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스플랑크연구회의 전통적인 특성인 연구에 있어서의 자주성 및 독립성은 그 동안 설립이래 한번도 방해 받아 본적이 없다. <정선양, 기초연구 진흥정책: 새로운 방향의 모색 및 독일 막스플랑크연구회의 경험, 1996>중에서[1]이명박 정부가 과학계에 가장먼저 보여준 상징적인 사건은 과학기술부 폐지였다. 작고 효율적인 정부라는 국정철학을 수행하기 위해 과감히 과학기술부를 폐지하고 교육과학기술부로 통폐합한 것이다. 과학계의 수없이 많은 비판과 성명에도 불구하고 과학기술부 폐지는 별다른 진통 없이 진행되었다. 과기부 폐지는 오히려 여성부 폐지보다 사회적인 이슈가 되지 못했다. 정부출연연의 통폐합이 결정되었고, 많은 연구원들이 거리로 나와 새 정부의 정책을 몸으로 반대했다.한 해에만 2조 7천억 원의 예산을 다루는 ‘연구재단’이 설립되었고, 2009년에는 ‘기초연구진흥종합계획’이 최종 확정되어 겉으로 보기에는 이명박 정부의 기초과학에 대한 관심이 상당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한 국가의 과학정책이 화려한 수식어만으로 성립되는 것은 아닐 터이다. 과학에 대한 대통령의 인식과 철학, 정치시스템과 사회시스템의 과학에 대한 인식이 제대로 확보되지 못한 상태에서, 투자의 규모를 조금 늘린다고 불쑥 노벨상 수상자가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기초과학에 종사하는 연구자들이 연구재단의 설립에 우려를 표한 것도 우연은 아니다[2].과기부 폐지라는 상징적 사건은 이명박 정부의 과학에 대한 철학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박정희 시대에 설립된 과기부는 제대로 운영되지 않는다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나름의 역할을 해온 것이 사실이고, 국가발전에 보이지 않게 조력해온 과학기술자들에게 과기부의 상징성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과기부를 교육부와 지식경제부의 산하로 분리/편입시킨 정책의 핵심은, 정부가 과학기술을 교육과 경제라는 틀 속에서 사유하고 있다는 것과 다름 아니다. 즉, 과학은 교육이라는 개념으로, 기술은 경제라는 개념으로 충분하다는 좁은 시야를 보여준 것이다. 그 곳에서 ‘연구’라는 과학기술의 핵심과정은 실종된다.참여정부의 유산인 행정수도이전이 백지화 위기에 내몰렸을 때, 사태를 무마하기 위해 내놓은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 특별법도 정부의 과학에 대한 저열한 철학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기술’이라는 용어가 빠진 자리엔 ‘비즈니스’라는 단어가 채워졌다. 특별법에 대한 과학계의 반응이 차가운 것은 우연이 아니다. 비즈니스라는 자본주의적 발상이 과학이라는 용어를 오염시킨다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다. 이덕환 교수가 지적하듯이 과학계와 정부의 통로가 단절된 채, 일방적인 ‘하향식’ 정책을 내놓는다는 것[3], 바로 그것이 과학행정에서 철학이 실종된 현 정부의 상태를 상징하는 것이다.박정희의 시대에 세워진 과학정책의 틀은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가 10년 동안 정치적 민주화를 위해 노력했던 시기에도 거의 변하지 않았다. 국민의 정부가 내세웠던 정책기조는 ‘산업발전 뒷받침과 과학기술역량 강화’였고, 참여정부의 기조는 ‘경제성장과 삶의 질, 과학기술중심사회 구축’이었다. 과기부 폐지라는 상징적 사건을 제외한다면 ‘창조와 실용으로 과학기술강국건설’이라는 현정부의 기조와 별다른 차이를 찾기 어려울 정도다. 실제로 현정부의 과학기술정책은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의 중간 즈음에 해당한다[4]. 오히려 표면적으로 과학기술예산이 확대된 이번 정부에 과학기술계가 지지를 보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실은 과학기술계는 언제나 찬밥신세였다. 국가가 주도하는 정책에 끌려 다니면서도 자신들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확보하기 위한 치열한 노력을 경주하지 못했다. 황우석 사건이 보여주었듯이, 과학기술에 대한 전국민적인 무의식적인 열망은 박정희의 유산 아래에서 일종의 노예근성으로 대체되어 있었다. 그 곳에서 과학계는 자율성과 독립성이라는 구호를 외치기는 했지만, 정권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는 범위 내에서 그리했을 뿐이다.기초연구와 수요시스템의 일방적/권위적 위계관계기초과학 투자에 대한 관심이 새롭게 재고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아마도 원천기술의 중요성이라는 관점 하에 관심이 고조되는 것 같다. ‘새 정부의 과학기술 정책 방향’이라는 글은 과학행정을 담당하는 이들에게 여전히 뿌리깊게 남아 있는 박정희 유산의 잔재를 그대로 보여준다. 국가 간 우수두뇌 유치 경쟁이 심화되고 있다는 상황 판단은 다음과 같은 문제의식으로 귀결된다. “따라서 기초과학투자의 확대를 통해서 우수한 인재를 끌어들여 유망기술 개발역량을 확보하는 것이 각국마다 초미의 관심사”라는 것이다. 글은 대부분 대기업의 연구개발비 현황과 기술개발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기초과학에 대한 투자는 양념처럼 첨가되어 있을 뿐이다. 박정희 정권 이래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한 과학행정의 문제점을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은 현장의 과학자들이다. 과학자들은 국가주도로 이루어지고 있는 ‘과학기술’이라는 제호와, ‘경제발전’, ‘국가혁신시스템’, ‘국가경쟁력’이라는 구호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지난 40년의 경험은 과학행정뿐 아니라 기초과학에 대한 기초과학자들의 견해에도 큰 상처를 남기고 말았다. 철학이 실종된 것은 정부만이 아닌 것이다.기초연구를 진흥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정부, 학계, 사회가 기초연구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느냐는 점이다. 궁극적으로 기초연구가 산업연구와 효율적으로 연계되어야 하겠지만, 기초연구가 지닌 특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인식 속에서는 아무리 많은 투자가 진행된다 하더라도 ‘과학강국’이라는 꿈은 요원한 것이다. 기초연구는 새로운 지식을 창출한다는 것에서 그 가치를 찾을 수 있을 뿐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예기치 못했던 형태로” 실제 경제현실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해결하기도 한다. 지금까지 정부는 기초연구가 경제, 사회,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관심을 기울여 왔다. 하지만 문제는 “이들 수요시스템들이 기초연구시스템에게 과연 무엇을 할 수 있게 하는가”에 달려 있다[5]. 즉, “수많은 자원을 들여 얻어진 기초연구의 결과가 경제적으로 충분히 활용되지 않는다는 점을 기초연구시스템에게만 책임을 지울 것이 아니라, 연구결과를 실제 활용하는 산업계에게도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고, 이와 같은 “구조적인 문제점을 근본적으로 제공한 사회, 정치시스템에게도 물어야 하는”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국가주도로 수행된 과학행정은 일방적으로 기초연구의 산업 및 경제에 대한 무조건적인 봉사를 주장해왔다. 이제 되돌아 볼 때인 것이다. 우리에게 단 한번이라도 연구자의 자율성과 독립성, 나아가 안정성이 보장되는 기초연구시스템이 존재한적이 있었는지, 또한 지나치게 조급하게 산업화를 추진함으로써 오히려 성과를 낼 수 있었던 연구들이 사라져버리지는 않았는지, 정치, 경제, 사회시스템은 기초연구에 대한 책임을 질 정도로 성숙했었는지를 말이다.자율성과 독립성의 가치독일은 아인슈타인과 더불어 막스 플랑크(Max Plank)라는 과학자를 지니고 있다[6]. 막스플랑크연구소(Max Plank Institute)는 오로지 그 위대한 과학자의 이름을 달고 있으며, 가장 성공한 국가주도의 기초과학연구소이기도 하다. 한국은 엄청난 예산이 투자되는 미국의 기초연구시스템을 따라갈 수 없다. 물론 미국에서도 배울 점은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한국의 국가예산보다 많은 돈이 투자되는 거대과학의 중심지를 모방하려다가는 다리가 찢어질 수 있다.그렇다고 해서 한국적 상황을 무시하고 독일의 막스플랑크를 무조건 쫓아가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한 국가가 처한 고유한 위치 및 상황은 모든 정책에서 가장 중요하게 취급되어야 하는 철학이 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독일처럼 위대한 과학의 전통이 존재하지 않는 땅에서 기초연구를 진흥하고 과학문화를 창달하려고 할 때에는 먼저 자신의 역사를 되돌아봐야 하는 것이다.하지만 막스플랑크가 지닌 기초연구시스템으로부터 우리가 배워야 하는 지점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것은 단 한마디로 요약될 수 있다. 바로 자율성, 즉 막스플랑크가 지닌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연구중심’적 가치다.독일은 국가가 주도하는 기초연구중심의 연구소로는 ‘막스플랑크’를, 응용연구중심으로는 ‘프라운호프’를 운영하고 있다. 막스플랑크는 기초 연구에 중심을 두고 대학에서 진행하기 어려운 연구 분야를 지원한다. 연구소는 독일 전역에 흩어져 있고, “10여명의 연구요원으로 구성된 연구집단에서 1,000여 명의 요원을 거느린 초대형 연구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모습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학에서 연구할 수 없는 기초연구를 수행하고 있지만, 막스플랑크를 이끄는 이들 중 대다수는 대학에서 교육보다는 연구에 관심을 가진 교수들인 경우가 많다. 얼핏 보면 현재 정부가 추진중인 정부출연연과 대학의 밀접한 관계와 비슷해 보이지만, 막스플랑크의 내부를 들여다보면 기본적인 철학에서부터 이 땅의 과학행정과는 판이하게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가장 큰 차이점은 한국의 정부출연연이 기초과학과 응용과학의 구분도 없이 혼재되어 있는 것에 반해, 독일의 막스플랑크는 기초연구에만 집중할 수 있는 시스템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첫째, 전국에 흩어진 연구소 집단들은 ‘막스플랑크연구회 본부’라는 조직에 의해 하나로 통합되어 있다. 막스플랑크의 연구회본부가 주로 담당하는 일은 연구정책의 설정, 예산의 배분, 그리고 대 정부업무다. 본부는 “연구자들이 부당하게 정부로부터 개입 받는 것을 막는 우산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연구비의 90%이상을 정부에서 지원받으면서도, 정부로부터 상대적으로 독립적으로 연구를 수행할 수 있는 막스플랑크의 저력은 정치시스템과 사회시스템이 지닌 인식의 수준으로부터 나온다. 즉, 중장기적인 안목을 두고 기초연구를 평가할 수 있는 정치시스템의 안목이 없다면 1년에 1조원 가까운 연구비가 투자되는 기초연구소의 존재자체가 불가능한 것이다. 즉, “정치/사회 시스템도 독일의 국가경쟁력을 유지/제고하고 국가의 명예를 드높이는 데 기초연구가 큰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을 인식하여 기초연구에 후한 점수를” 준다. 이러한 조건이 완성되는 데에는 “장구한 과학기술의 전통으로 인해 과학은 사회에 어떤 선한 일을 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 독일사회의 분위기가 큰 역할을” 해 온 것이다[7].<그림 1> 막스플랑크의 조직도와 한국의 국과학기술위원회 조직도둘째, 정부의 간섭을 막아주는 본부의 역할로 인해 산하연구소의 담당자들은 자율적인 연구를 추진할 수 있게 된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창의적인 연구결과들은 이러한 연구자들의 자율성에 기반하고 있다. 산하 연구기관들의 자율성은 연구회 본부라는 정부와 산하 연구소를 중재해주는 ‘우산’의 존재로 인해 가능하다. 이러한 독립적인 우산의 존재는 국가가 기초연구를 바라보는 성숙한 인식에서 비롯된다. 기본적으로 단기적 성과위주의 기초연구정책이 아니라, 중장기적 관점에서 기초연구의 틀을 짜는 것이다. 나아가, 이러한 모든 자율성의 조건은 ‘과학자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가 없이는 아예 불가능한 것이기도 하다.셋째, 정부출연연이 운영되는 기형적인 방식과 막스플랑크를 대별 짓는 가장 큰 특징은 산하연구소의 소장이 저명한 연구실적을 지닌 ‘과학자’로만 임명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막스플랑크가 연구소를 이끄는 원칙 중 한가지인 ‘저명한 학자의 원칙’이다. 즉, 행정의 전문가가 연구소의 소장이 되는 것이 아니라, 연구의 전문가가 소장이 되는 것이며, 이들을 기반으로 모든 연구가 수행된다. 과학행정가의 존재가 필수불가결한 것은 사실이지만, 연구에 있어 그 현실적 조건과 한계를 아는 사람은 연구자 자신이다. 따라서 현재 한국의 정부출연연이 지닌 가장 큰 문제의 하나는, 막스플랑크가 고수하고 있는 ‘저명한 학자의 원칙’이 실종되었다는 데서 찾을 수도 있다. 회사에서도 기본적으로 부하직원이 하는 일을 전혀 모르는 상사는 존경 받을 수 없다. 연구와는 동떨어진 낙하산 인사가 버젓이 소장으로 임명되곤 하는 정부출연연이 제대로 굴러갈 리 없다. 연구자가 존경하는 것은 연구자로 경험을 쌓고 명망을 지닌 사람이다. 그런 조직에서 연구하는 사람은 상사를 믿고 연구에 매진할 수 있다. 기초연구를 수행하는 연구소가 정치의 희생양이 되어버린다면 연구소는 연구를 위한 장소가 될 수 없다. 그저 개인의 입신양명이나 도모하는 어설픈 정치인들이 모인 작은 정부가 될 뿐이다. 소장을 통한 지원방식, 그리고 소장은 연구의 저명한 전문가로 반드시 선출하는 방식이야말로 우리가 막스플랑크로부터 배워야 하는 것이다. 과학문화란 막스플랑크의 가능성이다막스플랑크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점을 논하는 부분에서 정선양은 “기초연구시스템은 국가전체시스템 및 부속시스템들의 중장기적 문제해결에 충분히 공헌하는 주요 시스템으로 인식되어야 하며, 경제시스템, 사회시스템, 정치시스템은 근본적으로 이러한 기초연구시스템의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여야 할 의무를 갖고 있는 적극적인 시스템으로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핵심은 중장기적 전망과 시스템적 접근이다. 이 지점에서 현장의 목소리가 반드시 정책결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목소리의 전달을 위해서는 막스플랑크 연구회본부와 같은 중간지대의 조직이 필요하다. 즉, 연구의 자유와 지속적인 보장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개별 과학자들이 투쟁하는 대신, 그들의 목소리를 하나로 묶어줄 수 있는 제대로 된 조직의 존재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특히 연구비를 집행하면서도 정부로부터 과학자들을 보호하는 연구본부의 존재가 노예근성으로 세뇌된 한국과학계에 던지는 화두는 매우 크다. 과학계에 필요한 것은 정치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고 신뢰할 수 있는 우산의 존재여부다.정선양이 제시하는 또 다른 시사점은 “국가의 고유한 상황에 대한 분석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미 언급했듯이, 한국은 미국이 아니며 독일은 더더욱 아니다. 미국과 독일의 시스템을 쫓아가기에는 경제적 여력뿐만 아니라, 과학적 전통이라는 문화적 속성이 우리를 가로막는다. 기본적으로 막스플랑크가 운영될 수 있는 사회적인 기반은 독일인들이 과학을 바라보는 인식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우리가 왜 박정희의 유산을 빨리 탈피해야 하는지가 명확해진다. 과학문화운동, 혹은 과학대중화운동은 바로 이런 틀 속에서 사유되고 진행되어야 한다. 지금처럼 영재교육이나 호기심 천국 따위의 저열한 발상으로 진행되는 과학대중화운동과 과학문화운동은 그러한 사업을 진행하는 단체와 학자들의 배만 불려줄 뿐이다. 진정으로 과학문화를 생각하는 사람은, 과학에 대한 대중의 인식 뿐 아니라 정부의 인식이 성숙하기를 바래야 한다. 그런 바탕 위에서야 막스플랑크와 같은 기초연구를 위한 전담기관이 사회의 신뢰 속에, 정부로부터 자율성을 확보하고 안정적으로 지속될 수 있기 때문이다.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과학대중화운동과 과학문화운동은 정부의 주도하에 나이브하게 진행 중이다. 나아가 정부의 입맛에 맞는 방식으로 정책의 기틀이 잡힌다. 예를 들어, <새 정부의 과학기술 정책 방향>이라는 글에는 ‘교육’과학기술부라는 명칭을 자랑이라도 하듯, ‘국민과 함께 하는 과학기술’이라는 정책도 보인다[8]. 이런 나이브한 정책은 지난 40년 동안 초등학생들의 영재교육 및 과학대중화 혹은 과학문화운동이라는 제명 하에 진행되어온 것이다. ‘생활과학교실’, ‘과학탐구교실’이라는 명칭들은 정작 과학적 인식을 제대로 갖추어야 하는 정부와 사회의 지도층은 제쳐두고 어설프게 대중을 계몽하려는 시도일 뿐이다. 오히려 이렇게 낭비되는 돈을 조금 빼서, 매주 과학담당 행정가들과 정부관료들에게 과학자들이 처한 현실과 과학을 알려주는 강의를 개설하는 것이 현실을 치유하는 데 더욱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아무리 아이들에게 아인슈타인을 홍보해봤자, 과학자가 자신의 아이를 과학자로 키우려 하지 않는 사회적 구조 속에서 과학은 표면적인 위치를 점유하게 될 뿐이다. 중요한 것은 ‘스타과학자’라는 유치한 미끼를 사용해 단순히 과학자가 잘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과학자로 살아도 보람이 있겠구나”, “과학자가 의사나 변호사보다 못한 직업은 아니구나”라는 생각을 할 수 있도록 구조를 개선하는 것이다. 요즘 고등학생들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그들은 사회에서 누가 성공한 것으로 판단되고, 어떻게 해야 돈을 벌 수 있는지를 어른들로부터 배우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배움은 단순히 세뇌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사회의 총체적인 모습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변화시켜야 할 것은 바로 그 뿌리깊게 세워진 구조인 것이지, 허울 좋은 미끼와 광고로 아이들을 현혹시키는 것이 아니다.이공계장학금을 받으며 공부했음에도 불구하고, 과수석을 차지한 생명과학과 학생이 의학전문대학원에 진학하는 현실은, 유치한 수준의 정부정책과 과학대중화 운동이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드러내준다. ‘과학’이라는 학문에 대해 이 사회가 보여주는 인식은 모순으로 가득하다. 표면적으로 사회는 과학자에 대해 무한한 자부심을 보여주지만, 과학자가 처해있는 현실에 대해서는 별다른 관심을 갖지 않는다. 과학문화란 대중이 과학을 이해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과학문화란 우리가 막스플랑크 연구소와 같은 기관을 가질 수 있느냐 아니냐의 문제다.김우재 korean93@postech.ac.kr[1] 정선양, 기초연구 진흥정책: 새로운 방향의 모색 및 독일 막스플랑크연구회의 경험, 정책학회보, 5권 1호, 1996[2] 한국연구재단, 핵심은 독립성과 전문성, 과기정론,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2006.6.19.[3] 눈앞의 성과만 급급, 기초연구는 ‘찬밥’… 교육+과학 시너지 실종, 한국일보, 2010/02/23[4] 박항식, 새 정부의 과학기술 정책 방향, 한국행정학회 2008년도 하계학술대회 발표논문집(1), 2008[5] 정선양(1996), 162쪽.[6] 그의 평전이 탁월한 과학사가 에른스트 피셔에 의해 쓰여졌다. ” 에른스트 페터 피셔, <막스 플랑크 평전>, 김영사, 2010.[7] 또한 중앙정부와 연방정부로부터 50:50의 비율로 재정을 충당하는 시스템이 막스플랑크의 연구자율성을 보장해준다.[8] 박항식(2008), 3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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