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아래 글에 이미 언급했듯 수출주도경제발전 전략은 일본의 50~60년대 전략과 동일합니다. 그래서 구지 대외채무를 업고 시작이니 하는 말은 별의미가 없습니다. 일본이 그렇게 성장을 했기 때문입니다. 재벌 부분은 다소 다를 수 있지만 국가의 일방적 주도라는 면으로 보면 효율적인 관리 차원에서도 재벌의 육성은 당연합니다.
당시 일본의 성장은 해외에서 도입된 자본과 기술, 그리고 국내의 노동과 경영능력을 이용하여 국제시장에서 거래되는 상품을 국제가격보다 싸게 생산할 수 있는가 여부에 달려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에 의한 자유무역과 개도국으로서의 일본에 대한 예외규정은 일본시장에 대한 개방을 요구함이 없이 일본으로 하여금 국제시장에의 접근을 가능하게 하였다는데 이런 조건들은 박정희가 취했던 것과 동일한 환경입니다.
그래서 어쨌든 우리는 일본에 대한 무역의존도는 지금도 엄청납니다. 근자에 일본의 10년 불황을 극복하게 되는 원동력도 바로 그 한일무역불균형이 상당부분 작용했다고 합니다. 즉 한국의 대중국 수출이 일본을 살린 것이지여.
3번의 노동력에 대한 부분은 님께서 너무 간접적이고 다소 무관한 말씀을 인용하셨군여. 그런 말씀은 덧씌워진 경제를 잘모르는 사람들이 막연히 자원과 노동을 연결한 것입니다.
현대자본주의는 노동의 필요성을 줄이는 것이고여. 이는 박정희 시대와 다른 것이고여. 결국 박정희와 노동의 집약은 그게 아닙니다. 자본과 노동이 둘이 가장 기본적 자원인데, 자본은 외자로 노동은 바로 한마디로 박정희는 농촌의 위장실업자(한계생산성=0인 유휴 노동자)을 공장으로 도시로 끌어드렀다는 것인데여…
그래서 저는 이 부분을 새마을운동과 연결을 합니다. 새마을운동으로 잘 살게되었다는데 왜 사람들이 계속 농촌을 떠났냐는 것이지여. 그렇다고 농촌에서 일손이 넉넉한 것도 아니였고 그렇다고 기계화를 본격적으로 실행한 것도 아니거든여… 그러면 그들은 공장에서 주는 임금이 더 낫아서 였다고 답을 합니다. 하지만 임금의 생존권적 측면에서 보면 그다지 나은 게 전혀 없었다는 게 저의 반론이구여. 사실 이 부분은 박정희만을 탓할 수 없는 사람(농촌에서 도시로 간 노동자) 그 자체의 심리적 속성에서 비롯된 면들도 있는데..
그런데 자본이 노동을 필요로 하는 것은 조선시대의 경제를 언급할 때도 지극히 당연한 귀결이라서 현대 자본주의가 노동을 필요로 한다는 말씀부터 좀 이상하고여. 그리고 실제 현대 자본주의는 노동을 줄이는 게 관건이거든여.
그리고 일본의 학자들은 거의 모두가 박정희를 좋게 봅니다. 그에 대해서는 어느 일본인은 박정희가 죽었을 때, “대일본제국 최후의 군인이 죽었다”고 언급했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면 박정희가 일본의 경제를 모방한 것은 여러 나라들을 비교분석 했기 보다는 그의 과거의 행적들을 봐도 필연입니다. 그리고 일본의 학자와 정치가 등 거의 모두도 또한 박정희는 자신들의 사람이라고 여긴 것으로 압니다.
후쿠야마가 한국은 사회적 자본(예, 신뢰)이 부족해서 나라가 유지되기 힘들거라고 하더니, 결국 일본이 ’10년 불황’으로 나라 망할 위기까지 갔지여. 물론 그 위기를 살린 게 박정희가 깔아놓은 한일간의 무역불균형(자본과 원자재를 대부분 일본에 의존)에 기초한 한국의 대중국 수출이였다는 것이지여. 후쿠야마는 이제 한국을 찬양할 때도 된 것 같은데… 미국인 주제에 꼭 일본만 최고라고 떠들어대니..
끝으로 리스트의 보호무역이 지금이니까 국제사회에서 다소간에 적대적인 정책이 되었지만 그 전까지는 그게 아니였습니다. 일본조차도 그 국제사회에서 아래 언급된 것처럼 엄청 특혜를 받으며 성장했으니까여. 물론 실제는 한국전쟁과 도쿄 올림픽이 견인차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만…
자꾸 덧씌워지는 것들에 저는 좀 짜증이 납니다. 님의 글을 봐도 실제와는 좀 다른 내용이 좀 붕뜬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구체적이지 못하다는 것이지여.
박정희가 ‘자유방임 시장’을 불신한 것인지 어떤지는 모릅니다. 물론 엘리트주의를 표방한 것으로 봐서 그런 추론은 가능합니다. 하지만, ‘자유방임 시장’은 적어도 1929년 세계 대공항이후 현대경제에서는 거의 없거든여..
경제의 성장에는 성장회계 방식으로 보면
자본과 노동, 그리고 기술진보 등인데 박정희는 자본과 노동을 집중했지 기술진보는 실상 소훌했다는 지적은 이미 경제학의 거장들(크루그만)이 언급한 바있고, 그 분들은 그런 경제발전의 유형은 공산주의 계획경제와 유사해서 결국은 그 한계에 부딛쳐 큰 경제위기가 올 것이라고 예언을 했습니다. 물론 그 예언은 ’97년 외환위기’로 나타났지여.. 그 학자분은 일본의 경제 위기(10년 불황)도 예견했는데, 동아시아와 한국의 경제까지 위기를 예견해서 그래서도 더 유명해졌습니다.
아래의 님의 다른 글에서도 님께서는 당시의 경제 여건에 대한 부분도 살펴보지 않으신 흔적을 보이셨습니다. 중화학공업이 박정희 당시 수출의 제일선에 있는 것인양 표현한 것 말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중화학공업이 수출의 효자로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박정희에 관해 이야기를 하는 분들의 말씀 가운데에는 상당부분 나중에 일어난 결과로 그 시대를 미화하는 경우를 자주 봅니다.
우리 내부에서 그렇게 박정희를 숭배하니 외국의 학자들도 박정희 당시가 아닌 현재의 한국을 보고서 과연 그런 가보다고 거들고, 다시 그 외국의 학자들의 반응을 국내에 소개하는 식으로 박정희 이야기는 전개 됩니다. 일종의 순환논리의 오류에 빠지고 말지여.
중화학공업이 수출의 제일선으로 나오기 시작한 것은 박정희 사후 입니다. 그저 삽질만 먼저 하면 그게 다 그 먼저 삽질한 사람의 업적이 되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오히려 그것을 잘관리하는 사람이 더 위대한 거 아닌가여. 또한 그 삽질이 이미 가까운 곳에 그 표본이 있었다면 그 첫 삽질의 의미는 반감 되겠지여..
님의 글을 보니 이미 덧씌워진 글을 바탕으로 그것을 인용하신 듯 하군여.
제가 아래 글에 이미 언급했듯 수출주도경제발전 전략은 일본의 50~60년대 전략과 동일합니다. 그래서 구지 대외채무를 업고 시작이니 하는 말은 별의미가 없습니다. 일본이 그렇게 성장을 했기 때문입니다. 재벌 부분은 다소 다를 수 있지만 국가의 일방적 주도라는 면으로 보면 효율적인 관리 차원에서도 재벌의 육성은 당연합니다.
당시 일본의 성장은 해외에서 도입된 자본과 기술, 그리고 국내의 노동과 경영능력을 이용하여 국제시장에서 거래되는 상품을 국제가격보다 싸게 생산할 수 있는가 여부에 달려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에 의한 자유무역과 개도국으로서의 일본에 대한 예외규정은 일본시장에 대한 개방을 요구함이 없이 일본으로 하여금 국제시장에의 접근을 가능하게 하였다는데 이런 조건들은 박정희가 취했던 것과 동일한 환경입니다.
그래서 어쨌든 우리는 일본에 대한 무역의존도는 지금도 엄청납니다. 근자에 일본의 10년 불황을 극복하게 되는 원동력도 바로 그 한일무역불균형이 상당부분 작용했다고 합니다. 즉 한국의 대중국 수출이 일본을 살린 것이지여.
그러면 1번과 2번에 대한 해명은 끝날 것으로 믿습니다.
3번의 노동력에 대한 부분은 님께서 너무 간접적이고 다소 무관한 말씀을 인용하셨군여. 그런 말씀은 덧씌워진 경제를 잘모르는 사람들이 막연히 자원과 노동을 연결한 것입니다.
현대자본주의는 노동의 필요성을 줄이는 것이고여. 이는 박정희 시대와 다른 것이고여. 결국 박정희와 노동의 집약은 그게 아닙니다. 자본과 노동이 둘이 가장 기본적 자원인데, 자본은 외자로 노동은 바로 한마디로 박정희는 농촌의 위장실업자(한계생산성=0인 유휴 노동자)을 공장으로 도시로 끌어드렀다는 것인데여…
그래서 저는 이 부분을 새마을운동과 연결을 합니다. 새마을운동으로 잘 살게되었다는데 왜 사람들이 계속 농촌을 떠났냐는 것이지여. 그렇다고 농촌에서 일손이 넉넉한 것도 아니였고 그렇다고 기계화를 본격적으로 실행한 것도 아니거든여… 그러면 그들은 공장에서 주는 임금이 더 낫아서 였다고 답을 합니다. 하지만 임금의 생존권적 측면에서 보면 그다지 나은 게 전혀 없었다는 게 저의 반론이구여. 사실 이 부분은 박정희만을 탓할 수 없는 사람(농촌에서 도시로 간 노동자) 그 자체의 심리적 속성에서 비롯된 면들도 있는데..
참고로, 경제학의 관점에서 보면 대표적 생산요소는 노동과 자본입니다.
그런데 자본이 노동을 필요로 하는 것은 조선시대의 경제를 언급할 때도 지극히 당연한 귀결이라서 현대 자본주의가 노동을 필요로 한다는 말씀부터 좀 이상하고여. 그리고 실제 현대 자본주의는 노동을 줄이는 게 관건이거든여.
그리고 일본의 학자들은 거의 모두가 박정희를 좋게 봅니다. 그에 대해서는 어느 일본인은 박정희가 죽었을 때, “대일본제국 최후의 군인이 죽었다”고 언급했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면 박정희가 일본의 경제를 모방한 것은 여러 나라들을 비교분석 했기 보다는 그의 과거의 행적들을 봐도 필연입니다. 그리고 일본의 학자와 정치가 등 거의 모두도 또한 박정희는 자신들의 사람이라고 여긴 것으로 압니다.
후쿠야마가 한국은 사회적 자본(예, 신뢰)이 부족해서 나라가 유지되기 힘들거라고 하더니, 결국 일본이 ’10년 불황’으로 나라 망할 위기까지 갔지여. 물론 그 위기를 살린 게 박정희가 깔아놓은 한일간의 무역불균형(자본과 원자재를 대부분 일본에 의존)에 기초한 한국의 대중국 수출이였다는 것이지여. 후쿠야마는 이제 한국을 찬양할 때도 된 것 같은데… 미국인 주제에 꼭 일본만 최고라고 떠들어대니..
4번의 박정희와 그 일행의 행정 능력과 계획 능력 박정희는 군대 식 행정을 선호하였다 는 말씀은 당시의 군사문화가 일본제국주의의 산물로 형성된거여서 (군사문화의 획일성은 접어두고라도)그 자체만으로도 그다지 바람직한 게 아니여서 언급을 하지 않겠습니다.
끝으로 리스트의 보호무역이 지금이니까 국제사회에서 다소간에 적대적인 정책이 되었지만 그 전까지는 그게 아니였습니다. 일본조차도 그 국제사회에서 아래 언급된 것처럼 엄청 특혜를 받으며 성장했으니까여. 물론 실제는 한국전쟁과 도쿄 올림픽이 견인차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만…
자꾸 덧씌워지는 것들에 저는 좀 짜증이 납니다. 님의 글을 봐도 실제와는 좀 다른 내용이 좀 붕뜬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구체적이지 못하다는 것이지여.
박정희가 ‘자유방임 시장’을 불신한 것인지 어떤지는 모릅니다. 물론 엘리트주의를 표방한 것으로 봐서 그런 추론은 가능합니다. 하지만, ‘자유방임 시장’은 적어도 1929년 세계 대공항이후 현대경제에서는 거의 없거든여..
경제의 성장에는 성장회계 방식으로 보면
자본과 노동, 그리고 기술진보 등인데 박정희는 자본과 노동을 집중했지 기술진보는 실상 소훌했다는 지적은 이미 경제학의 거장들(크루그만)이 언급한 바있고, 그 분들은 그런 경제발전의 유형은 공산주의 계획경제와 유사해서 결국은 그 한계에 부딛쳐 큰 경제위기가 올 것이라고 예언을 했습니다. 물론 그 예언은 ’97년 외환위기’로 나타났지여.. 그 학자분은 일본의 경제 위기(10년 불황)도 예견했는데, 동아시아와 한국의 경제까지 위기를 예견해서 그래서도 더 유명해졌습니다.
말이야 가져다 붙이기 나름입니다. 실상 살인도 좋게 말하면 좋은 내용이 많자나여.
아래의 님의 다른 글에서도 님께서는 당시의 경제 여건에 대한 부분도 살펴보지 않으신 흔적을 보이셨습니다. 중화학공업이 박정희 당시 수출의 제일선에 있는 것인양 표현한 것 말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중화학공업이 수출의 효자로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박정희에 관해 이야기를 하는 분들의 말씀 가운데에는 상당부분 나중에 일어난 결과로 그 시대를 미화하는 경우를 자주 봅니다.
우리 내부에서 그렇게 박정희를 숭배하니 외국의 학자들도 박정희 당시가 아닌 현재의 한국을 보고서 과연 그런 가보다고 거들고, 다시 그 외국의 학자들의 반응을 국내에 소개하는 식으로 박정희 이야기는 전개 됩니다. 일종의 순환논리의 오류에 빠지고 말지여.
중화학공업이 수출의 제일선으로 나오기 시작한 것은 박정희 사후 입니다. 그저 삽질만 먼저 하면 그게 다 그 먼저 삽질한 사람의 업적이 되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오히려 그것을 잘관리하는 사람이 더 위대한 거 아닌가여. 또한 그 삽질이 이미 가까운 곳에 그 표본이 있었다면 그 첫 삽질의 의미는 반감 되겠지여..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경제학 책을 많이 읽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