸림돌이 된다. 이제 과학기술자들은 단순히 자문을 하거나 불만을 토로하는 수준을 넘어 실질적인 정책에 참여할 기회를 마련해야 한다. 그러한 과정 속에서만 과학기술자의 위상이 강화되고 현장이 원하는 정책이 마련될 수 있다. 과학자라고 연구에만 전념하고 정책에 참여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우리가 과학 선진국으로 생각하는 대부분의 국가들에서 과학자들은 자신들의 철학을 견지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정치에 입문한다. 한국과학자들을 사로잡고 있다는 중인의식의 오명을 바로잡기 위해서라도 과학자들이 사회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의 폭은 넓어져야만 한다. 사회적 동의는 분명히 존재하며, 남은 것은 과학자사회의 치열한 투쟁과 정부의 동의 뿐이다.과학기술의 선진국들이 이미 오래 전에 이루어냈던 과학기술자들과 정부가 대등한 입장에서 정책을 입안하는 구조는 곧 한국사회에서도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특히 선진국의 과학정책에 많은 영향을 받는 한국사회에서 이러한 변화는 자연스러울 수 밖에 없다. 문제는 그러한 변화 속에서 과학기술계의 리더쉽이 발휘되는 방법에 있다. 특히 실용주의적 과학관에 젖어 여전히 박정희 시대의 향수에 빠져 있는 이들에 의해 과학기술정책이 좌우된다면 당시 입안된 정책으로 인해 40년인 지난 지금까지 노벨상을 꿈도 꿔보지 못하는 현실은 개선될 수 없다. 박정희를 과학대통령으로 칭송하고 그 정책을 답습하려는 세력은 결코 선도적인 연구를 위한 정책을 입안할 수 없다. 아쉬운 것은 과학기술정책이 사회의 이슈가 될 때마다 입을 다무는 야권의 무능함이다. 이번 국과위 사태에서도 야권은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박근혜 전 대표가 박정희 시대의 향수에 젖은 이들과 과학기술정책의 화두를 가로채고, 한나라당이 과학기술특위를 설치한다고 부산을 떨고 있음에도 야권에서는 그 어떤 목소리도 나오지 않는다. 과학은 진보정당의 화두가 아닌가? 과학계는 언제까지 박정희 시대의 정치인들에게만 기대야 하는가? 참으로 이상한 사회가 아닐 수 없다.기초학문과 사회개혁산업사회로 접어든 국가에서 과학기술정책이 산업과 연계되어 투자되는 경향은 이상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기초과학에 대한 투자는 철학을 지닌 정치지도자와 그런 정치지도자를 견제하는 과학자사회의 주체성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바네바 부쉬와 하이젠베르크가 미국과 독일에서 했던 역할을 담당할 인물은 반드시 필요하다. 기초과학의 생존요건은 단순한 투자의 문제가 아니라 철학의 문제다. 그것은 사회구성원들의 인식 수준의 문제이며, 자본주의를 추종하는 사회의 가치가 어떤 방식으로 흘러가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지표이기도 하다. 삶의 가치를 돈과 명예에 대한 추구보다 우선시하는 사회의 가치관은 하루아침에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인문학의 위기는 기초과학의 위기와 맞물려 있다. 인문학의 위기와 기초과학의 위기는 기초학문의 위기, 나아가 사회의 가치와 연결된 단일한 주제다.과학기술정책에 영향을 미치는 과학기술계 출신의 관료는 점차 증가하는 추세에 있지만 여전히 그곳에서 기초과학자들의 목소리는 부족하다. 모든 과학기술정책이 응용과 산업화에 초점을 맞추고 진행되는 사회에선 기초과학자들이 낼 수 있는 목소리가 존재할 수조차 없다. 인문학자들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인문학의 유용성을 강조하고, 인문학으로 사회의 윤리를 바로 세우겠다는 실용주의적인 발언을 해봐야 그것은 단발성의 구호로 끝날 운명이다. 중요한 것은 사회를 바꾸는 것이다. 기초과학과 인문학 모두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광범위한 국민적 지지 속에 정치를 개혁하는 방법 외에는 없다. 기초학문을 바로 세우는 일은 곧 정치활동이다.따라서 과학기술정책에서 영향력을 행사해야 하는 집단이 과학기술자여야 한다는 과학기술계의 요구는 소박하고 당연한 생활정치의 연장선상에 있다[9]. 국가위 개편이 과기부 폐지로 불만에 쌓인 과학기술자들을 달래는 정책이어서는 안 된다. 그런 태도는 과학기술계를 대등한 파트너가 아니라 여전히 피지배계급으로 바라보는 구시대적인 발상에 다름 아니다. 과학기술계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개혁을 바탕으로 스스로의 위상을 높여가려는 노력 속에 그 동안 과학기술계가 중인의식 속에서 정부가 던져주는 떡만을 바라보고 살지는 않았는지 반성해봐야 한다. 과학이 한 국가의 문화가 되는 일은 과학자에게는 정치적 투쟁이고 또 그래야만 한다.우리는 단 한번도 아인슈타인처럼 존경할만한 과학자를 가져보지 못했다. 하지만 한국사회의 구성원들은 그런 과학자를 만들기 위한 광범위한 지지에 합의하고 있다. 정치지도자들은 아인슈타인을 원하면서도 아인슈타인을 위한 정치를 거부하고 있다. 과학자들은 아인슈타인이 등장할 수 없는 기형적인 과학정책 속에서도 연구실 속에 틀어박혀 있다. 이제 움직일 때다. 과학이 한국에서 문화로 기능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사회구조의 재편이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아인슈타인을 위한 정치다. 그런 정치는 절대로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김우재 korean93@postech.ac.kr[1] 오세정, “과학기술행정 개편 성공 위한 3대 과제.” 문화일보, 2010.09.14. [2] 권혁동, “[비즈 칼럼] 국가과학기술위, 예산권부터 확보해야.” 중앙일보, 2010.09.14.[3] 민철구, 배영자, and 이은경, “과학기술자 사기진작을 위한 정책방안,” 과학기술정책연구원 (2001).[4] 민철구(2001) <그림 3-1>[5] 민철구(2001) <그림 3-2>[6] 박경진, “과학기술 인력정책 평가와 과학기술인 사회 비교,” 한국인사행정학회보, 4 (2005), 91-125.[7] 국가과학기술위원회 홈페이지 http://www.nstc.go.kr/ 참고. 흥미로운 점은 지방과학기술진흥협의회는 이름만 걸려 있고 단 한 명의 위원도 위촉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지난 정권의 지방분권화 정책은 국과위에서도 처참하게 무시되고 있는 듯 하다.[8] 박경진(2005), pp.108-109.[9] 이런 소박한 목소리에 대고 “이를 과학기술자가 독점한다는 것은 또 다른 문제점을 야기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라는 식으로 비난하는 것은 제살을 깎아 먹는 일에 다름 아니다. “송성수, “한국 과학기술활동의 성장과 과학기술자사회의 특징: 시론적 고찰,” 과학기술정책, 14 (2004), 77-93.” 이런 목소리를 내는 학자가 과학기술정책연구원(STEPI)의 일원이었다는 것도 아쉬운 대목이다. 게다가 과학기술발전에 이바지한다는 목표를 가진 STEPI의 연구원들 대부분이 경영학 출신의 관료들이라는 점은 더더욱 아이러니하다. 특히 그런 발언은 인문학 연구자들이 목을 매고 있는 연구재단의 운영에서 인문학 출신의 위원 숫자를 걱정하는 인문학 쪽에서 할 말은 아닌 것이다. “김태승, “연구자 자율성 보장하는 ‘재단 운영 독립성’ 확보 시급-한국연구재단 출범에 붙여_ 인문학자의 우려와 기대.” 교수신문, 2009.”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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