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농활에 가서 농사일의 고단함을 느끼며 열댓 명이 함께 하루 종일 모내기를 했는데 절반의 일밖에 끝내지 못했다고 했다. 청년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막걸리 두어 잔을 들이키던 농부 아저씨는 해질녘이 되자 지친 청년들에게 나오라고 하고 이앙기를 몰아 나머지 절반의 일을 순식간에 끝내버렸다. 농업에 종사하는 인구는 적고 그나마 그들은 나이가 많이 들었다. 그렇지만 지금의 농업 종사자들이 힘들고 어려운 결정적인 이유는 고되고 끝이 보이지 않는 농사일에 있는 것이 아니라 경제논리에 의한 정치와 시장의 외면에 있다. 농부 아저씨는 농업을 외면하지 않는 어여쁜 청년들에게 시원한 막걸리 맛을 알려주려고 오히려 일거리와 시간을 내준 셈이다.

군대에 가면 삽질을 한다고 한다. 삽질보다 잘 할 수 있는 일이 많을 청년들에게 삽을 하나씩 주고 파내려 가면 몇 시간이 걸려야 사람 키만한 구덩이를 만들 수 있을까? 같은 크기의 구덩이를 포크레인을 동원하여 파내면 순식간이다. 이를 모를 사람이 없는데도 청년들에게 삽을 쥐어주는 이유는 무엇일까? 높은 연봉을 받는 소수의 군인들로만 군대가 운영된다면 포크레인은 놀고 있는데 군인들이 괜시리 삽질을 할 일은 없을 것이다.

한국 노동자들이 받는 평균적인 임금 수준이 낮은 까닭은 낮은 노동생산성에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최저임금을 쉬이 올릴 수 없는 것도 낮은 노동생산성에 일부 원인이 있다고 한다. 낮은 노동생산성과 낮은 임금 수준은 분명 공존하는 현실이다. 우리가 천국처럼 여기는 북유럽 국가들에서는 우리와는 정반대로 높은 임금수준과 높은 노동생산성이 공존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낮은 임금이 낮은 노동생산성에서 기인한다는 추론에는, 임금 수준이 실제로 노동생산성에 근거하여 결정되는지에 대한 판단은 유보하고 보더라도 의심해야 하는 전제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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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노동생산성은 적은 노동을 투입해서 많은 생산물을 산출했을 때 높다고 한다. 총생산량을 총노동량으로 나누어 계산하는 노동 한 단위당 생산량이 위 식 화살표 왼편의 단위당 노동생산성이다. 그렇지만 대체 ‘생산량’이란 무엇일까? 어떤 사회의 노동 한 단위당 생산량은 빌딩 0.1개와 휴대폰 500개이고, 다른 사회의 노동 한 단위당 생산량은 빌딩 0.11개와 휴대폰 200개라고 하자. 어느 사회의 노동생산성이 더 높은가? 1970년대 영국 중심의 포스트케인지언 경제학자들과 미국 중심의 신고전학파 경제학자들 간의 ‘자본논쟁’의 핵심 이슈는 이 문제와 연관된다. 결론은 생산물 각각의 가격을 곱하여 더하는 방식이 심각한 논리적 오류를 안고 있으므로 ‘해결 방안’이 될 수 없다는 쪽으로 났지만, 본고에서는 일단 현재 경제학이 취하고 있는 이러한 방식으로부터 더 나아가지 않는다.
생산물마다 단위가 달라 단순히 합산하여 계산할 수 없는 문제를 해결하는 단순한 방식은 생산물의 가격을 모두 더해서 시장 가격으로 노동생산성을 환산하는 화살표 오른편의 부가가치 노동생산성이다. 이 방식 하에서 빌딩 0.01개보다 휴대폰 300개가 더 비싸다면 빌딩을 더 많이 생산한 사회의 생산성이 더 높은 결과로 귀결된다. 자, 이제 묻자. 빌딩보다 휴대폰을 더 많이 생산하도록 하는 결정은 누가 했을까? 시장은 빌딩을 더 원하는데 휴대폰을 더 생산하는 결정이 부가가치 노동생산성 저하의 원인이라면, 이때 낮은 노동생산성의 원인은 누구에게 있나?

둘째, 빌딩을 더 많이 생산한 사회의 노동자 1인당 평균 노동시간은 연간 2,100시간인데 휴대폰을 더 많이 생산한 사회에서는 연간 1,500시간이다. 그렇다면 두 사회의 시장가격으로 환산한 총생산물가치가 같다고 하더라도 노동자의 시간을 덜 투입한 사회의 노동생산성이 더 높을 것이다. 정말 그럴까? 1,500시간 일하는 노동자들은 압축적으로 일을 하는데 2,100시간 일하는 노동자들은 피곤함을 억누르며 단지 오랜 근무시간을 채우고 있다면 유효한 노동시간은 1,500시간으로 동일할 수 있다. 경제학적으로 엄밀하게 따지면 두 사회의 노동생산성은 동일하지만 정확히 측정할 수 없으므로, 노동자들이 연간 2,100시간 일하는 사회의 노동생산성이 낮게 계산된다. 자, 또 묻자. 2,100시간 일하는 노동자들은 자진해서 피곤함을 억누르며 장시간 노동을 하고 있는 것일까? 노동생산성이 낮아서 노동자들이 장시간 노동을 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장시간 노동이 낮은 노동생산성을 부르는가?

18세기 산업혁명은 영국의 면직물 산업에서 시작되었다. 수십 년 후에 영국의 면직물 산업은 유럽 다른 국가들과 비교해도 결코 선진적인 위치가 아니었다. 아주 낮은 임금, 끔찍한 노동조건을 받아들이면서 노동을 공급하는 노동자들이 넘쳐나므로 새롭게 발명된 기계를 도입하여 생산성을 높일 유인이 없었던 탓에, 영국의 면직물 산업은 퇴보의 길을 걷게 되었다. 포크레인이 있는데도 삽질이 계속되었던 것이다. 노동력이 부족하거나 혹은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에 대한 규제가 엄격할 때, 우수한 자본가들은 주어진 조건 하에서 생산량을 최소한 유지하기 위해 새로운 기계를 도입하고 기술 투자를 한다. 농업 인구가 줄고 고령화 되자 우리 정부가 보조금을 주거나 저리융자를 통해서 농가마다 농기계를 보급시킨 점을 떠올리자.

낮은 임금이 낮은 노동생산성 때문이라든가 혹은 노동생산성이 낮기 때문에 최저임금을 높이면 실업인구만 늘릴 것이라는 식의 임금과 노동생산성 간의 관계에 대한 의심스러운 추론의 규명은 여기에서 다루지 않는다. 다만 작금의 한국 노동자들을 비탄에 빠지게 하는 열악한 노동조건이 낮은 노동생산성을 특징으로 하는 경제구조의 결과가 아닌 원인일 수 있음을 지적하고 싶다.

노동조건은 개선되어야 한다. 특히 노동시간은 규제를 통해서 단축해야만 한다. 가끔 모두가 비정규직이 되면 비정규직 문제가 해결되지 않겠냐는 말을 듣게 된다. 그러나 한국의 모든 구성원의 상황이 나빠져서 평등한 사회가 되면 국제적으로는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데 기여하는 국가가 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그러한 길로 들어선 듯해서 무척 걱정스럽다. 막걸리 맛은 익히 잘 알고 있다. 이제 삽질은 그만두고 포크레인을 몰자. 그리고 남은 시간에 함께 시원한 막걸리를 즐겨보자.

* 본 칼럼은 2016년 7월 25일 한국비정규센터의 정책칼럼으로 게재 된 글입니다.
출처 : http://workingvoice.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