썩었다. 구리다.대한민국 총리를, 장관을 하겠다며 사뭇 당당했던 자들의 실체다. 다행히 저들의 탐욕은 꺾였다. 거짓말 총리와 투기꾼 장관은 ‘자진사퇴’했다. 하지만 정말 스스로 물러난 걸까? 전혀 아니다. 국회 인사청문회가 없었다면, 청문회의 야당의원들에게 저들의 썩은 곳과 구린 곳을 곰비임비 귀띔한 민주시민들이 없었다면, 지금 저들은 국민 혈세를 챙기는 ‘높은 자리’에 군림하고 있을 터다. 인터넷이 열어놓은 새로운 소통에 눈길이 쏠리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블로그, 트위터, 페이스북. 흔히 소셜미디어로 불리는 그 새로운 무기로 민주시민들은 ‘국민청문회’를 열었다. 국민검증 시대, 더 나아가 시민주권 시대라는 진단은 날카롭고 적실하다.미국에서 블로그 활동을 왕성하게 벌이는 크리스 브로건은 평범한 시민이 자기 목소리를 내며 변화의 물결을 이뤄가는 현상을 ‘아주 작은 혁명’이라고 불렀다. 기실 그가 아니어도 인터넷이 열어놓은 쌍방향 소통을 ‘작은 혁명’으로 규정한 사람은 적지 않다.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직접 검증에 나선 민주시민들의 눈부신 활동은 아주 작은 혁명의 전형적 보기다. 그런데 어떤가. 지나친 낙관은 비관 못지않게 위험하다. 인터넷 활동으로 세상이 바뀔 만큼 현실의 정치구조는 허술하지 않다.인터넷 활동으로 세상이 바뀔 수 있을까.다시 인사청문회를 톺아보자. 김태호·신재민·이재훈은 지금 성찰하고 있을까? 혹 억울하다며 울뚝밸을 삭이고 있진 않을까. 보라. 물러나 마땅한 다른 자들은 건재하지 않은가. 경찰 간부들을 모아놓고 언죽번죽 거짓말로 ‘훈시’한 경찰청장 조현오가 대표적 보기다. 위장전입의 범법자가 경찰 총수자리에 앉아도 좋은가? 더구나 그는 생존권을 애면글면 지키려는 국민에게 ‘법 질서’를 내세워 잔혹하게 폭력을 휘두르지 않았던가.아니, 더 솔직히 말하자. 과연 정치인 이명박이 청문회에 섰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김태호·신재민·이재훈을 쫓아냈지만 위장전입을 비롯한 ‘범법의 달인’들은 오래전부터 청와대와 내각, 입법부, 사법부에서 활개치고 있다.인터넷의 작은 혁명에 우리가 흔쾌히 동의만 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인터넷 문화를 깊이 연구한 학자들은 온라인으로 세상을 바꾸는 데는 한계가 또렷하다고 입을 모은다. 인터넷으로 뜻을 모은 사람들이 실제 행동에 들어갈 때 비로소 변화를 이룰 수 있다는 분석이다.물론 인터넷의 작은 혁명이 활발할수록 변화의 물결은 무장 거셀 터다. 이미 2008년 촛불항쟁은 인터넷과 현실이 만났을 때의 가능성을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다만, 수백만명이 100일 내내 수도 한복판에서 집회를 열고 시위를 벌였는데도 정치가 달라지지 않은 현실은 소중한 교훈을 준다. 그래서다. 대한민국 헌법이 제1조로 선언한 ‘모든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민주공화국’을 구현하려면, 주권자인 국민이 정치의 객체에서 주체로 나서야 옳다.마침 시민정치운동, 정치주권운동을 내건 움직임이 한국 사회에 싹트고 있다. 가령 며칠 전 발기인대회를 연 ‘복지국가와 진보대통합을 위한 시민회의’(시민회의)는 ‘썩고 구린 정치인’이 아예 공직에 취임할 수 없도록 입법운동을 벌이자고 호소했다. 기실 국회의원들의 의지만 있다면 입법은 충분히 가능하다. 공직자윤리법이나 인사청문회법을 개정해도 좋다.작은 실천과 행동이 변화 만들어문제는 과연 국회가 그 법을 만들까에 있다. ‘썩고 구린 정치판’(썩구정치판)을 갈아엎으려면, 입법운동이 열매를 맺으려면, 블로그·트위터·페이스북 활동과 더불어 작은 실천, 작은 행동이 절실하다. 인터넷과 실제 생활에서 개개인이 주권자로서 슬기를 모을 때 ‘아주 작은 혁명’은 큰 혁명을 일궈낼 수 있다.어둡고 음습한 정치에 촛불을 벅벅이 밝힐 때, 국민이 주권자의 권리를 지며리 찾아갈 때, 그 혁명은 인류 역사에 새로운 지평을 열지 않을까.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촛불항쟁은 그 가능성을 우리에게 웅변해 주었다. 그 혁명은 ‘아주 작은 대혁명’이다.손석춘 2020gil@hanmail.net*편집자/ 이 글은 <경향신문>에 실린 칼럼(9월3일자)입니다.
손원장님의 컬럼을 즐겨보고 늘 감동과 공감을 느끼는 새사연 멤버입니다. 오늘은 위 컬럼을 읽고 몇 자 적고자 합니다. 저는 장인의식을 갖고 일하는 컴퓨터 프로그래머입니다. 아직 장인의 반열을 넘 볼 수준은 아닙니다만, 나름 사명감같은 것을 갖고 있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위 컬럼에 느껴지는 어떤 분위기입니다. 즉 인터넷이 거론되면서 ‘역시 기술은 한계가 있어’라는 인식이 느껴졌습니다. 이런 느낌이 저 혼자만의 것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인터넷 활동으로 세상이 바뀔 수 있을까.”
저는 왜 이런 소제목 자체가 매우 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어떤 하나의 활동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그런 능력을 갖춘 활동이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데, 왜 이런 능력(세상을 바꾸는)에 대해 인터넷 활동이 질문받아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질문을 이렇게 바꾸면 어떨까요.
“언론 활동으로 세상이 바뀔 수 있을까.”
이 질문 또한 부당함을 느끼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세상의 변화는 다양한 분야와 다양한 층위에서의 변화들이 어울어지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닐까요? 인터넷 활동 하나만으로도, 언론 활동 하나만으로도 세상은 쉽게 바뀌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이 컬럼에서는 어떤 하나의 활동(인터넷이든 언론이든 아니며 기타 무엇이든)만으로는 될 수 없는 능력(즉 세상을 바꾸는 능력)을 인터넷 활동에 요청하는 이런 부당한 질문으로 인해, 흔히 소셜미디어(블로그, 트위터, 페이스북)로 불리는 그 새로운 무기가 폄훼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런 소셜 미디어들은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하였다고 봅니다. 그 역할 수행에 대해 박수를 쳐주고 용기를 북돋으면 될 일입니다.
세상을 바꾸는 일에 소셜 미디어만으로는 미치지 못함을 탓할 게 아니라, 다른 활동(시민운동, 언론)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했는지를 톺아보는 것이 더 좋은 방향이 아니었을까요?
크리스 브로건이 ‘아주 작은 혁명’을 애기한 것은 세상을 바꾸는 큰 혁명은 이런 ‘아주 작은 혁명’들이 쌓여 양질 변화를 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인터넷 활동이 세상을 바꾸는 큰 혁명을 못해 탓하는 글 속에서 저는 왠지 조선시대부터 내려오는 문인들의 장인들의 활동을 폄훼하는 오래된 나쁜 습관을 보는 것 같은 착각까지도 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단지 저만의 착각이길 바랍니다.
구르마님/ 인터넷은 물론 언론활동으로 세상이 바뀔 수 있을까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래서 기자를 그만두기도 했지요. 이 글은 조직사업(여기서는 시민회의)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