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12일 미국 무역대표부의 웬디 커틀러 대표보는 “한국은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가입에 앞서 한·미 FTA(자유무역협정) 이행과 관련한 우려 사항을 우선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다. 원산지 검증 완화, 금융회사의 고객 데이터베이스(DB) 공유, 자동차 분야의 비관세장벽 완화, 유기농 제품의 인증시스템이 바로 그것이다.미국(한국) 상품이 한·미 FTA로 인한 관세 혜택을 받으려면 그것이 미국(한국)에서 생산되었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이런 원산지 검증을 하는 곳은 관세청이다. 예컨대 한국에 수입된 오렌지 주스의 양이 미국 생산량보다 많다면 그건 분명히 원산지 규정을 어긴 것이다. 당연한 정부의 업무에 시비를 거는 건 주권 침해일 뿐이다.커틀러가 마치 불법적 보호무역주의 조치인 양 ‘자동차 분야 비관세장벽’이라고 표현한 것은 환경부의 ‘저탄소 협력금’ 정책을 말한다.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적은 차량 구입자에겐 보조금을, 기준 이상인 경우엔 부담금을 물리는 정책이다.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기후온난화를 조금이라도 늦추기 위한 조치다. 미국 자동차 회사의 이익이 우리 아이들의 목숨보다도 소중하다는 얘기인가.한·미 FTA와 한·유럽연합(EU) FTA는 금융기관이 보유하고 있는 금융정보를 해외에 위탁 처리할 수 있도록 했다. 미국은 금융거래 원장 같은 중요 정보까지 해외에 위탁하고, 재위탁의 범위도 확대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이제 당신의 개인정보 그 이상이 한반도를 뛰어넘어 미국이나 EU에 떠돌아다니게 될 것이다.우리는 유기농 인증제를 2008년에 도입했다. 하지만 이 제도는 6년이 지난 지금도 실행되지 않고 있다. 미국 정부의 요구 때문이다. 나아가 앞으로 몇 년이 더 걸릴지도 모를 미국과의 ‘상호동등성 협정’을 체결한 이후에나 이 중요한 정책을 실행하라는 것이다. 그때까지 우린 어떤 식품이 진짜 유기농인지 알 도리가 없다.우리는 2006년의 한·미 FTA 4대 선결요건을 생생히 기억한다. 이번엔 TPP 4대 선결요건이다. 한·미 FTA 협상, 체결, 재협상, 비준 전 과정에서 그랬듯이 더 많은 요구가 뒤따를 것이다. 당장 의약품 가격제도, 쇠고기 완전 개방이 기다리고 있다. 보건복지부는 지난해 9월 약의 사용량이 일정 수준 이상 증가하면 약값을 인하하는 제도(사용량-약가 연동제)를 도입했다. 의료비에서 약값이 차지하는 비중이 선진국의 2배에 달하는 우리나라에 꼭 필요한 정책이다. 하지만 미국은 이 정책이 파이자 등 다국적회사에 불리하다고 반대하는 것이다.지난해 12월1일 미국 농무부는 “광우병 관련 쇠고기 수입규제를 현대화하고, 국제수역사무국(OIE)이 정하는 기준을 따르겠다는 입장을 국제사회에 천명한다”고 밝혔다. 미국이 쇠고기 시장을 활짝 열 테니 다른 나라도 이를 따르라는 얘기다. 2008년 5월의 촛불은 “한국 소비자의 신뢰가 회복될 때까지” 30개월 이상 된 미국 소의 고기를 수입하지 않도록 만들었다. 미국의 뜬금없는 이 수입규제 현대화가 제일 먼저 노릴 곳은 상식에 비춰 봐도 바로 한국이다.‘30개월 이상’ 쇠고기가 위험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광우병 위험물질이 무엇인지, 소의 어느 부위에 그런 물질이 있는지 누가 알려줬을까? 결국 2008년 촛불이 타오를 수 있게 한 사람은 누구일까? ‘국민건강을 위한 수의사 연대’ 박상표 국장이 바로 그 사람이다. 온갖 사이비 학자들이 곡학아세할 때마다 정확한 사실로 반박한 것도 그였다. 그는 우리와 동물의 건강과 관련해 세계 전체에서 벌어지는 온갖 일들을 전광석화처럼 정리해서 알려주었다. 그는 실로 따뜻한 가슴을 지닌 부지런한 천재였다.그가 떠났다. 이 추운 겨울에 아무런 예고도 없이 사라졌다. 새로 통상정책을 맡은 산업통상자원부는 미국의 요구를 수용하라고 담당 부처를 압박하고 있다. 우리는 박상표도 없이 미국의 압력을 막아내야 하고 TPP 협상도 감시해야 하며 국민의 건강은 안중에도 없는 경제관료들을 비판해야 한다. 시민과 동물들의 생명은 그가 비운 바로 그 자리만큼 위험해졌다. 하지만 하지만…. 그대 잘 가라. 터무니없이 모자란 우리지만 당신을 기억하는 시민들과 함께라면 또 한번 일어설 수 있다. 그러니 마음 푹 놓고 그대 잘 가라. 더 이상 생명을 걱정할 필요 없는 그곳으로 그대… 잘 가라.* 본 글은 경향신문에 기고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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