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뚝뚝 허무하게 떨어지는 선운사의 동백꽃을 보며 어느 시인이 한탄했지만 이번 봄엔 피는 것도 실로 잠깐이었다. 하룻밤 새 개나리, 진달래, 벚꽃이 일제히 꽃봉오리를 터뜨렸다. 천하의 음치인 나도 버스커 버스커의 ‘벚꽃 엔딩’을 흥얼거릴 정도다.한반도에도 봄이 오려나? 박근혜 대통령의 드레스덴 선언은 진정 훌륭하다. “군사적 대결의 장벽”, “불신의 장벽”, “사회문화적 장벽”, “단절과 고립의 장벽”을 넘어 “인도적 의제”, “공동번영 의제”, “통합 의제”를 실현하자는 얘기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나 노무현 전 대통령이 했다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박 대통령이나 메르켈 총리의 말대로 “통일 대박”의 시대가 열리는 것일까?흡수통일론이나 슬슬 흘리던 보수 쪽에서 이런 희망의 메시지가 터져 나온 것은 더더욱 긍정적이다. 그런데 왜 남북관계는 이렇듯 따뜻한 봄기운이 차오르다가도 급랭하는 것일까? 드레스덴 선언 직전 헤이그에서 열린 한·미·일 정상회담 전후도 그랬다. “북핵문제가 역내 평화와 안정에 중대한 위협이 되고 있는데 한·미·일 3국을 포함한 국제사회의 단합된 대응이 매우 중요하다고 봅니다.” 굳이 박 대통령이 하지 않아도 될 얘기다. 북한은 정상회담이 시작되자마자 2시35분과 45분에 노동미사일 두 발을 발사했다.박근혜 정부의 대북 정책기조는 이명박 정부와 마찬가지로 “상호주의 원칙”을 따르고 있다. “협동에는 협동으로, 배반에는 배반으로”라는 이 전략(TFT)은 남북관계처럼 반복되는 게임에서 대단히 우수한 성과를 낼 수 있다.하지만 이 전략은 치명적인 약점도 지니고 있다. 어느 한 쪽이 실수로 배반했을 경우에도 보복을 한다면 그것이 또 다시 상대의 보복을 부르는 배반의 악순환을 불러올 수 있다. 박왕자씨 살해 사건은 북한 소년병의 실수로 보는 것이 온당할 것이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는 상호주의 원칙에 따라 금강산관광을 중단시켰고 남북관계는 급속하게 얼어 붙었다.협동의 이익이 계속 줄어들자 북한은 이 상황을 치킨게임으로 만들어 버렸다. 치킨게임은 “미친놈”이 이기는 게임이다. 상대가 배반을 해도 어쩔 수 없이 참아야 하는 상황을 만들면 치킨게임이 된다. 연평도 포격이 바로 그것이다. 상호주의에 따르면 우리도 포격을 해야 하지만 그건 전쟁을 불러일으킬 테고 남한이 더 큰 피해를 보기 때문에 이명박 정부는 치킨(바보)이 될 수밖에 없었다.박근혜 대통령의 드레스덴 선언은 사실상 “햇볕정책”이다. 죄수의 딜레마와 치킨게임을 번갈아 오가는 현재 상황을, 양쪽 다 협동의 이익을 누릴 수 있는 사슴사냥게임으로 바꾸겠다는 선언이다. 박 대통령이 세가지 의제를 실현해서 “통일 대박”을 터뜨리려면 두 가지 전제를 충족시켜야 한다. 먼저 협동의 이익을 대폭 늘려야 하고 다음으론 서로 믿을 수 있어야 한다. 물질적 이익과 상호신뢰, 이 두 가지가 무럭무럭 커나가야 사슴사냥게임에서 협동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신뢰는 선운사의 동백처럼 쌓기는 어려워도 무너지는 건 잠깐이다. 어느 한쪽만 배반해도 바로 붕괴하는 게 신뢰다. 북한의 신뢰를 얻는 일은 의외로 간단하다. 개성공단에 삼성이나 현대가 입주하면 된다. 북한의 낙후한 도로와 철로를 최신식으로 바꾸고 에너지 낭비적인 건물들을 개량하면 된다. 지금 동아시아에는 돈이 남아 돌아 걱정이다. 한·중·일 세 나라의 외환보유액만 해도 4조달러를 넘는다. 이 돈의 10%만 동아시아협력기금으로 만들어 북한에 투자한다면 동아시아 나라들은 물론, 총수요 부족에 시달리고 있는 전 세계가 환영할 것이다. 대통령을 비롯한 지도자들이 쓸데없는 소리를 해서 북한 정권이 배반으로 돌아설 빌미를 제공해선 안된다.박 대통령의 드레스덴 구상이 활짝 개화하면 그 얼마나 좋을까? 남남북녀가 벚꽃 엔딩을 흥얼거리는 그림은 상상만 해도 정녕 흐뭇하지 않은가?‘봄바람 휘날리며 /흩날리는 벚꽃 잎이 /울려 퍼질 이 거리를 /둘이 걸어요.’*이 글은 경향신문에 기고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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