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기억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지만 1999년에 창립된 ‘제3의 힘’이란 정치 단체가 있었다. 이정우 변호사를 중심으로 김영춘, 송영길, 정태근, 우상호, 이인영, 고진화, 천호선, 김서용 등 여야를 망라한 이른바 ‘386세대’ 학생운동 지도자들이 세대교체 기치를 내걸고 만든 단체였다. 제3의 힘은 현실 정치 참여를 통한 썩어 빠진 낡은 정치 타파를 자신들의 사명으로 삼았다.

하지만 2000년 5.18전야제 후 일부 선배 정치인들이 벌린 룸살롱 술자리에 참여했다 문제를 일으키면서 이 단체는 허망하게 날라 갔다. 당시 잘 나가는 방송 작가로서 인터넷 홍보를 담당했던 이진순씨는 마음의 상처를 견기다 못해 2002년 모든 것을 접고 미국으로 떠났다. 미국에서 공부도 하고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생활하다 2013년 다시 돌아 왔다. 이진순씨는 어느 인터뷰 기사에서 다시 만난 옛 사람들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다.

“옛날 똑똑하고 명민했던 선후배나 친구들을 다시 만나보면 다들 너무 삶에 지치고 부대끼고 닳아서 멍해져 있어요. 저 혼자만 10년간 어디 피난을 다녀왔나 싶을 정도예요.”

제3의 힘 구성원들은 이후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았을까? 이진순씨가 10여년 만에 만난 옛 사람들은 왜 멍해진 모습이었을까?

제3의 힘 주체들은 386세대로 당시 30대이자 1980년대에 대학을 다녔고 1960년대에 출생한 사람들을 아우르는 것이었다. 386세대는 이후 나이를 먹으면서 486세대 혹은 586세대로 바뀌었다가 지금은 통칭 86세대로 부르고 있다.

86세대는 우리 역사에서 매우 독특한 존재이다. 86세대는 산업화와 민주화의 동시 성공에서 주도적 역할을 수행했으며, 그 성과를 가장 크게 누려온 세대이다. 처음으로 의미심장한 승리를 경험한 세대이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86세대는 그 어떤 세대보다도 강한 자부심을 품고 살아 왔다. 기회가 있으면 왕년에 한 가닥 했음을 내비치는 게 이들 세대의 공통적인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86세대 다수를 지배했던 것은 이른바 ‘고지론’이었다. 일단은 자신이 살아남아야 했고, 힘을 가져야 했다. 일정한 직급에 올라서면 세상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바꾸어 보겠다고 했다. 그래서 물불 안 가리고 좀 더 높은 곳으로 올라서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기존 문법만을 따라하면서 기존 상상력을 모두 잃어버리고 말았다. 정작 원했던 자리에 올라섰을 때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일련의 과정을 거쳐 86세대는 신자유주의에 오염된 기존 질서를 변혁하기보다는 그 속에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데 더욱 더 익숙해져 갔다. 86세대는 가랑비에 옷 젖듯 기득권 세력 일부가 되어 갔다. 문재인 정부 고위 공직자 재산 내역은 그 일단을 보여 주었다. 비교적 낮은 자세로 시민사회운동에 종사했거나 그와 연관을 맺었던 86세대들조차도 상당한 자산가가 되어 있었다.

모든 기득권은 희생양을 낳기 마련이다. 86세대가 기존 질서 안에서 기득권을 향유하고 있는 사이 그 맞은편에는 덤터기를 뒤집어쓴 청년 세대가 고통스런 신음소리를 내뱉고 있었다. 청년 세대는 일자리에서 뚜렷한 소외를 겪었다. 20대 절반 이상이 실업자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취업자마저 다수가 비정규직으로 흘러들어갔다. 청년 세대가 체제 희생양이 된 것은 우리 역사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부모가 비정규직이고 자녀가 정규직이라면 그 가정은 나름대로 희망을 품고 살 수 있다. 반대로 부모가 정규직인데 자녀가 비정규직이라면 그 가정은 희망을 갖기 어렵다. 외환위기 이후 한국 사회는 바로 후자와 같은 곳이 되었다. 그 덕분에 86세대는 자신보다 못한 삶의 조건을 후대에게 물려 준 최초 세대라는 불명예를 걸머질 가능성이 매우 커졌다. 가장 성공한 세대에서 가장 실패한 세대로 전락해 온 것이다. 이미 여기저기서 징조가 나타나고 있지만 가장 욕을 먹는 세대가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86세대 삶의 궤적은 우리 역사의 곡절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이제 그간의 86세대 삶을 객관화시킬 때가 되었다. 당사자들도 냉정하게 되돌아봐야 한다. 자신들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가 무엇이지 찾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