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사람과 모임을 하거나 활동을 하다 보면 갈등을 빚는 경우가 많다. 잘 추슬러서 더 돈독한 관계가 형성되기도 하지만 모임이나 조직에서 사람들이 떠나는 경우도 많다. 그럴 때면 아쉽고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긴 시간 노력을 들여 어렵게 쌓아온 관계가 수포가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의견충돌이 있을 때마다 사람이 떠난다면 유지될 모임이 없을 것이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는 거지.”라며 몇몇 사람이 떠날 때면 민주적 절차에 대한 오해가 꽤 깊은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든다. 조직의 ‘민주화’는 모든 사람의 의견을 경청하여 평등하고 공정하게 다루자는 것인데, 내 의견을 들어주어야 ‘민주적’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민주주의는 아마도 ‘모든 일이 내 뜻대로 되지만은 않는다.’는 인정(認定; approval)에서 시작될 것이다. 홉스는 이에 대해 “나는 스스로 나를 다스리는 권리를 이 사람 혹은 이 합의체(Leviathan; 국가)에 완전히 양도할 것을 승인한다.”라고 표현하였다. 이는 두 가지 측면에서 의미가 있는데 첫째, 국가가 사회계약, 즉 민주주의에 의해서 창출될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하며, 둘째, 국가는 압도적인 힘(공권력)을 지닌 괴물과도 같다는 통찰이다. 민주국가는 괴물 같은 힘으로 국민 모두의 의견을 공평하게 다루어 보호할 의무가 있다.

하지만 괴물이 충분히 구실을 한 적이 있기는 할까?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상인과 공장주 두 계급은 사회의 이익보다는 자기 계급의 이익을 더욱 고려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계급이 제안하는 어떤 새로운 상업적 법률⋅규제들에 대해서는 항상 큰 경계심을 가지고 주목해야 한다.”라고 지적하면서 “정부가 재산이 많은 계급의 요구를 쉽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으므로 정책을 주의 깊게 검토하여야 한다.”고 당부하고 있다. 그 유명한 ‘보이지 않는 손’은 이처럼 자본에 유리한 특혜 따위를 걷어내라는 의미이다.

한편 ‘국부론’에는 “노동자들의 단합은 아무런 이익도 얻지 못한다. 부분적으로는 치안판사의 개입 때문에, 부분적으로는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당장의 생존을 위해 굴복할 수밖에 없는 필연성 등의 이유 때문에 투쟁 주동자의 처벌과 파멸 외에는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끝나고 마는 것이 보통이다.”라며 자본에게는 한없이 부드럽지만 힘없는 민중에게는 무자비한 공권력에 대해서 비판하는 내용도 담겨있다.

이런 계약위반에 민중도 가만히 있지만은 않아서 끊임없는 투쟁을 통해 흑인노예 해방, 여성의 권리향상, 노동권 신장 등을 이뤄내었으며, 복지국가의 개념이 보편화되고 사회보장제도가 확립되는 성과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는 신자유주의가 전 세계를 덮치면서 다시 자본에 유리한 방향으로 전환되었으며, 우리나라의 경우 1997년 외환위기 이후 현재까지 이런 분위기에 변함이 없다. 노동유연화, 규제완화, 부자감세, 공기업민영화, 기업형임대와 같은 정책이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는 국가가 무능하니 사회문제 해결을 시장에 맡기라는 주장인데, 결국 국가의 공권력을 자본이 차지하겠다는 얘기와 같다. 공권력과 우호적으로 지내려 하던 과거의 태도에서 한술 더 뜨는 셈이다. 무한경쟁이 상식처럼 취급받는 세상에서 경제를 볼모로 “내 뜻을 안 따르면 모두 망하게 하겠다.”라는 자본의 공세를 보고 있노라면 ‘조물주 아래 유일무이한 무적의 괴물’ 국가는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져 그 존재마저 희미해질 것만 같다.

하지만 빈부의 격차,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차별, 갈수록 험해지는 사회, 나날이 희망을 잃어가는 청년들, 환경파괴나 주거환경 악화로 인한 삶의 질 저하 등의 사회문제를 야기한 주범이 시장만능주의를 등에 업은 자본이라는 점은 이미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이러한 사회문제 해결과 계약을 깨겠다는 자본의 위협으로부터 현재의 국가가 무능하다면 민중은 새로운 계약을 주도하여 맺어야 한다. 그 시작으로 움트고 있는 것이 풀뿌리 민주주의의 부활이다.

우리나라는 광복 이후 국가체계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읍면동의 장과 의회의원까지 주민들이 직접 선출하는 서구와 비슷한 수준의 지방자치체제를 만들었다. 하지만 자유당 정권에서도 유지되던 지방자치는 박정희의 쿠데타로 수십 년간 중지된다. 이후 민주화를 거치면서 광역지방자치체제는 부활하였으나 어찌 된 일인지 주민이 분권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읍면동 단위까지 자치가 복원되지 못하고 있다.

현재의 기초지방자치단체는 수만 또는 수십만 명 규모의 시군구이다. 이 정도면 작은 규모의 국가와 같다. 대의제가 불가피하고, 그래서 주인-대리인(Principal-agent problem) 문제가 불거지는 것을 막을 방법이 없고, 주민들은 지방자치에 대한 관심을 유지하기 어렵게 된다. 지방자치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으면 여러 사회문제를 공적으로 해결하기 어렵다. 현장에서 사회문제를 직접 대면하는 것은 중앙정부가 아니라 지방자치단체이기 때문이다.

현재 풀뿌리 단위에서 지방자치를 회복하고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은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진행 중이다. 우선 직접 지방자치단체에 협치를 요구하는 것이다. 주민참여예산제 도입, 협치추진단 설치 등의 형태로 진행 중이지만 기존 공공조직의 반발도 적지 않다. 최근 국회에서 예산을 처리하는 과정에서는 주민자치회와 관련된 혁신읍면동 관련 예산이 전액 삭감되기도 하였다.

또 다른 방향은 마을공동체를 활성화하기 위한 운동이다. 사실 협치를 실현하기 위해서 마련되어야 할 기반이 마을공동체일 수도 있다. 경쟁이 아니라 참여와 연대와 협력을 철학으로 하는 마을공동체의 활성화는 사회적경제의 활성화, 도시재생의 추진을 위해서도 필수적 조건이다. 하지만 무슨 영문인지 공공정책에서는 사회적경제나 도시재생의 한 요소 정도로 간과되는 경향이 있는데 행정이나 지역의 기득권이 주도권을 놓치지 않으려는 의도가 의심되기도 한다. 하지만 변화의 흐름을 되돌릴 수는 없을 것이다. 국가에게 공권력을 준 주민 당사자의 결심이기 때문이다.

국회의 정부예산심의 과정에서 여전히 ‘지역예산’ 챙기기가 횡행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예산이란 것이 대부분 토건사업에 얽혀 있는 것이니 결국 지역기득권의 이익챙기기이다. 그렇게 사업이 벌어지면 누군가는 집을 내놔야 하고, 누군가는 농토를 빼앗길 것이다. 대가로 돈을 몇 푼 쥐어주니 처음에야 좋을지 모르지만 사회문제의 근본을 해결하기보다는 악화시킬 우려가 크다.

그런데 국회에 계시던 의원 여러 명이 내년 지방선거에서 지방자치단체장을 목표로 출사표를 내고 있다. 지역예산 챙겨주는 걸 지방자치 강화라고 착각하시는 분들이라면 그냥 국회에 머무는 것이 지방자치의 발전을 위해서 더 나을지 모른다. 그동안 주민분권, 주민자치에 별 관심도 없던 분들이 정치적 인기나 당내 조직력을 앞세워 지방으로 오시면 협치나 마을공동체 활성화는 요원해지고 주민들만 피곤해질 뿐이다. 그래도 지방자치단체로 오고자 한다면 풀뿌리 민주주의를 위한 제도 개선에 힘을 쏟은 후 오셔도 늦지 않다고 여겨진다. 지방자치의 확대를 위해 해결해야 할 과제가 국회에도 쌓여 있다. 부디 이 국가의 미래를 진지하게 고민해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