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5.18묘역 참배객들의 분주한 발길이 5.18광주민주화운동 기념일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리고 있다. 1980년 5월 그 순간으로부터 39년의 세월이 흘렀다. 내년이면 40주년을 맞이하게 된다. 40년!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이다. 5.18에 의해 인생행로가 결정되었던 세대들은 아직도 5.18을 엊그제 사건처럼 기억한다. 하지만 아래 세대로 내려가면 확연히 달라질 수밖에 없다. 지금 대학 1학년에게 5.18은 필자가 1981년 대학에 입학했을 무렵 떠올린 일제 식민지 시대 말기와 진배없을 것이다.

참으로 놀라운 사실은 4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음에도 5.18은 여전히 찬이슬을 머금은 새벽별처럼 사람들 가슴 속에서 영롱하게 빛나고 있다는 점이다. 도대체 무엇이 5.18을 그토록 빛나는 역사로 만들었을까?

민주화 정착이 오래 지속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한국의 민주화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환경에서 이루어졌음을 간과한다. 군사독재 시대에는 분단 체제를 배경으로 삼중사중의 억압 장치가 견고하게 구축되어 있었다. 그렇게까지 완벽한 억압 체제를 구축한 나라는 전 세계 어디를 봐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목숨을 걸지 않으면 그에 맞서 투쟁하기가 감히 엄두조차 내기 힘든 상황이었다.

5.18광주민주화운동은 억압 체제 한 복판에서 폭발했다. 5.18을 역사적 사건으로 만든 대표적 장면은 시민군의 출현과 최후 진압 작전에 맞선 도청 사수투쟁이었다. 이 두 장면은 사람들 뇌리 속에서 군사독재에 타협하고 굴종할 핑계 꺼리를 깡그리 지워버렸다. 군사독재에 목숨 걸고 투쟁하지 않으면 양심의 고통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로부터 세계사에 찬연히 빛나는 민주화대정정이 이어졌고 마침내 승리의 봉우리에 올라설 수 있었다. 우리 모두가 기억하는 역사이다.

하지만 이게 전부가 아니었다. 혹자는 5.18의 무게에 압도된 나머지 광주를 5.18에 기대어 자신의 존재 가치를 유지하는 도시로 오해한다. 오해는 어디까지나 오해일 뿐이다. 광주는 결코 과거에 안주하지 않았다.

역사의 현장 한 복판을 헤쳐 나오면서 광주 시민들은 고도로 훈련되고 학습되었다. 그들은 정세를 꿰뚫어 볼 날카로운 시각과 정치 지형을 살필 동물적 감각을 터득했다. 흔히 하는 말로 모두가 정치 9단이 되었다. 광주 시민들은 그러한 식견을 바탕으로 혼연일체가 되어 정세를 선도해 왔다. 광주 시민들은 자기 지역에 갇히지 않고 전국적 시야를 바탕으로 전략적 선택을 했다. 덕분에 노무현, 문재인 등 부산 지역 출신이 광주의 선택을 받아 대권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어느새 범진보 진영 대권 주자들은 광주 시민의 선택을 가장 우선적으로 통과해야할 관문처럼 인식해 왔다. 광주 시민의 선택을 받기 위해 온갖 구애를 마다하지 않았다.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시민의 선택이 정치 풍향을 좌우하는 것은 전 세계 어디를 봐도 찾아보기 힘든 현상이다.

광주의 진화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어쩌면 광주를 위대하게 만드는 또 다른 장면이 펼쳐질지 모른다. 광주가 새로운 단계로 진화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단초는 다름 아닌 ‘광주형 일자리’이다.

광주형 일자리는 일자리 창출을 위한 아이디어 이상의 의미가 있다. 광주형 일자리는 다양한 이해당사자들이 참여한 ‘사회적 합의’를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지방 정부와 기업의 협력을 바탕으로 노사, 원하청 간의 상생을 지향하는 모델이다. 진영 갈등이 미약한 광주 지역 특성이 반영된 결과일 수도 있다.

혼미를 거듭하고 있는 한국 경제의 유일한 출구는 사회적 합의를 바탕으로 경제 틀과 운영 기조를 획기적으로 전환하는 것뿐이다. (필자는 사람 중심 경제로의 사회적 합의를 설파하고 있는 중이다.) 바로 그 사회적 합의에 필요한 기본 원칙들을 담고 있는 게 광주형 일자리이다. 이는 곧 광주가 일련의 예행연습을 거처 사회적 합의를 선도할 수 있음을 예고하는 징표에 다름 아닐 것이다.

(이 글은 <내일신문>에 함께 게재된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