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의 재무 장관들이 벨기에 브러셀에서 가진 긴급회의에서 7,500억 유로(약 1,100조 원) 규모의 금융안정기금을 구축하기로 결정했다. 이 회의는 현지시간 5월 9일에 시작해서 10일 아침까지 이어졌다. EU의 재무장관들은 증권시장이 개장하기 전에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 밤샘 마라톤회의를 펼쳤다. 엄청난 규모로 회의론 압도7,500억 유로에 이르는 기금은 유로화를 쓰는 각국 정부, EU, IMF가 공동으로 출자하여 조성된다. 유로권 국가들이 4,400억 유로, EU가 600억 유로, IMF가 2,500억 유로를 맡는다. 이 중 500억 유로는 기존에 조성되어 있던 EU 대출기금이다. EU는 그 동안 500억 유로 규모의 기금을 운용하고 있었는데, 그 사용이 비유로권 EU회원국에 국한되어 있었다. 이번 회의에서 EU 재무부장관들은 이 기금을 600억 유로 늘려 총 1,100억 유로로 규모로 확대시킴과 동시에 유로권 국가들도 기금의 사용을 요청할 수 있도록 변경하였다. 이번에 합의된 규모는 그리스에 제공하기로 한 1,100억 유로 규모의 구제기금과는 별도이다. 또한 그 동안 국채시장에 개입하는 것을 꺼려왔던 유럽중앙은행(ECB)도 유로화의 안정을 위해 국채시장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등 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강구하겠다고 입장을 변경했다. 영국 BBC에 따르면 “EU의 법은 유럽중앙은행이 직접 회원국의 채권을 살 수 없도록 금지하고 있기 때문에” 2차 시장에 개입하여 국채를 거래함으로써 법을 우회하면서 유로화를 안정시키는 데 필요한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한다.유로권 국가들이 제공하기로 한 4,400억 유로는 정확히 말하자면 미리 모아놓는 기금은 아니다. 이는 EU에서 운용하는 대출 프로그램을 보조하기 위해 만든 채무보증 프로그램으로서, 이번 재무부 장관 회의에서 앞으로 3년 간 한시적으로 특수목적기구를 special purpose vehicle 설치해 집행을 담당하기로 결정했다. 이러한 기구의 신설은 그리스 위기에 대한 대응이 국가 간 이해와 국내 정치의 문제로 인해 신속하게 이루어지지 못해 위기를 키웠다는 비판을 수용한 결과이다. 동시에 EU의 집행기구인 European Commission이 직접 운영을 맡지 않고 한시적 기구로 성격을 결정한 것은 독일 등 주도적 국가들 내부의 국민적 정서도 고려한 조치이다. 그리스 지원에 열쇠를 쥐고 있던 독일은 최근까지 국내에서의 반대여론으로 인해 어정쩡한 태도를 보여 왔다. 엄청난 규모의 안정화 자금조성과 더불어 EU회원국과 집행기구들의 적극적 유로화 방어 의지가 천명되자 시장은 곧바로 안정화되어 가는 모습을 보였다. 우리나라 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이 전날보다 23원 내리고, 코스피도 전날보다 30포인트(1.8퍼센트)가 상승하며 마감하였다. 영국의 FTSE100지수 3.45퍼센트, 독일 3.3퍼센트, 그리고 프랑스는 무려 5.84퍼센트 장중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누구를 구제하나?대규모 구제금융이 무조건 좋은 것일까? 우리나라도 1997년의 경제위기 때 경험했지만, 구제금융이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 국민들은 희생을 강요당한다. 블룸버그의 컬럼니스트 윌리엄 페섹이 “그리스와 유로존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선 한국을 본받아야 한다고” 강조하며, “1998년 한국의 금모으기 운동과 같은 국민들의 적극적인 협조가 절실하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의 말대로 현재 그리스 민중들이 EU와 IMF가 제공하기로 한 1,100억 유로의 구제기금에 조건으로 붙어있는 긴축재정, 임금삭감, 연금수령액 축소 등의 요구에 보이는 태도는 우리가 1997-8년에 보였던 태도와는 매우 다르다. 어떤 태도가 올바른 것인지 쉽게 답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페섹이 주장하듯 정부의 금모으기 캠페인에 ‘속아 넘어간’ 우리의 태도가 본받아야 할 만한 것 같진 않다. 이 문제와는 달리 구제금융과 관련된 확실한 것이 하나가 있다. 우리가 받았던 IMF 구제금융이나 그리스가 받기로 한 EU와 IMF의 구제금융이 구제하는 것은 일반 국민들이 아니라 대형 금융기관들로 이루어진 채권단이다. 이러한 사실은 자산 시장의 반응으로도 확인된다. 앞에서 언급한 유럽 각국 증시의 높은 상승세는 은행주가 주도한 것이다. 영국 바클레이즈 12퍼센트, 로이즈뱅킹크룹 10퍼센트, 스코들랜드왕립은행 8%, 프랑스 크레디아그리콜 18퍼센트, 소시에테제네랄 17퍼센트, BNP 파리바 14퍼센트, 독일 도이치은행 11퍼센트 각각 상승을 보였다 (머니투데이).그리스가 국채에 대한 채무불이행을 선언할 경우 BNP파리바는 50억 유로, 소시에테제네랄 30억 유로, 크레디아그리콜 8억 5천만 유로의 손실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CNBC뉴스, 2010.05.06). 프랑스가 그리스 금융시장 전체에 대해 노출된 금융손실액은 약 750억 유로로 가장 큰 채권국으로 알려져 있다. 이어서 독일로, 도이치은행과 Hypo Real Estate 등 독일의 은행들은 약 450억 유로의 대출손실 가능성을 안고 있다(로이터 뉴스, 2010.05.07). 영국의 은행들은 프랑스와 독일의 은행들보다는 적게 노출되어 있지만, 그리스에만 300억 유로, 포르투갈과 스페인에 대한 손실 가능액을 합치면 약 1200억 유로가 노출되어 있다고 알려져 있다(가디언, 2010. 05.06). 미국의 은행들이 이들 EU국가들에 빌려준 대출금은 총액은 1조 달러에 달한다고 한다.EU와 IMF의 그리스에 대한 구제금융 결정과 안정화 기금 조성에 대한 합의의 최대 수혜자는 전 세계적인 대형 금융기관들이다. 이들에게는 그리스 국민들에게 구제금융을 대가로 요구되는 희생은 전혀 없고, 혜택만 돌아간다. 앞에서 언급했던 블룸버그 통신의 컬럼니스트 페섹조차도 이 점을 지적한다. 그리스가 부채의 늪에서 빨리 빠져나오려면 부채에 대한 조정이 필요한데, 이에 대한 EU와 IMF의 논의는 한 마디도 없다. 부채에 대한 조정 없이 긴축재정만을 강요하고, 임금을 삭감하여 소비를 억제하면 문제의 근원이 더 심각해 질 수 있다. 조셉 스티글리츠 교수는 국가채무 위기가 발생하면 긴축재정을 조건으로 구제금융을 받기보다는 채무불이행을 선택하는 것이 낫다고 말한다(Stiglitz 등 다수, Stability with Growth, 2006). 일시적으로 혼란이 크게 초래되긴 하겠지만, 국가의 파산은 일시적일 수밖에 없고 채무조정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이유에서다. 또한 긴축재정과 임금축소 소위 ‘허리띠 졸라 매기belt-tightening’ 정책들이 경제의 펀더멘탈을 오히려 약화시켜 중장기적으로 문제를 더 심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자본주의에서 금융문제가 발생하면 채권자들도 책임을 공동으로 져야 하는데, 구제금융이란 메커니즘을 통해 채권자들이 손실을 절대 보지 않는다는 믿음이 생겨 금융기관의 도덕적 해이를 키워왔다. 더 나아가 CDS같은 파생상품을 만들어 기업이나 국가가 위기에 빠지면 오히려 이익을 보는 경우가 생겨, 대형 금융기관들이 위기를 부추기는 경우가 발생하기도 한다. 미국의 증권거래위원회SEC가 최근 골드만 삭스를 사기혐의로 기소한 것도 바로 이 CDS상품과 관련된 것이었다. 블룸버그의 퍼섹은 “희생은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그런데 왜 항상 문제를 일으킨 주체는 희생하지 않고 무고한 사람들이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하는가? 일부 경제학자들은 이번 그리스 구제금융을 2008년 10월에 있었던 AIG구제금융에 비유한다. AIG에 대한 지원을 통해 뱅크오브아메리카, 씨티그룹, 도이치뱅크 등을 구제했다는 것이다. 이번에도 구제받는 것은 국제적인 금융그룹들이다. 박형준 hjpark@saesayon.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