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산순위 재계 2위인 현대차그룹 정몽구 회장이 지난 8월28일 5천억원에 달하는 현대글로비스 주식 보유분을 해비치재단에 기부하기로 했다고 언론에 보도됐다. 워낙 기부문화가 후진적이어서 그런지 사상 ‘최대 액수’, ‘통 큰 기부’라는 수식어와 함께 사회지도층의 ‘귀감’이 되고 있다는 칭찬의 소리가 줄을 잇고 있다. 현대그룹 출신인 이명박 대통령도 높이 평가한다면서 자신이 내건 ‘공생 발전’에 협조해 달라고 했다.특히 정 회장은 “저소득층 우수 대학생들이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 감당하기 어려운 대출을 받아 힘들어 하는 사연들이 가슴 아프다”며 “이 같은 학생들이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고 학업에 전념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다”는 취지의 말을 전했다고 해 벌써부터 욕먹는 재벌 총수에서 ‘존경 받는 부자’로 바뀌고 있다는 진단도 나오고 있다. 좋은 일이다. 기부 자체를 하지 않는 부자들이 얼마나 많은 세상인가.이처럼 한국 부자들이 어려운 경제 상황에서 ‘통 큰 기부’를 들고 나오기 시작할 무렵에 외국의 부자들은 좀 다른 메뉴를 가지고 나왔다. 바로 ‘나에게 세금을 더 걷어라’는 부자 증세다. 부자 증세 깃발은 국가채무한도 증액을 놓고 한바탕 홍역을 치러 세계경제를 흔들었던 미국에서 먼저 나왔다. 500억달러 자산가이자 투자자인 워렌 버핏이 주인공이다. 버핏은 지난 8월14일 뉴욕 타임스 기고에서 자신의 지난해 납세내역을 밝히면서, 돈으로 돈을 버는 슈퍼 부자들의 과세비율이 노동자들에 비해 턱없이 낮다고 주장하고, 100만달러 이상을 버는 부유층에 대해 즉각 세금을 올리고 1천만달러 이상 소득을 올리는 사람에게는 추가적으로 세금을 인상하자고 제안한 것이다. 세금 올려달라는 탄원은 미국에서 그친 것이 아니다. 미국보다 재정위기 정도가 심각한 유럽 국가들의 부유층들도 여기저기서 자신의 세금을 올려달라는 제안을 하고 있다. 프랑스 화장품 업체 로레알의 최대 주주인 릴리안 베탕쿠르, 브뤼셀 항공의 공동 창업주 에티엔 다비뇽, 이탈리아 자동차기업 페라리의 루카 디 몬테체몰론 회장도 부자 증세 요구대열에 합류했다. 물론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한 삼성·현대차·LG·SK 등 한국의 유력 기업 총수들에게서는 아직 ‘세금 올려 달라’는 제안은 나오지 않고 있다. 지난 1년 동안 우리 사회는 경제성장과 건설 붐이 일었던 것이 아니라 일종의 복지 붐이 일었고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중이다. 한번 터진 국민의 복지 요구는 경제불황 여건에서 어설픈 반대 논리로는 꺾을 수 없었다. 오세훈 서울시장이 시장직과 대통령 출마 옵션을 모두 걸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민투표에서 패배해야 했던 것이 지금의 현실인 것이다. 상황이 이 정도니 그 동안 줄곧 성장을 통한 분배와 선별복지를 철학으로 삼아왔던 정부 여당도 흉내를 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정부 여당이 복지 흉내를 내자면 막대한 이익을 편취하고 있는 재벌의 협조가 필수적이었다. 대한민국에서 4대강 사업도 멈추지 않고 감세기조도 이어가면서 복지를 한뼘이라도 늘리려면 재벌 대기업의 현금 창고가 다만 얼마라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상생과 동반 성장’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재벌 대기업의 자발적 협조를 기대했지만, 이미 정권의 눈치를 굳이 볼 필요가 없을 만큼 덩치가 커진 재벌들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정부 여당은 강도를 높여 ‘초과이익 공유제’나 ‘연기금 주주권 행사’ 발언 등으로 일종의 압박을 가했다. 그래도 재벌집단이 전혀 움직이지 않고 오히려 ‘복지 포퓰리즘’을 비판하자, 난데없이 정부 여당에서 ‘재벌 개혁’의 격한 구호들이 튀어나오게 된다. 이것이 정몽구 회장의 통 큰 기부가 있기 직전까지의 분위기였다.이런 와중에 결정적인 충격이 가해졌는데 바로 8월에 터진 세계적인 재정위기와 더블 딥 우려의 확산이었다. 처음에는 재정균형과 긴축, 복지지출 축소로 움직이는 듯 했지만 곧 ‘경기부양과 증세’로 분위기는 반전됐고 여기에 주요 부유층들로부터 세금을 더 내게 해달라는 요청이 줄을 이었던 것이다. 정몽구 회장을 포함한 한국의 재벌 총수들도 세계적인 증세 대열에 합류하면 자연스러웠을 것이고 한국의 재벌기업과 총수들이 과연 글로벌 기업과 세계적인 경영자로 성숙했다는 존경과 칭찬이 쇄도했을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재벌 총수들이 선택한 것은 ‘증세가 아니라 기부’였다. 최근 정부가 고소득층과 대기업에게 주려던 ‘추가 감세’ 방안을 약간 수정하고 있다고 한다. ‘고소득 층 추가 감세’는 중지하고 대신 ‘기업의 추가 감세’는 계속한다는 것이다. 정몽구 회장의 당초 기부 취지가 무엇이든 결과만 놓고 보면 한 번의 기부행위로 지속성을 갖는 대기업의 감세가 무리 없이 실행되게 됐다. 나쁘지 않은 거래였다고 보면 정몽구 회장에 대한 모독이 될 것인가이 글은 ‘매일노동뉴스’에도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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