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참여 기회는 만인에게 평등한가?

드라마 역적에서 천민 아모개의 자식인 홍길동과 임금 연산군은 둘 다 자신들이 살고 있는 조선의 기본 교리인 성리학 그 중에서도 삼강오상(三綱五常)에 대해 의문을 가진다. 단지 두 사람의 차이가 있다면 길동은 하늘 아래 다 같은 인간인데 어찌 높낮이가 있을 수 있느냐 라고 생각하는 반면, 연산군은 자기 아래 사람들은 다 종으로 인식한다. 연산군은 종들에게 있어 남편과 아내, 아버지와 자식 등 절대적 복종의 관계는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드라마는 강상죄 및 사람의 신분 차이가 당연한 조선시대에 차별을 철폐하고자 하는 길동과 그 의견에 동조하며 익숙한 것에 저항하는 백성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드라마지만 사실 작금의 현실과 비교했을 때 낯설지만은 않다.

기다리던 19대 대통령선거가 치뤄졌다. 2016년 11월 박근혜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부터 촛불 그리고 어제 치뤄진 대선은 한국 현대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순간이다. 이 일련의 일들이 더욱 의미가 있는 것은 많은 과정이 대중의 힘과 민주주의 틀 안에서 이뤄졌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오직 깨어있는 시민들의 집결된 힘과 의지로 대통령 탄핵을 요구하였고, 반대하는 세력의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감시하고 주장하여 무사히 대통령 선거까지 도달하였다.

그 과정에서의 온/오프라인 속의 국민들의 정치참여 모습은 건강하다 못해 이상적이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사실 모두에게 열려있고 공평해 보이는 정치참여는 은밀하게 불평등의 형태를 띄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참여의 불평등의 역사는 민주주의라는 단어의 기원이 되는 그리스 아테네 때 부터 시작한다. 기원전 6세기 경 아테네의 정치형태를 가리키는 demokratia 라는 단어로부터 민주주의는 시작되지만, 이 시대 정치 참여 주체는 “노예와 여성에게 생산과 재생산을 전담시킨 남성 시민 집단”이었다(정치의 발견, 박상훈).

정치참여에 있어 특정 집단이 제외되는 현상은 불과 100여년 전까지 계속 되어왔다. 전통적으로 엘리트 계층은 선거권을 확대하면 그들이 가지고 있는 권력과 특권, 부의 우위를 상실하게 될 거라 생각하며 두려워했기 때문에, 제외되는 집단은 주로 노예, 여성, 극빈자, 하위층 등 당시의 소외계층들이었다. 19세기 말 미국 남부 정치인들은 가난한 노예와 그 후손들에게 선거권을 주지 않기 위해 ‘선거세 제도’ (선거세를 납부한 자에게만 투표권을 주는 제도) 를 만들었으며, 1979년까지 에콰도르는 원주민들의 선거권 획득 요건을 차단하기 위해 문자 해독능력이 있는 사람에게만 선거권을 인정하였다. 무직상태로 구제 물자를 지급받고 있는 사람들의 선거권을 인정하지 않는 1930년대 미국의 극빈자 배제법률도 있다. 이처럼 엘리트들은 정치참여에 있어 가난한 사람들을 배제하고 그들의 권리를 박탈하는 것에 집중해 왔다(불평등의 대가, 조지프 스티글리츠).

이런 과거와 달리 오늘날의 현대 민주주의는 계급, 성, 출생, 신분의 차이없이 시민권을 부여하여 정치적 평등의 권리를 제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나, 사실 오늘도 국민들의 다양한 의견을 원하지 않는 상위 지배계층은 간접적이지만 은밀한 방법으로 사람들의 정치참여 (그 중에서도 선거권) 기회를 박탈하고자 시도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방법이 정치불신, 정치혐오, 냉소주의, 정치무관심 등을 국민들에게 심어주는 것이다. 정치와 정치인들을 불신, 환멸하게 만들어 정치에 대해 냉소적이고 무관심한 태도를 형성시켜 정치참여 행동을 방해하는 것이다. 그 결과, 유권자들은 자신도 모르게 소외와 불신을 바탕으로 자발적 선거권 박탈 행위를 수행한다. 많은 현대 민주주의 국가에서 일어나는 이같은 정치에 대한 깊은 불신의 결과는 결국 정치 시스템을 자신에게 이로운 방향으로 조종하길 원하는 부유층에게 환영을 받는다고 조지프 스티클리츠는 말한다.

하지만 이번 대한민국의 선거 과정은 달랐다. 이번 선거는 탄생부터 투표까지 시나브로 익숙하게 지낸 것들 (소수 엘리트들의 계획된 의중)에 대한 저항의 연속이라 할 수 있다. 선거 기간 동안, 국민들은 끊임없는 참여를 통해 기존 기득권의 계획이나 정치공학에 맞서서 자신이 원하는 후보가 무사하고 공정하게 달릴 수 있게 싸웠다. 선거과정이 의심스러우면 투표 및 개표 과정을 감시하는 ‘시민의 눈’ 에 참여 & 후원하였고, 지난 대선에 문제였던 국정원 댓글로 인한 여론 공작에 대항하여 자발적 ‘클린 댓글’ 활동을 수행했다. 공약에 대한 참여도 눈에 띄었는데 후보들의 공약은 팩트 체크라는 이름으로 검증되었으며, 반 국민적 공약의 경우 지지율 하락이라는 즉각적인 방법으로 국민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표출하였다. 또한 그간 중요하지만 형식적이라는 평을 들어왔던 토론회는 전 후 10% 넘는 지지율 변동을 통해 그 실질적 위력을 발휘하였다. 과거 미디어나 정치 엘리트들이 의도적으로 유도한 정치 냉소주의 형성은 유권자들의 적극적 정치 참여로 인해 제대로 자리잡지 못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시간은 5월 9일 화요일 오후이며 투표는 끝나지 않았다. 고로 글이 나갈 10일 아침 누가 대통령이 되었는지 지금은 모른다. 쭉 앞서 달린 1등 후보가 예상대로 당선자가 되었는지, 득표율에서 역전 드라마가 써졌는지 아직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저항과 활발한 정치참여로 만들어 낸 19대 대통령 선거는 이것으로 끝난게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이제 시작이다. 촛불의 의미를 지키기 위해 우리는 이제 당선자가 된 후보의 공약 수행을 감시해야 할 것이며 여론의 장난이나, 마타도어가 있다면 목소리를 내어 공약을 이행할 수 있게 지켜줘야 하는 역할이 남아있다.

홍길동이 꿈꾸는 세상은 다 같이 만세를 부르며 시린 잿빛 세상이 색동옷을 입고 얼음 위에 금이 가는 봄 날이다. 부디 그 봄날이 우리에게도 와 모든 촛불이 광화문에서 자유롭게 만세를 부를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