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과 이건희.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권력자다. 누가 더 권력이 센가를 묻기란 이미 철없는 짓이다. 아직도 이명박의 권력이 세다고 혹시 생각한다면, 2011년 현재 누가 권력을 한껏 누리고 있는가를 톺아볼 일이다. 보라. 삼성전자 회장 이건희의 권세는 하늘 높은 줄 모른다. 그는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의를 취재하는 기자들 앞에서 이명박 정부를 겨냥해 서슴없이 ‘낙제’라는 말을 들먹였다. 물론, 이건희는 경제 정책을 낙제라고 명토박지는 않았다. 짐짓 노회하게 “흡족하다기 보다는 낙제는 아니라고 본다”고 말했다. 어떤가. ‘낙제’라고 한 말보다 더 비위 상할 성싶다. 실제로 그의 말이 전해지자 청와대는 불편한 심경을 드러냈다. 하지만 ‘시원한 소리’는 없었다. ‘총대’를 멘 것은 청와대가 아니었다. 나흘 뒤 기획재정부 장관 윤증현이 국회 질의응답 과정에서 이건희의 발언을 비판하고 나섰다.이건희 발언에 장관 “수정하겠다” 꼬리말 신문과 방송은 윤증현의 비판을 간단히 보도하거나 모르쇠 했다. 비교적 길게 보도한 한 신문은 윤 장관이 “강하게 비판했다”고 기사화 했다. 하지만 정작 보도 내용을 짚어보면 그렇지도 않다. 윤 장관은 “당혹스럽고 실망스럽기까지 하다”고 말했을 뿐이다. “전대미문의 경제위기 극복에 정부 역할이 상당했다는 건 국내뿐 아니라 외국 석학과 언론, 국제기구도 인정하는 사실”이라는 장관의 말에선 어딘가 ‘아랫사람’의 억울함마저 느껴진다. 그렇게 판단하는 근거는 더 있다. 이건희에게 정부 정책 중 어떤 면이 겨우 낙제점을 면할 정도인지 묻고 싶다는 발언까진 강경하다고 받아들일 수도 있다. 하지만 곧이어 “지적하면 수정 하겠다”고 말했다. 얼핏 자신감 넘치는 발언으로 들릴 수도 있지만 장관이 굳이 ‘지적’이나 ‘수정’이라는 말까지 쓸 필요가 있었을까? 전형적인 아랫사람의 화법이다. 대한민국이 ‘이건희의 세상’임을 스스로 감지하고 있어서일까. 정부의 경제정책에 낙제점만 거론한 게 아니다. 동반성장위원회 위원장 정운찬이 제기한 초과이익공유제를 살천스레 비판했다. “기업가 집안에서 자라나 경제학 공부를 해 왔으나 듣도 보도 못한 말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원색적 발언에 이어 “사회주의·공산주의·자본주의 어떤 국가에서 쓰는 말이지 모르겠다”며 빨간 색깔까치 칠하고 나섰다. 이건희가 삼성의 황제만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황제가 아닌가 싶을 정도다. 그의 발언이 전해지자 ‘재계’에선 “시원하다”거나 “할 말을 제대로 했다”고 반겼다.물론, 서울대총장과 국무총리를 역임한 경제학 교수 정운찬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그는 이익공유제를 제안하게 된 가장 직접적 계기가 바로 삼성이라고 말했다. 색깔론이나 이념 잣대로 매도하는 언행에 발끈한 심기가 묻어난다. 하지만 그 또한 “자신이 공부한 책에서 본 적이 없다고 해서 그 의미를 평가절하 하시는 것”은 온당한 태도가 아니라며 사뭇 ‘예의범절’을 지켰다. 기실 정운찬의 제안은 스스로 설명했듯이 경영자, 노동자, 협력업체가 공동의 노력으로 달성한 초과이익이라면 협력업체에도 그 성과의 일부가 돌아가도록 하자는 성과공유제의 일종이다. <조선일보>조차 사설에서 지적했듯이 정운찬의 제안은 기업의 이익 잉여금이나 주주들 몫을 강제로 빼앗겠다거나 협력업체와 노동자들에게 분배하겠다는 내용이 아니다. 물론, 이 신문이 정운찬을 두남둔 것은 전혀 아니다. 양비론을 폈을 뿐이다. <중앙일보>는 더 나아갔다. “초과이익공유제,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이건희의 발언을 아예 사설 제목으로 삼아 정운찬의 제안이 자본주의와 헌법 정신을 뒤흔드는 중대 사안이란다. 국민들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고 부르댔다. <동아일보> 사설 또한 시장경제 원칙에 어긋날뿐더러 기업의 자율적 상생 실천에도 맞지 않는다며 정부가 공식적으로 철회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했다. 오해 없기 바란다. 나는 지금 <중앙일보> 고위 언론인들에게 이건희가 어떤 존재인가를 모르고 있거나 <동아일보>가 이건희 가문과 사돈을 맺은 사실을 몰라서 이 글을 쓰는 게 아니다. 다만, 제 세상이라도 만난 듯 거침없이 행세하고 있는 한 기업인 앞에 언론의 본령은 어디에 있는가를 함께 성찰하고 싶을 뿐이다.시각차 아닌 사실의 문제… 언론 할 일은만일, 정운찬이 제시한 초과이익공유제가 참으로 공산주의적 발상이라면, 헌법정신을 뒤흔드는 사안이라면 저들이 벌이는 색깔론이나 양비론에 굳이 비평을 하고 나설 이유는 없을 터다. 하지만 시각의 차이가 아니라 사실의 문제다. 이정우 교수(경북대·경제학)도 지적했듯이 초과이익공유제는 엄연히 경제학 책에 나오는 개념이다. 그 제도의 효시 또한 미국이다. 제퍼슨 정부 시절에 이미 도입했다. 과거의 제도만이 아니다. 2011년 현재 삼성전자보다 더 세계적 주목을 받고 있는 애플사는 협력업체와 3:7로 이익을 나누고 있다. 사실관계가 그렇다면 언론이 할 일은 무엇인가? 마땅히 한 기업인의 오만한 언행, 사실과 다른 색깔 선동을 비판해야 옳다. 정치권력보다 더 강력한 힘을 행사하고 있는 이건희에게 이명박 정부의 고환율정책으로 삼성을 비롯한 수출대기업들이 얼마나 큰 이익을 챙겼는지를, 반면에 서민들은 얼마나 큰 고통을 겪고 있는가를 있는 그대로 일러주어야 한다. 이명박 대통령의 ‘1인 사면’으로 이건희가 얼마나 큰 혜택을 누렸는가도 새삼 깨우쳐주어야 옳다. 대통령 이명박의 ‘억울함’을 위해서가 아니다. 새삼 강조하지만 모든 권력의 감시가 저널리즘의 본령이기 때문이다. 그래서다. 보수와 진보의 문제가 결코 아니다. 2011년을 저널리스트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라면 어느 자리에 있든 스스로에게 한번 쯤 진지하게 묻고 정직하게 답할 때다. 나는 지금 서 있는 자리에서 온전히 저들을 감시하고 있는가를, 이명박과 이건희를. 이 글은 ‘미디어 오늘’에도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