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클리펀치(535) 촛불이 밝힌 역사

By | 2018-06-29T17:02:44+00:00 2016.11.23.|

대통령의 극단적 일탈로 국가적 망신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대한민국 국민의 일원임이 더 없이 자랑스러운 순간이다. 세계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촛불시위의 장엄한 파노라마가 그렇게 만들고 있다. 과연 촛불시위는 어떻게 해서 만들어진 것일까. 그 속에 담겨져 있는 비밀은 무엇일까. 그간의 역사를 되짚어 봄으로써 그 해답에 접근해 보도록 하자.

우리 역사에서 촛불시위(혹은 촛불집회)가 처음 모습을 드러낸 것은 2002년이었다. 그해 6월 13일 경기도 의정부에서 심미선, 신효순 두 여중생이 미군 장갑차에 깔려 목숨이 잃는 참변이 발생했다. 여러 정황에 비추어 볼 때 고의적 살해 가능성이 매우 컸다. 그럼에도 미군 당국은 범인들에게 무죄 평결을 내렸다.

분노의 물결이 일시에 전국을 강타했다. 온라인 공간에서는 두 여중생을 추모하는 커뮤니티가 무서운 기세로 확산되었다. 그러던 중 ‘앙마’라는 네티즌이 두 여중생을 추모하는 촛불행사를 가질 것을 제안하였다. “죽은 이의 영혼은 반딧불이 된다고 합니다. 광화문을 우리의 영혼으로 채웁시다. 광화문에서 미선이 효순이와 함께 수천수만의 반딧불이 됩시다.” 앙마의 제안은 온라인 공간을 타고 빠르게 퍼져 나갔다. 11월 30일 저녁 6시가 되자 광화문에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수만 명의 사람들이 손에, 손에 촛불을 들고 나타난 것이다. 예의 촛불시위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촛불시위는 종전까지 지배적이었던 수직적 위계질서를 허물고, 수평적이면서 개방적인 시위로 탈바꿈 하도록 이끌었다. 촛불시위는 촛불을 드는 것만으로 누구나 참여할 수 있었다. 더불어 참가자 모두는 동격이었다. 국회의원도 연예인도 한 명의 촛불이었고 나이 어린 여중생도 당당히 촛불의 일원이 될 수 있었다. 촛불시위의 이 같은 특성은 개방적이고 수평적 문화에 익숙한 새로운 세대의 등장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2002년 촛불시위는 얼마 안가 수직적 위계질서와 폐쇄적 조직문화에 익숙해져 있는 ‘운동권’ 집단에 의해 점령되었다. ‘깃발대중’이라고도 표현되었던 이들 운동권 집단이 촛불시위를 주도적으로 이끌어갔지만, 촛불시위의 고유한 속성인 개방성과 수평성은 크게 잠식된 상태였다.

이후 각종 이슈가 발생할 때마다 촛불집회가 이어졌으나 야간집회의 한 형식을 크게 넘어서지 못했다. 그러던 중 2008년 미국산 광우병 쇠고기 수입 결정으로 촛불시위가 촉발되면서 한층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2008년 촛불시위는 5월 2일부터 7월 12일까지 연인원 300여만 명이 참여한 것으로 추산되었다. 촛불시위가 길게 이어지는 동안 72시간 릴레이 시위처럼 장시간에 걸친 마라톤 시위가 등장했는가 하면 촛불문화제로 시작하여 다음날 새벽까지 경찰과 대치하는 철야시위도 일상화되었다.

촛불시위 주역은 처음 촛불을 든 10대에서부터 세상에 대한 문제의식이 충만해져 있던 30대까지를 아우르는 청년 세대였다. 청년 세대는 2008년 촛불시위 과정에서 자신의 속성을 액면 그대로 표출했다. 촛불시위 참가자들 다수는 그 어떤 조직에도 구속되는 것을 꺼렸다. 심지어 그 누구인가가 자신을 가르치려 들거나 이끌려고 하면 강한 거부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말 그대로 촛불시위 중심은 참가자 각자였다. 그러다 보니 참가자들이 한 곳에 모여 집회를 할 때도 준비된 연사의 정치연설이 아닌 참가자들의 자유로운 발언이 줄을 이었다. 전체 대열을 이끌고 가는 지도부도 따로 존재하지 않았다. 시위 참가자들 각자가 판단해 움직였고 필요하면 즉석에서 열띤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청년 세대는 2008년 촛불시위에서 이전 세대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데 성공했다. 그들은 촛불시위를 함께 어울려 춤추고 노는 축제의 장으로 만들었다. 그들에게 투쟁과 놀이는 처음부터 하나였다. 아울러 이전 시기 집회 시위를 지배했던 비장함과 강인함을 부드러움과 여유로움으로 대체했고, 물리적 힘을 문화적, 예술적 상상력과 재기발랄함으로 대체했다. 그럼으로써 보는 사람들 사이에서 저절로 폭소와 박수가 터져 나오도록 만들었다.

청년 세대는 2008년 촛불시위를 통해 자신들의 잠재력을 폭발적으로 발산했다. 그들은 온라인 공간에서 터득한 특유의 확장성을 바탕으로 거대한 시위 대열을 형성하는데 성공했다. 또한 특유의 재기 발랄함을 바탕으로 분위기에서 모두를 압도할 수 있었다. 아울러 온라인에서의 왕성한 활동을 결부시킴으로써 여론을 쥐고 흔들 수 있었으며, 이를 통해 이명박 정부를 궁지에 몰아넣었다. 결국 이명박 스스로 졸속 추진에 대해 대국민 사과를 해야 했다. 비록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완전 중단시키는 데까지 이르지는 못했지만 상당한 정치적 효과를 거둔 것이다.

청년세대는 2008년 촛불시위를 주도하면서 새로운 시위 문화를 정착시키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낡은 문화에 익숙해 있던 운동권 세력과 적지 않은 문화 충돌을 경험해야 했다. 특정 개인이나 집단이 쓸데없이 분위기를 주도하려고 하거나 폭력적 방식에 집착했던 것은 그 단적인 예이다. 이러한 문화 충돌은 청년세대에게 좋지 않은 기억을 남겼고 오랫동안 대규모 촛불시위의 재현을 어렵게 했다.

시행착오를 통한 학습효과였을까? 2016년 박근혜 퇴진 촛불시위에 와서는 모든 것이 달라졌다. 2016년 촛불시위의 양과 질을 결정한 것은 자발적으로 참여한 시민들이었다. 참가자의 압도적 다수를 차지한 이들 자발적 시민들 대부분은 촛불시위의 특성을 정확히 체득하고 있었다. 촛불시위가 세대를 뛰어넘어 폭넓은 공감을 얻기에 이른 것이다. 시민들은 촛불시위의 전개 양상을 지배하면서 정치권과 운동권 모두를 ‘선도’했다. 이전 시기에 있었던 문화 충돌도 대폭 사라졌다. 조직대중은 촛불시위 문화에 나름대로 잘 적응했고 거꾸로 다수 시민들은 이들 조직대중을 별 어려움 없이 포용했다. 그 결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평화집회가 만들어질 수 있었다. 더불어 국민들의 절대적 공감과 지지를 얻어냄으로써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2016년 촛불시위의 주인공은 대중과 엘리트 사이의 경계선을 뛰어넘은 ‘시민’이라는 이름의 주체였다. 촛불시위가 펼쳐낸 ‘광장의 정치’는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온전히 세상의 중심이고 이 나라 주인임을 확증해준 자리였다. 낡은 엘리트주의는 그 어디에도 자리 잡을 수 없었다. 광장의 정치는 엘리트주의에 오염된 국회와 정당, 정치 시스템을 어떻게 혁신해야 할지 준엄한 숙제를 던졌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각종 도전과 시련을 딛고 새로운 단계로의 도약을 꿈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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