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모로 한국 사회의 틀과 기조가 획기적으로 바뀌지 않으면 안 되는 시기이다. 촛불시민혁명으로 출범한 새 정부도 한국 경제의 패러다임 전환을 공언하고 있는 실정이다. 근대 이후 과거의 전통과 관행으로부터 탈피하여 새로운 미래를 열기 위한 시도는 다양한 형태의 혁명으로 나타났다. 이런 점에서 세계혁명사에 대한 재조명 작업은 인간의 의지로 세상을 바꿀 수 있음을 확인해 줌과 동시에 세상을 제대로 바꾸기 위해서는 무엇을 유념해야 하는지를 깨우쳐 줄 것이다.

 

1차 산업혁명과 함께 자본주의가 근대 이후 새로운 지배 체제로 등극했다. 자본주의는 세계를 점령했고, 사회주의의 도전 등 각종 위기를 극복하면서 오늘까지도 본래의 위상을 유지하고 있다. 자본주의가 자신을 드러낼 때 첫 모습은 국가의 개입을 최소화하고 모든 것을 시장에 내맡기는 ‘자유방임 자본주의’였다. 이 시기 자본주의가 어떤 궤적을 그렸는지 함께 추적해 보도록 하자.

 

 

1차 산업혁명을 일으킨 요인들

자본주의는 1차 산업혁명과 함께 태동했다. 1차 산업혁명 발원지는 유럽의 변방 국가였던 영국이었다. 이는 몇 가지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먼저 에너지 체계에서의 변화를 들 수 있다.

중세 말기 유럽 사회에 에너지를 공급했던 주원료는 목재였다. 하지만 인구 증가에 맞추어 농지와 목초지를 확보하는 과정에서 숲이 빠르게 줄어들어 갔다. 게다가 농업용 장비, 물방앗간과 풍차, 공장의 용광로, 선박 건조 등이 모두 목재에 의존하면서 나무가 끝없이 베어졌다. 마침내 목재 위기가 발생했다.

영국은 발 빠르게 새로운 에너지원으로 석탄을 선택했다. 당시 유럽인들에게 석탄은 기피 대상이었다. 캐서 나르기도 불편했을 뿐만 아니라 주변을 온통 지저분하게 만들었으며, 태우면 고약한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하지만 영국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석탄 채굴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광산 깊이가 해수면 아래로 내려가면서 배수 문제가 심각한 장애로 떠올랐다. 수송 또한 만만치 않은 문제였다. 포장되지 않은 도로 위로 마차를 이용해 석탄을 수송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 모든 장애는 증기 기관 등장으로 돌파될 수 있었다. 증기기관 펌프로 광산 배수 문제가 해결되었고, 증기기관차로 석탄을 수송할 수 있었다. 증기기관은 수송 수단과 산업 동력으로 널리 응용되었다. 증기기관은 화석연료를 이용한 최초의 동력 기관으로서 1차 산업혁명의 기술적 기초가 되었다.

두 번째 요인으로는 노동력 공급 체계의 변화를 들 수 있다. 중세 말까지 유럽의 노동력은 대부분 농노 형태로 농촌에 묶여 있었다. 영국은 이 지점에서 급격한 변화를 보였다. 기존 농지를 양 사육용 목초지로 전환시키는 인클로저 운동이 대대적으로 진행된 것이다, 그에 따라 농지의 속박에서 해방(?)된 농민들이 대거 도시로 유입되었다. 이들은 최소한 임금만으로도 고용 가능한 대규모 노동력으로 비축되었다.

세 번째 요인으로는 사상 문화적 환경을 들 수 있다. 사실 유럽 대륙과 비교해 볼 때 영국이 경제적 조건이나 과학기술 능력에서 특별히 앞섰던 것은 아니다. 과학기술과 교육 등에서는 도리어 프랑스가 앞서 있었다. 그럼에도 영국이 1차 산업혁명의 발원지가 될 수 있었던 결정적 요인은 저명한 역사가 에릭 홉스봄이 지적한대로 부르주아 사상 문화의 확립이었다. 돈 버는 것에 최고의 가치를 부여하고 마음먹으면 큰돈을 벌 수 있었던 환경 요인이 산업혁명을 강하게 자극했던 것이다.

1차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증기기관 동력의 공장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인클로저 확장과 맞물려 방직·방적 산업이 빠르게 성장했다. 이 모든 것은 자본주의 발전의 토대가 되었다.

 

자본주의의 무서운 생명력

가끔은 자본주의가 무섭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토록 많은 위기와 도전을 겪으면서도 자본주의는 아직까지 꿋꿋하게 살아 있다. 도대체 자본주의가 이토록 강력한 생명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원천은 무엇일까?

진보적 입장을 지닌 사람들은 자본주의의 모순과 약점, 한계를 우선적으로 주목하기 마련이다. 그러다 보면 자본주의의 강점에 대한 인식은 소홀히 하기 쉽다. 하지만 자본주의를 제대로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자본주의의 약점만이 아니라 강점도 잘 알 필요가 있다.

자본주의가 근대 이후 세계를 지배할 수 있었던 요인은 크게 세 가지였다. 이 세 가지는 자본주의가 근대 이전의 전통과 관습으로부터 완전한 탈피를 시도했음을 알려준다. 이를 기준으로 보자면 자본주의의 출현은 상당한 혁명적 변화를 수반했다고 볼 수도 있다.

첫째, 성장 기반 부의 축적을 추구했다.

근대 이전 1인당 생산량 증가는 제로 상태를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이러한 조건에서 부의 축적은 오직 다른 사람의 몫을 강탈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었다. 반면 자본주의는 추가적인 부의 창출을 통한 성장을 바탕으로 부를 축적했다. 다른 사람의 몫을 강탈하기도 했지만 그에만 의존하지 않았다.

둘째, 획득한 부의 보다 많은 부분을 재투자했다.

근대 이전 부자들은 획득한 부 모두를 사치와 허영에 낭비했다. 그러면서 사회적 약자들을 향해서는 근검절약을 미덕으로 삼으라고 가르쳤다. 이 점에서 자본주의는 정반대 모습을 보였다. 축적된 자본 모두를 소비하지 않고 보다 많은 부분을 생산적으로 재투자했다. 자본의 본성은 확대재생산의 증폭제로 투입됨으로서 끊임없이 스스로를 키워나가는데 있었다. 그러면서도 자본주의는 사회적 약자들을 향해 근검절약이 아니라 소비가 미덕이라고 가르쳤다.

셋째, 특권의 하향평준화를 수반하는 부의 민주화를 추구했다.

근대 이전 부자들은 다양한 영역에서 배타적 특권을 구축했다. 가마와 마차의 이용은 오직 양반이나 귀족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다. 자본주의는 바로 이 특권의 벽을 허물었다. 자본주의 기업은 살아남기 위해 생산단가를 낮추고 품질을 향상하기 위해 끊임없이 경쟁했다. 이를 통해 과거 특권층만이 누릴 수 있었던 것들을 대중의 품에 안겨다 주었다. 오늘날 가마와 마차를 대신하고 있는 승용차는 누구나 보유할 수 있는 이동 수단이 되었다. 한국의 경우 가구당 승용차 보유는 평균 2대에 이르고 있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사람들은 자본주의의 모순을 피부로 느끼고, 자본주의의 야만성을 비난하면서도 일상 세계에서는 자본주의 높은 생산력에 매료되어 갔다. 오늘날 평범한 서민들의 소비 수준은 500년 전의 양반 귀족보다도 훨씬 높은 수준이다. 자본주의가 온갖 욕을 먹으면서도 오늘날까지 살아남은 이유이다.

 

가게 주인들이 만든 나라

20세기 초반에 이르기까지 자본주의는 시장의 자율적 조정 능력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국가의 개입을 최소화하는 ‘자유방임 자본주’의를 추구했다. 시장은 애덤 스미스가 표현한대로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자원을 가장 효율적으로 배분하는 최상의 조정자이자 가장 능력 있는 자에게 승리를 안기는 최고의 심판관으로 간주되었다. 국가 개입은 그러한 효율성을 침해하는 해악이었을 뿐이다.

자유방임 자본주의 시대에 기업은 시장을 무대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최고 주역이었다. 영국은 액면 그대로 기업들이 만들어간 나라였다. 나폴레옹은 영국을 두고 가게 주인들의 나라라고 비꼬았지만 결과만을 놓고 보면 예사롭지가 않다. 가게 주인들의 나라가 역사상 최대 제국으로 발전했기 때문이다.

대영 제국 초기 주역은 영국 정부가 아니라 기업들이었다. 북미 최초의 영국인 정착지는 런던 샤, 플라이마우스 사, 도체스터 사, 메사추세츠 사와 같은 주식회사들에 의해 개척되었다. 최대 규모를 자랑한 인도 식민지를 개척한 것 역시 대표적인 주식회사의 하나였던 동인도회사였다.

런던 레든홀 스트리트에 본부를 두었던 동인도회사는 인도를 식민지로 개척한 뒤 약 1백 년 동안 직접 지배했다. 이를 위해 동인도 회사는 막대한 군대를 유지했는데 많을 때는 군인 수만도 35만 명에 이르렀다. 이는 영국 왕이 보유한 군대 규모마저 상회하는 것이었다. 영국은 1858년에 이르러서야 인도를 국영 식민지로 전환했다. 그렇다고 해서 동인도회사의 재산을 압류한 것은 아니었다. 도리어 국영화를 통해 동인도 회사는 본연의 돈벌이에 더욱 전념할 수 있었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 영국 정부와 주식회사들의 관계는 껄끄러워지기보다 더욱 끈끈해졌다.

영국 정부가 물불 안 가리고 기업들의 돈벌이를 뒷받침해 주었던 대표적 사례로서 1940년 아편전쟁을 들 수 있다.

동인도회사와 크고 작은 사업체들이 중국에 마약을 수출함으로써 큰돈을 벌었다. 수백만 명의 중국인이 마약에 중독되었다. 중국 정부는 마약 거래를 금지하는 포고령을 내리고 영국 배에 실려 있던 마약을 압류해 파괴했다. 그러자 영국 정부는 곧바로 중국을 향해 전쟁을 선포했다. 아편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중국은 영국 신무기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영국군은 상하이를 점령하고 난징으로 진격했다. 중국은 굴복했고 불평등한 난징조직이 채결되었다. 중국은 홍콩을 조차지로 영국에 할양했으며 마약 거래를 계속 허용해야 했다. 결과는 4천여만 명의 중국인이 마약에 중독된 것으로 나타났다. (…계속)

 

*표와 그림을 포함한 보고서 전문을 보시려면 아래의 pdf 파일을 다운 받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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