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비정규직 노동자의 총파업이 시작되었을 무렵 이야기이다. 급식 중단으로 불편을 겪을 수도 있는 아이들 사이에서 ‘불편해도 괜잖다’는 파업 응원 인증 샷이 쇄도했다. 아이들은 어른의 스승이라는 구절이 떠오른다. 모두의 예상을 깨고 준우승의 쾌거를 일구어낸 U-20 월드컵 대표들이 오버랩 된다. 세계인의 가슴을 뜨겁게 달구며 K-pop을 변방이 아닌 세계 음악의 중심으로 끌어 올린 BTS가 불시에 시야를 가득 채운다. 과연 예외적이고 특별한 신동들이 만들어낸 특별한 장면들일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한국의 젊은 세대는 기성세대가 미처 감지하지 못한 엄청난 잠재력을 품고 있다. 그 자체로서 소중하고 아름답다. 다른 판단 기준을 들이대는 것이 어설픈 일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들의 존재 가치를 따져보지 않을 수 없다. 딱히 출구를 찾지 못하고 배회하고 있는 한국 경제 상황에 비추어 볼 때 더욱 그러하다.

지난 세월 한국 경제가 이룩한 놀라운 성취에 대해서는 굳이 재론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많은 분야에서 한국을 발끝의 때로도 여기지 않았던 일본을 넘어선 것은 그 자체로서 기적이 아닐 수 없었다. 디지털 문명으로 표현되는 3차 산업혁명의 파고가 밀려 왔을 때 일본이 과거의 성공에 집착하며 머뭇거리고 있는 사이 한국은 과감하게 한복판을 돌파한 것이 크게 주효했다고 볼 수 있다.

다시금 세월이 흘러 4차 산업혁명의 파고가 밀려들고 있다. 4차 산업혁명은 기술적으로 3차 산업혁명의 연장이다. 3차 산업혁명 2기 정도로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3차 산업혁명을 성공적으로 돌파한 한국이 계속해서 기세를 올려야 정상이다. 그런데 현실은 그와 거리가 멀어 보인다. 어딘가 모르게 기가 빠져 있다. 이유가 무엇일까? 우리는 여기서 지나온 과정을 냉정히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한참을 거슬러 올라가 보자. 산업화의 기적을 울리던 2차 산업혁명 시절 한국의 산업 현장을 지배한 것은 상명하복의 수직적 위계질서를 바탕으로 일사불란하게 밀어붙이는 군대식 문화였다. 그러한 문화는 강력한 힘을 발휘했고 초고속 압축 성장을 가능하게 했다. 한국은 군대식 문화를 그대로 유지한 채 3차 산업혁명을 돌파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소프트웨어보다는 하드웨어 그 외연으로서 인프라에 집중한 덕분이었다. 반도체조자도 시스템 반도체가 아닌 메모리 반도체 위주로 접근했다. 모두 2차 산업혁명 시기의 생산 시스템과 크게 다르지 않은 분야들이었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고도의 창조력이 요구되는 4차 산업혁명 시기에 이르면 양상이 완전히 달라진다. 군대식 문화는 쥐약이 된다. 수직적 위계질서에 입각한 시스템과 조직 문화는 산업 발전의 질곡으로 작용한다. 이에 대한 문제의식이 상당히 확산되고 있지만 현실은 여전히 과거 문화에 익숙한 세대가 지배하고 있다.

중국 위협은 상황을 더욱 심각한 지점으로 몰고 가고 있다. 중국은 주력 산업 대부분에서 우월적 위치를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저기서 비상을 걸고 있지만 냉정히 말해 단순 기술 경쟁만으로 중국을 이길 가능성은 그다지 높지 않다. 중국은 시간의 한계를 공간의 크기로 극복하는 나라이다. 압축 성장 측면에서 우리보다 월등히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우리가 살 수 있는 길은 한국인에게 풍부한 문화적 감수성을 최대한 살리는 것뿐이다. 예외 없이 기술에 감성의 옷을 입혀야 한다. K-pop, K-패션, K-뷰티로 이어지는 K 시리즈를 완성시켜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4차 산업혁명 시대의 구세주가 떠오른다. 젊은 세대다. 4차 산업혁명이 꽃 피려면 사람을 비용이 아닌 자산으로 간주해야 한다. 수직적 위계질서를 허물고 수평적 조직문화를 정착시켜야 한다. 기능을 넘어 상상력과 감성의 발산을 극대화해야 한다. 전혀 새로운 환경을 조성해야 하는 것이다. 젊은 세대는 신기하리만치 그러한 환경에 부합되는 특성과 체질, 능력을 지니고 있다. 커다란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이 축복을 어떻게 받아 안을 것인가. 한국 사회에 던져진 커다란 질문이다.

(이 글은 <내일신문>에 함께 게재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