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원고는 새사연 아카데미 여름 강좌 <세계혁명 기행> 강의록으로, 강의는 2017년 7월 10일 ~ 7월 15일까지 진행하였습니다.

 

근대 시민혁명은 중세 시대를 마감하고 새로운 시대를 연 역사적 계기였다. 근대 시민혁명의 서막을 장식한 대표적인 경우로서 의회주의의 출발점이 된 영국의 명예혁명, 식민지로부터 독립하여 공화정을 선보인 미국혁명, 근대 혁명의 빅뱅이라 할 수 있는 프랑스대혁명 등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근대혁명의 빅뱅, 프랑스 대혁명

1789년 프랑스대혁명에서 1871년 파리 꼬뮌에 이르는 약 100년간의 역사는 격렬한 계급투쟁으로 점철되어 있다. 당시 계급투쟁의 주역은 크게 보아 봉건귀족, 부르주아지, 프롤레타리아 셋이었다. 이들은 공동의 적을 향해 손을 잡기도 하고 분열되어 극렬하게 다투기도 하며 역동적인 근대 역사를 만들어갔다. 칼 맑스(1818~1883)가 《공산당 선언》에서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다”라고 기술한 것은 이러한 역사적 과정을 반영한 것에 다름 아니었다.

근대 혁명은 이러한 계급투쟁을 기반으로 태동하고 성장하였으며, 그 중심이 되었던 곳은 단연 프랑스였다. 프랑스는 중요한 시기마다 유럽혁명의 선두에 섰으며 이념적으로 가장 선진적이었고 실천적으로는 가장 전투적이었다.

유럽의 다른 혁명은 프랑스에서의 혁명에 의해 자극 받은 결과였다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다. 이 점에 대해 오스트리아의 보수적인 정치인 메테르니히는 “파리가 재채기를 하면 유럽이 감기에 걸린다.”고 빈정거리기도 했지만, 좀 더 진지한 쪽에서는 프랑스에게 혁명의 조국이라는 칭호를 부여하는 것을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1789년 7월 14일 파리 시민의 바스티유 감옥 습격으로부터 시작된 프랑스대혁명은 부르봉 왕조의 복귀에 이르기까지 장장 29년에 걸쳐 진행되었다. 이 기간 동안 프랑스대혁명은 근대 이후 혁명의 다양한 요소들은 골고루 선 보였다. 혁명을 둘러싼 계급 간 갈등과 투쟁을 적나라하게 드러냈고, 로베스피에르가 주도한 공포 정치를 통해 ‘혁명적 독재’의 원형을 보여주었다. 황제의 지위에서 안정적으로 개혁을 추진했던 나폴레옹은 군주 형 혁명가의 출발이 되기도 했다.

프랑스대혁명의 이정표가 된 것은 혁명 발발 직후인 8월 26에 발표된 ‘인권선언’이었다. 17조로 구성된 ‘인권선언’은 구시대에게는 사망선고문이자 새로운 시대에게는 이념적 좌표가 되었다. 제1조는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나서 생활할 권리를 가진다. 사회적 차별은 공적인 이익을 근거로 해서만 있을 수 있다.” 제3조 “모든 주권의 근원은 본질적으로 인민에게 있다. 어떤 단체나 어떤 개인도 명백히 인민에게서 유래하지 않는 권력을 행사할 수 없다.”고 천명했다.

‘인권 선언’은 프랑스대혁명이 극과 극을 오가며 숱한 혼란과 반동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방향을 잃지 않게 한 나침반 구실을 했다.

 

격화되는 계급투쟁

대혁명 이후 프랑스 사회는 봉건 귀족, 부르주아 계급, 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애덤 스미스가 노동빈민으로 표현했던)도시하층민 등 크게 세 세력으로 나뉘어 복잡한 이해 다툼을 벌였다. 이중에서 부르주아 계급과 노동자들 위시한 도시 하층민들은 봉건 귀족에 맞서 손을 잡았으나 둘 사이의 대립적 관계가 빠른 속도로 표면화되고 말았다. 이러한 이해 다툼은 반복되는 혁명의 양상을 띠었는데 그것은 한마디로 계급투쟁이 첨예한 정치투쟁으로 발전한 경우라고 할 수 있었다.

첫 충돌이 1830년에 발생했다. 대혁명의 종료와 함께 복귀한 부르봉 왕조는 처음에는 대혁명의 교훈을 바탕으로 신중하게 처신하였다. 하지만 샤를 10세에 이르러 대혁명으로 약화된 귀족들의 특권을 다시 강화하는 일련의 조치를 취하게 되었다. 이에 대해 민중은 1830년 선거에서 부르주아 계급 출신 의원들을 대거 당선시키는 것으로 대항하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샤를 10세가 의회 해산, 부르주아 계급의 참정권 박탈, 언론 출판 금지 등 일련의 반동적 조치를 취하였고 그에 따라 사태는 결정적으로 악화되고 말았다.

샤를 10세의 조치에 격분한 시민, 노동자, 학생은 바리케이드를 설치하고 국왕군을 이탈한 군대까지 합류시키면서 강력한 실력대결을 벌였다. 시민 2천여 명이 사망하는 치열한 접전 끝에 결국 혁명세력은 사를10세를 폐위시키는데 성공했다. 혁명 세력은 처음에는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을 세우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혁명을 주도한 부르주아 계급은 공화정은 하층민들을 겁 없이 날뛰게 만들 것이라는 판단 아래 공화정을 포기하고 입헌군주제를 추진하였다. 이로써 혁명 과정에서 가장 치열하게 싸웠던 노동자, 도시 하층민들은 자신들의 피의 대가가 강탈당했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부르주아 계급과 노동자, 도시 하층민 사이의 갈등은 1846년 선거법 제정을 계기로 한층 심화되게 되었다. 새로 만들어진 선거법에 의하면 성인 남자의 불과 3퍼센트만이 선거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3퍼센트에 속하는 사람들은 주로 부유한 은행가, 대상인, 대학교수, 법률가, 그리고 왕정 복귀를 포기한 자유주의적 귀족들이었다. 나머지 95퍼센트의 사람들은 정부 구성과 관련해 아무런 권리도 행사할 수 없었다.

1848년 2월 마침내 노동자 학생을 주축으로 한 반정부 세력은 파리 시가를 점령하고 실력대결에 돌입하였다. 결국 왕정이 폐지되고 공화정이 설립되기에 이르렀다. 1948년 2월 혁명은 반정부 세력의 승리로 끝났다.

그러나 노동자 등 도시하층민들은 다시 한 번 혁명의 과실을 나누어 갖지 못한 채 주변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부르주아 계급은 봉건 세력에 대항해 투쟁할 때는 어쩔 수 없이 노동자, 도시 하층민과 손을 잡았다가도 그들이 급격히 부상하면 심각한 동요를 일으키면서 끝내는 보수적 입장으로 돌아섰다.

쓰라린 배신감에 사로잡힌 노동자들은 파리 시내를 점거하고 재산의 평등한 분배를 외치며 무력시위를 벌였다. 6월 봉기를 단행한 것이다. 파리 노동자들은 어린 자녀를 포함한 가족의 도움을 받으며 3일 동안 바리케이드를 지키며 끝까지 재산권 평등을 외쳤다. 부르주아 계급의 지원 요청을 받은 대규모 군대가 그 보다 3분의 1도 안 되는 4만 명의 파리 노동자를 상대로 피의 진압작전을 전개했다. 6월 23일 완전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노동자들은 끝내 패배하고 말았다.

6월 봉기에 가담했던 사람들 중 1,000 명가량은 전투 중 사망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수천 명의 노동자들이 혁명에 가담했거나 동조했다는 이유로 살해되었다. 그 밖에도 3,500명 정도가 식민지로 추방되었다. (… 계속)

 

*표와 그림을 포함한 보고서 전문을 보시려면 아래의 pdf 파일을 다운 받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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