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클리 펀치(562) 선진국 벤치마킹 시대는 끝났다

By | 2018-06-29T17:02:33+00:00 2017.06.07.|

온갖 문제투성이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에 붙는 자랑스러운 수식어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식민지를 경험한 나라들 중에서 보기 드물게 산업화와 민주화에 동시에 성공한 나라라는 점을 꼽을 수 있다.

산업화에 초점을 맞추었을 때 덧붙여지는 표현이 있다. ‘초고속 압축 성장’이 바로 그것이다. 수치로 확인해 보자. 2005년 달러 가치 기준으로 1960년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1,107달러였다. 54년이 흐른 2014년에 이르러 그 수치는 2만 4,565 달러로 약 22배 증가했다. 같은 기간 동안 아르헨티나는 2.1배, 멕시코는 2.6배, 터키는 3.7배 성장하는데 그쳤다. 한국의 고도성장이 경이롭게 비쳐지기에 충분했다.

한국이 초고속 압축 성장에 성공한 이유는 여러 가지를 들 수 있다. 그중에서 철저한 ‘추격전략’을 구사한 점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추격전략은 숱한 시행착오를 거쳐 검증된 선진국 모델을 벤치마킹하면서 전력을 다해 따라잡는 전략이었다. 그럼으로써 불필요한 시행착오를 최소화하면서 산업화의 속도를 최대한 끌어올릴 수 있었다.

이런 식으로 한국의 기업들은 남들이 일구어놓은 시장에 뛰어들어 추격전을 벌인 끝에 1위 자리를 차지하곤 했다. 삼성전자가 대표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삼성전자는 시장 동향을 예의주시하다가 될 성 싶다고 판단하면 막대한 인력과 자금을 집중 투입하여 일거에 전세를 뒤엎었다. 삼성전자는 이러한 과정을 반복하면서 마침내 매출액 기준 세계 최대 전자업체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선진국을 벤치마킹하는 추격전략은 비단 경제 분야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거의 모든 분야에서 걸쳐 이루어졌으며 진보 보수를 막론하고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는 가장 보편적 방식으로 통용되었다. 진보 진영 일각에서는 북유럽의 복지 국가를 대표적인 벤치마킹 대상으로 삼기도 했다.

사정이 이러다 보니 선진국 경험을 흡수하는 통로로서 유학이 크게 각광을 받았다. 그중에서도 미국 유학은 유별났다. 이민․세관국(ICE)의 발표에 따르면 2004년 말 현재 미국에 가장 많은 유학생을 보낸 나라는 한국으로서 도미 유학생 수는 7만 3272명에 이르렀다. 중국, 일본보다도 2만 명 정도 많은 숫자였다.

미국에서의 박사 학위 획득 또한 다른 나라들을 압도했다. 미국 시카고 대학이 1999~2003년 미국 박사를 가장 많이 배출한 대학들을 조사하여 발표한 적이 있었다. 미국 박사를 가장 많이 배출한 대학은 캘리포니아에 있는 버클리대학교로 나타났다. 그 다음 미국 박사를 많이 배출한 대학은 서울대학교였다. 서울대학교는 미국 바깥의 대학 중에서 미국 박사를 가장 많이 배출한 대학인 것이다. 참고로 연세대는 5위였고 고려대는 8위였다. 1999년 당시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일본인은 약 9천 명이었는데 한국은 이 보다 훨씬 많은 3만 명 정도나 되었다. 인구수를 감안하면 미국 박사 학위소지자 수에서 한국이 일본보다 약 10배 가까이 많았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선진국 경험을 벤치마킹하는 것으로서 ‘추격전략’은 더 이상 약효를 발휘하기 어렵게 되었다. 먼저 한국의 수출을 이끈 주력산업이 기술경쟁력에서 세계 1위에 오르거나 글로벌 강자로 부상함으로써 추격해야할 대상보다 추격해오는 경우가 더욱 많아졌다. 추격전략을 구사할 위치에서 벗어난 것이다. 더불어 선진국 전반이 성장 동력에서 빨간불이 커지는 등 벤치마킹 대상으로서 가치가 크게 감소했다. 혼미를 거듭하고 있는 정치 사회 분야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이제 한국에 요구되는 것은 미지의 영역에 뛰어들어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모델과 전략을 선보이는 것이다. 말하자면 ‘추격전략’에서 ‘창조전략’으로 전환해야 한다. 과연 여기서 필요한 1차적 요소는 무엇일까?

이와 관련해서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교수들이 함께 편찬한 <축적의 시간>은 많은 점을 시사한다. <축적의 시간>은 최근 우리나라 주력 산업들의 경쟁력이 약화되고 있는 핵심 요인으로서 오랫동안 벤치마킹에 의존함에 따라 ‘창조적 개념설계 역량’이 취약해진 점을 꼽고 있다. 창조적 개념설계 역량은 문제를 전혀 새롭게 정의하는 것으로서 창조전략 구사의 1차적 요소이다. 모두가 휴대폰을 통신기기로 간주하고 있을 때 애플이 손 안의 컴퓨터로 새롭게 정의한 것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축적의 시간>에 따르면, 개념설계 역량은 반짝이는 아이디어에 의해 단기간 안에 획득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인수합병 등을 통해 돈으로 살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니다. 그것은 오직 숱한 시행착오의 축적을 통해 얻어질 수 있다. 말 그대로 지난한 ‘축적의 시간’이 요구되는 것이다.

선진국을 벤치마킹해서 손쉽게 문제를 풀던 시대는 이제 지났다. 새로운 시대의 주역은 시행착오를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불모의 현장에서 부딪치고 뒹굴며 도전과 실험을 반복하는 사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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