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들어 그리 된 건지, 아니면 세월이 하수상해서 그런 건지 잘 모르겠지만 되도록 날을 세우지 않고 살아가기로 한 지 꽤 됐다. 그 결과도 나름대로 괜찮았다. 예를 들어 대선 직전 TV 토론에서 혹시 내가 지지하는 후보에게 누가 될까, 날을 거두고 공손한 태도로 일관했더니 내가 한 토론 중에는 그나마 나았다는 평을 받은 바 있다.하지만 “적이지만 훌륭하다”고 감탄하며 더욱 정교하게 반박 논리를 세워야 하는 상황은 이 땅에 좀처럼 없다. 작금의 NLL 논란은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는다. 국가 기밀을 공개한 것도 문제려니와 문서 어디를 봐도 NLL을 포기한다는 얘긴 나오지 않는다. NLL 논란을 묻어두고 서해에 평화구역을 만들자는 계획에 양 정상이 합의한 것뿐이다. 대선 때 한껏 이용해 먹은 거짓말이 여지없이 탄로났는데도 새누리당과 정부는 후안무치, 요지부동, 적반하장이다.상대에 대한 존중이 이다지도 어려운가, 한탄해야 할 일은 또 있다. 국토교통부가 26일 발표한 ‘철도산업 발전방안’이 그것이다. 2015년 개통 예정인 수서발 KTX를 철도공사 출자회사에서 운영하되 철도공사는 30%의 지분을 확보하고 나머지는 연기금 등 공공자금에서 지원한다는 것이다. 또한 2017년까지 개통할 신규 노선과 적자노선에는 새로운 사업자가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이미 2012년 한바탕 논란이 있었던지라 정부는 “공공자금 지분에 대해서는 민간 매각이 되지 않도록… 정관이나 주주협약 등에서 안전장치를 둘 예정”(여형구 국토부 차관)이라고 다짐했다. 하지만 국토부의 이 말을 100% 존중한다 해도 앞으로 대주주인 연기금이 어떤 이유로든 정관을 개정해서 민간 매각을 하겠다면 무슨 수로 막을 것인가?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의 과반수를 국토부가 장악하겠다는 이야기일까? 결국 이번 방안은 황금알을 낳는 흑자노선(철도공사의 노선 중 KTX만 흑자가 난다)과 지방의 적자노선을 모두 민영화하겠다는 얘기나 다름 없다.지난 30년 시장 만능주의가 판을 치기 전의 경제학 교과서에는 철도는 국가가 운영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돼 있었고 이를 뒤집어 철도 민영화를 행했던 나라들의 결과는 별로 신통치 않다. 정부가 규제하는 기본 요금 외의 이용료가 폭등하고 돈 안되는 지방 노선이 없어졌으며 심지어 철도사고까지 빈번해졌다. 왜 정부는 이제 소음이 돼 버린 철 지난 유행가를 트는 것일까?정부 말대로 철도공사(코레일)가 적자투성이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건 적자노선에 대한 교차보조(시골에도 기차가 하루 한번은 다녀야 할 것 아닌가?), 노선 건설비용의 부담, 낮은 요금 때문이다. 말 그대로 네트워크산업의 공공성 때문에 생긴 적자일 뿐이다. 만일 이 적자가 국토부의 주장대로 공사 운영의 비효율성 때문이라면 그건 전적으로 자기 책임이 아닌가?이런 공공성 비용을 치르지 않는 민간 자회사는 흑자를 볼 수 있고 정부 주장대로 수서발 KTX 기본 요금은 내려갈 수도 있을 것이다(물론 엉터리 예측으로 악명 높은 교통연구원의 발표대로 20%나 내려가진 않을 것이고 초호화 노선을 만드는 등 부가 요금을 올릴 테지만). 그렇다고 서울발 KTX 기본 요금을 경쟁적으로 따라 내린다면 철도공사의 적자는 눈덩이처럼 부풀어 오를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그럼 또다시 민영화 확대의 목소리가 높아질 것이다. 도대체 대기업의 횡재와 국토부 퇴직 공무원들의 일자리 외에 어떤 이익이 있다는 건가?더구나 이 땅에는 한·미 FTA가 발효돼 있다. 수서발 KTX 운영회사의 70% 지분 중 일부를 미국인 투자자가 사들인다면 그 때부터 투자자·국가제소가 가능해진다. 손실은 사회화하고 이익은 사유화하는, 이 엉터리 정책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 NLL과 KTX 논란이 쌍끌이로 이 여름의 수은주를 더 끌어올리고 있다. 나아가 ‘노후 의료보장 보험’이라는 의료 민영화까지, 도대체 ‘줄푸세’가 아닌 얘기를 이 정부에 기대할 수는 없는 걸까?* 이 글은경향 신문에 기고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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