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새사연의 정태인 원장이 2011년 12월부터 2012년 2월까지 진행한 ‘정태인의 경제학 과외 2부 : 사회경제, 공공경제, 생태경제’ 강연 내용을 수정 보완하여 재구성한 것입니다.중소기업의 네트워크, 산업지구학계에서는 에밀리아 로마냐의 성공 요인으로 산업지구(Industrial district)를 설명한다. 산업지구란 1809년 영국의 경제학자 마샬(Marshall)이 최초로 제시한 개념으로, 전문화된 작은 규모의 동일기업들의 다수가 특정한 지리공간 상의 지구에 모여 있는 것이다. 마샬은 분업이 심화되면 대기업에 의한 대량생산방식과 중소기업에 의한 산업지구 방식으로 발전할 것이라고 보았다. 마샬은 산업지구의 특성으로 산업의 국지화를 통한 외부경제의 확보, 지구 내에서 전문화된 기업들 간의 분업 심화, 지구 내부의 건설적인 협력관계, 기업활동을 고취시키는 지역 사회의 분위기 등을 꼽았다. 그리고 이런 특성 덕분에 지구 내의 기업 간에는 물류비용과 거래비용이 감소하고, 전문 분야의 노동력을 공유할 수 있으며, 불필요한 재고를 늘리지 않아도 되고, 기술의 학습과 전파를 용이하게 하여 잠재적인 혁신 역량을 강화해준다고 보았다.그러나 이후 세계 경제는 중소기업에 의한 산업지구보다는 초국적 대기업들의 대량생산체제가 지배하게 된다. 포드주의가 대표적이다. 그러다가 1970년대 유럽과 미국에서 대규모 공장들이 잇따라 문을 닫은데 비해 전문 중소기업들의 산업지구는 경기침체를 극복하고 지속적인 성장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 주목받기 시작했다. 특히 이탈리아계 산업학자들의 연구를 통해 제3이탈리아 지방이 떠올랐다. 산업지구론을 연구한 대표적인 이탈리아 학자들이 산업지구에 관해 내린 정의를 몇 가지 살펴보자. 베카티니(Becatini)는 산업지구를 ‘제품생산과정을 여러 단계로 분리하여 생산하는 중소기업들의 영역적 체계’로, 스포르자이(Sforzi)는 ‘특정산업으로 전문화된 소기업들의 집적체’로 정의했다. 사벨(Sabel)은 산업지구를 ‘소규모 기업들로 구성된 마샬의 산업지구’와 ‘대기업들이 조직의 각 부분에 자율성을 부여하는 형태로 재구성된 지역생산 네트워크’로 구분했다. 1990년 포터(Porter)는 관련 기업 간의 연계를 중심으로 대학, 연구개발, 지방정부 등이 복합된 산업클러스터라는 개념으로 발전시켰다. 또한 1991년 이탈리아 법은 ‘전문적 소기업이 고도로 집적되고 기업과 지역 주민 간에 특별히 친밀한 관계가 형성된 곳’이라고 산업지구를 정의하였다. 이들에 의하면 이탈리아의 산업지구는 전통적인 공예기술에 바탕을 두었다는 점, 유연적 생산기술과 생산방식을 접합하여 소비자들의 기호변화와 기술혁신에 신속히 대응했다는 점을 추가적인 특징으로 갖고 있다. 또한 기업들의 공동체와 주민들의 공동체가 결합되어 있다는 점 역시 중요한 특징이다. 이는 공동체 내의 신뢰가 단순히 부수적인 요인이 아니라 필수적 요인이며 주민들의 동의, 다시 말해 민주주의가 동반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이탈리아와 산업지구는 우리가 흔히 아는 클러스터와는 조금 다르다. 산업지구가 발전한다는 것은 동시에 그 지역 주민의 삶이 높아지는 것을 의미한다. 물질적 성장과 함께 그 지역의 가치와 문화 역시 고양되어야 한다. 에밀리아 로마냐에서는 정치와 경제의 분리, 사회와 경제의 분리라는 경제학적 이분법의 세계가 적용되지 않는다. 시장경제가 사회 안에 단단히 뿌리 박혀, 묻어 들어간 상태이다. 상호성의 원리가 경쟁의 원리를 제약하는 상태이다. 에밀리아 로마냐에는 9개의 현이 있는데 각각에 특화된 산업지구가 존재한다. 카르피는 섬유 및 의류 산업지구, 모데나와 레지오 에밀리아는 세라믹 및 농기계 산업지구, 라베나는 신발 산업지구, 리미니는 목재생산기계 산업지구, 폴리 세세나는 실내장식과 가구 산업지구, 파르마는 식료품 산업지구, 페라라는 바이오메디칼 산업지구, 볼로냐는 포장기계 산업지구로 유명한다. 우리로 치면 도를 이루는 각 시와 군에 각각 서로 다른 산업이 특화되어 있는 것이다. 2001년 조사 결과에 의하면 이탈리아 전체에 156개의 산업지구가 존재한다. 산업지구 내의 중소기업들은 정보, 장비, 사람, 주문을 공유한다. 수많은 중소기업을 지원하기 위해 시장조사, 기술 훈련, 인력 관리, 연구개발 등과 같은 사업서비스 기업과 금융서비스 기업이 등장했다. 마케팅과 유통을 돕는 기업도 생겨났다. 기업연합회도 조직되어 정보, 훈련, 금융, 마케팅 서비스를 제공한다. 아주 작은 전문화된 소기업들이 지속적이고 효율적인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들은 협력과 동시에 치열한 경쟁을 한다. 다만 공동체의 삶의 질을 떨어뜨릴 수 있는 가격경쟁보다는 제품차별화 경쟁을 택한다.예컨대 세라믹 산업으로 유명한 사수올로의 산업지구에서는 에나멜, 페인트, 풀, 포장, 기술상담, 그래픽과 디자인, 보관과 수송, 법률과 보험 등 세라믹 산업과 관련된 것이라면 무엇이든 제공하는 소기업들로 우글거린다. 그 결과 세계 최고의 아름답고 내구성 좋은 고품질의 타일이 탄생하고 있다. 물론 대기업의 경우도 이런 기능을 가진 부서를 모두 갖추고 생산할 수 있겠지만, 기업의 위계질서로 인해 각 부서가 최고의 창의성과 다양성을 발휘하지는 못할 가능서이 크다. 사수올로의 여러 소기업들처럼 경쟁하면서 창조하는 관계가 되도록 대기업의 각 부서를 설계하고 운영하기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풍성한 사회적 자본과 기업가 정신산업지구라는 네트워크가 발생시키는 외부효과를 좀 더 살펴보자. 각 기업의 기술과 노하우는 산업지구 내에서 자유롭게 공유되면서 지역 공동의 지식과 제도로 존재하게 된다. 또한 장기 반복 거래와 평판 효과로 쌓인 신뢰는 각종 거래비용을 획기적으로 낮출 수 있다. 공식적 계약이나 제도보다는 비공식적 관계가 저비용 고신뢰의 공유자산이 된다. 만일 공동체 내의 규범을 어긴다면 지역사회에 발붙이기는 어렵다. 지역의 고유문화와 역사는 구성원들의 정체성으로 자리 잡는다. 규범과 정체성은 다시 상호성을 강화하여 협력을 촉진한다. 이런 것들이 모두 사회적 자본이 된다. 그 중에서도 사업서비스를 제공하는 중소기업이 눈에 띈다. 80년대 이후 에밀리아 로마냐의 고용 증가를 주도한 것은 서비스 산업이다. 이는 또한 중소기업으로 구성된 이 지역이 한 단계 더 발전하기 위한 필수 조건이었다. 협동조합들의 협동조합인 레가코프(Legacoop, 협동조합전국연합)와 중소기업중앙회인 CNA는 회계와 금융 등 일반적인 사업서비스를 제공한다. 정부 차원에서는 협동조합과 중소기업들이 변화하는 경제 환경에 대응할 수 있도록 산업진흥공사인 ERVET(Emilia Romagna Valorizzazione Economica del Territorio)를 세웠다. ERVET에서는 각 지역마다 실질서비스센터(Real service center)를 세워 각 지역별로 전문화된 산업에 필요한 구체적 정보와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흔히 금융, 마케팅, 기술개발과 같은 사업서비스는 중소기업의 지속적 발전 앞에 놓인 죽음의 계곡으로 불린다. 하지만 에밀리아 로마냐에서는 이러한 사업서비스들이 네트워크를 통해 공유자산으로 형성되어 있다.기업을 운영하는데 필요한 사회적 자본이 충만하다는 조건은 기업가 정신의 고양으로 이어진다. 지역의 공유자산을 이용하여 언제든지 기업을 창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동자와 기업가라는 계급적 차이 또한 절대적이지 않다. 사장과 노동자가 공산당(현재 민주당)에 같이 가입해서 활동한다. 이탈리아에서 노동조합이 가장 강한 지역이지만 동시에 노동자들은 기업가 정신에도 익숙하여, 노동조합은 기술변화와 구조조정에 아주 유연하게 대응한다. 사실 노동자라고 해서 시장에 적응하는데 필요한 창조성을 가지면 안 될 이유는 없다. 왜 노동자는 가치 자체를 새롭게 늘리는 것이 아니라 이미 만들어진 가치 중에서 임금의 몫을 늘리는 데에만 온 몸을 받쳐야 하는가? 한국에서라면 반동적일 수 있는 이런 의문이 에밀리아 로마냐에서는 이상한 일이 아니다. 스웨덴이나 네덜란드의 노자간 역사적 대타협과 사회적 합의를 많이 이야기하는데 에밀리아 로마냐에서는 그런 합의가 일상에서 아주 미시적 차원으로 일어나고 있다. 지역 정부의 지원과 법제화공산당이나 지역정부와 같은 공공부문에서의 뒷받침도 에밀리아 로마냐의 성공 요인 중 하나이다. 50년대 국제공산당인 코민테른에서는 ‘반독점 테제’가 결정되어 각 국가와 지역으로 내려왔다. 하지만 에밀리아 로마냐는 독점적인 대기업이 거의 없었다. 때문에 이 지역 공산당과 지역 정부는 반독점을 중소기업 육성으로 해석하고 실천에 나섰다. 당시 기술은 있지만 돈이 없는 중소기업들에게 놀고 있는 땅을 개발해서 시장 가격 이하로 제공했다. 산업지구의 인프라 건설과 금융 지원에 나섰다. 이후 70년대에는 ERVET와 실질서비스센터 등을 설립하여 사업서비스 지원에 나섰다. 80년대에는 공동 브랜드를 개발하고, 수출 촉진 정책을 폈다. 90년대에는 혁신지구 프로젝트에 나섰다. 특히 주정부는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는 데 탁월하여 공동체 내에서 신뢰와 연대를 지키면서, 다양한 구성원들의 요구를 반영하고자 했다.또한 협동조합과 관련된 법제화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미 1947년 제정된 이탈리아 헌법 제 45조에는 협동조합의 역할에 규정되어 있다. 같은 해 제정된 바세비법(Basevi law)에서는 혀동조합의 비분리자산을 인정하고 그에 대해서는 법인세를 면제하도록 하였다. 1983년 비센티니법(Visentini law)은 협동조합이 주식회사나 유한회사를 서립하거나 지분을 인수 보유하는 것을 인정하였다. 1992년에는 모든 조합이 이윤의 3%를 각출해서 협동조합 발전기금을 만들 수 있도록 하였다. 이 기금은 새로운 협동조합을 설립하거나 운영이 어려운 협동조합에 자금을 빌려주는데 쓰였다. 네트워크 안팎에서 오는 위기하지만 앞서 보았듯이 네트워크의 단점 중 하나는 폐쇄성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잠김효과라 불렀다. 잠김효과는 산업기술적 측면에서도 나타나고 사회문화적 측면에서도 나타난다. 기존의 기술체계에 대한 과신이 외부의 커다란 변화를 제 때 알아차리지 못하게 만든다. 또한 알아차리게 되어도 수많은 중소기업들이 상호작용하고 있으므로 새로운 기술체계로 전환하는 것이 어려울 수 있다. 구성원 간의 친밀성이나 유대감은 외부 구성원에 대한 배타적 태도로 나타나거나 새로운 구성원을 유입하는데 장애가 될 수 있다. 산업지구의 성공을 가져왔던 요인들이 역설적으로 위기를 불러오는 것이다. 네트워크 자체가 가진 문제 뿐 아니라 대외 환경의 변화 속에서 과연 에밀리아 모델이 건재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의문도 제기되고 있다. 세계화와 정보통신 혁명 속에서, 중국이 세계의 공장으로 부상하는 속에서 에밀리아의 중소기업들도 몰락하지는 않을까? 보통 치열한 국제 경쟁 속에서 자산특수성과 시장의 불확실성이 높아지면서 중소기업들은 수직적으로 통합되거나, 하청기업으로 전락하거나, 해외 이전하는 등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경제학의 설명이다. 하지만 이런 우려들은 아직까지는 현실화되지 않고 있다. 먼저 에밀리아 로마냐가 가진 매우 강한 인문학의 휴머니즘 전통이 사회문화적 잠김효과를 방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인구 40만 명의 소도시 볼로냐에서 온갖 인종을 다 만날 수 있으며, 최대 노동조합인 CGIL은 외국인 노동자의 권리 증진에도 힘쓰고 있다. 그리고 에밀리아 로마냐의 중소기업들은 서로 연계된 기계제조업을 바탕으로 하고 있어서 외부환경 변화에 쉽게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다. 앞서 사업서비스를 담당하는 중소기업들이 우글대고 있다고 하지만 전체적인 비중으로 보았을 때 서비스업에만 치중되어 있지 않다. 특화된 상품을 만들기 위해서 필요한 모든 기계장비를 해당 지역에서 생산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앞서 보았던 타일을 주로 생산하는 세라믹 산업지구에서는 역시 세계 1,2위를 자랑하는 세라믹 기계산업이 발전되어 있다. 세라믹을 생산하는 전 과정에서 필요한 기계들이 세라믹과 함께 그 지역에서 만들어지고 있다. 농업 산업지구에서 우유를 생산하는 농가가 있다면, 그 주위에는 우유 팩을 생산하는 기업이 있고, 우유 팩 생산에 필요한 기계를 만드는 기업이 함께 존재한다. 세계적인 스포츠카 페라니나 람보르기니, 세계적인 오토바이 두카티도 에밀리아 로마냐에서 생산되는데 역시 마찬가지이다. 최종적으로 부품을 조립하여 자동차와 오토바이를 만드는 중소기업, 그에 필요한 수많은 부품을 만드는 중소기업, 또 그 부품을 생산하는 기계를 만드는 중소기업이 함께 존재한다. 또한 변화하는 경쟁 환경에 적응하고자 외부와의 연계를 강화하고 내부의 기술혁신을 촉진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을 하고 있다. 브랜드, 마케팅, R&D 등 전략부문에 집중하면서 산업지구 전체의 기술 및 조직 변화를 주도하는 선도기업과 지구그룹(district group)이 등장하고 있다. 선도기업이란 말 그대로 새로운 기술과 체계를 가장 먼저 도입하여 변화하는 기업이다. 이런 기업이 있으면 서로 긴밀하게 형성하고 있는 네트워크를 통해 혁신과 변화의 성과가 전파될 수 있다. 지구그룹은 몇 개의 중소기업들이 법적 독립성을 유지한 채 주식의 교차소유를 통해 하나의 집단을 이루는 것이다. 쉽게 말해 여러 기업이 뭉쳐서 선도기업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과거에는 친밀함이나 연대감 등으로 이어진 비공식적 관계가 계약을 통해 공식적인 것으로 변하고 있다. 이들은 소기업이 담당하기 어려운 마케팅, 금융, 신기술개발 등 전략 분야를 담당한다. 고용규모가 클수록, 글로벌 경쟁에 노출되는 기업일수록 그룹화의 경향은 강하다.그렇다고 이들을 한국의 재벌이나 일본의 게이레츠(系列) 같은 대기업의 폐쇄적 네트워크 로 볼 수는 없다. 제품차별화를 강화하기 위한 수평적 네트워크와 함께 품질 향상을 위해 수직적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기존의 중소기업 네트워크가 대기업에 흡수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중소기업 간의 네트워크는 더욱 강화되고 있다. 중소기업 간의 인수 역시 합병을 하기 보다는 기존의 브랜드와 시설은 그대로 유지한 채 소유지분을 통합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즉, 중소기업 간 네트워크와 유연성 있는 체계라는 산업지구의 특징을 지켜가고 있다. * 정리 : 이수연(새사연 연구원)* 정태인의 ‘네박자로 가는 사회적 경제’ (16)편으로 이어집니다.[insert_php] if ( ! function_exists( ‘report’ ) ) require_once(‘/home/saesayon/script/report/report.php’);report( ” );[/insert_ph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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