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프트파워’를 처음 개념화한 사람은 미국의 국제정치학자 조셉 나이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소프트파워는 설득과 공감, 생각의 지배 등을 통해 상대가 스스로 알아서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도록 하는 힘이다. 그에 대칭되는 것이 하드파워로서 조직력과 물리력처럼 상대 의사와 관계없이 강제할 수 있는 힘이다.

역사를 되돌아보면 소프트파워와 하드파워 중 어느 것이 우월한 지를 설명해 주는 장면이 매우 많다. 그 중 하나로서 중국 초한지의 두 주인공 항우와 유방의 접전을 꼽을 수 있다.

중국 역사상 최초로 통일제국을 건설한 진나라는 만리장성 축성 등 각종 무리한 공사를 벌린 결과 백성들의 원망을 사 급속히 쇠락하기 시작했다. 이 때 진나라를 멸망시키면서 천하를 다툰 두 사람이 항우와 유방이었다. 항우와 유방은 여러모로 대조적인 인물이었다. 항우는 군사력이라는 하드파워에 주로 의존한 데 반해 유방은 비전과 설득이라는 소프트파워에 주로 의존했다.

반진 세력의 상징적 대표였던 초나라 희왕은 진나라 수도인 함양을 먼저 점령하는 사람을 관중왕으로 삼겠다고 약속했다. 항우와 유방이 함양 점령을 두고 경쟁을 벌이게 되었다. 군사력으로 보면 유방은 항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런데 함양을 먼저 점령한 것은 항우가 아니라 유방이었다.

항우는 시종 진나라 성을 힘으로 제압하려 했다. 진나라 성을 굴복시킨 다음에는 보복으로 항복한 사람들을 생매장하기도 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다음 성 사람들은 결사적으로 싸웠다. 항우의 군대는 진격하는 데 오랜 시간이 결릴 수밖에 없었다. 반면 유방은 진나라 성을 만나면 잘 설득해서 싸우지 않고 자기편으로 만들었다. 유방은 빠르게 진격할 수 있었고 항복한 진나라 군대를 받아들여 군대 규모를 키워갈 수 있었다. 유방이 항우보다 먼저 함양을 점령할 수 있었던 이유이다.

유방이 먼저 함양을 점령했음에도 불구하고 항우는 군사력의 절대 우위를 바탕으로 쿠데타를 단행했다. 그런 다음 유방을 지금의 쓰촨성에 해당하는 파촉 땅으로 몰아넣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유방은 핵심 참모인 장량의 안내에 따라 지주 계급의 중간착취를 최소화하는 새로운 왕국 건설을 비전으로 제시했다. 민심이 유방에게 쏠리면서 뛰어난 인재들이 그의 휘하로 몰려들었다. 결국 유방은 막강한 군사력을 자랑하던 항우를 제압하고 최종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항우와 유방의 접전에서 알 수 있듯이 하드파워에 집착하면서 소프트파워를 경시하거나 잘못 판단하면 참혹한 결과를 빚기 쉽다. 한국현대사는 그와 관련된 다양한 사례를 보여준다. 그 대표적인 경우로서 한국전쟁을 들 수 있다.

한국전쟁의 발발 원인은 오랫동안 논쟁의 영역에 속해 있었다. 하지만 1990년대 중반 이후 관련 자료들이 공개되면서 북한의 무력통일 시도로 촉발되었다는 사실 만큼은 매우 분명해졌다고 볼 수 있다.

북한이 무력통일을 시도하게 된 결정적 근거는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기만 하면 20만에 이르는 남로당 정예조직을 중심으로 남한 민중이 봉기로 응답할 것’이라는 박헌영의 주장이었다. 군사력으로 서울을 점령하는 하드파워 해법에 남한 민중의 자발적인 봉기 단행이라는 소프트파워 해법을 결합시킨 것이다. 하지만 소프트파워 영역에서 북한의 예상은 완전 빗나가고 말았다.

먼저 남한 민중은 대체로 무력통일 자체를 반기지 않는 입장이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인 1950년 5월 30일 2차 국회의원 선거가 있었다. 당시 헌법 체계에 따르면 대통령은 국회에서 선출하도록 되어 있었고 임기 또한 2년이었다. 5․30선거 결과를 바탕으로 국회에서 대통령을 다시 선출해야 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5․30선거 결과에 따르면 이승만을 지지하는 세력은 대한국민당 24석, 국민회 14석을 포함하여 최대한 모은다 해도 57석을 넘지 않았다. 게다가 함께 단독정부를 추진했던 민주국민당마저 야당으로 탈바꿈해 이승만과 대립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정상적으로 대통령 선거가 진행되었다면 이승만이 실각될 가능성이 절대적이었다. 이승만의 실각과 함께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면서 남북협상을 통한 평화통일을 추진할 가능성이 매우 높은 상황이었다. 그것이 당시 민심의 요구이기도 했다. 한국전쟁은 이러한 민심을 완전 거역한 것이었다. 평화통일 가능성은 일소되었고 위기에 몰렸던 이승만은 극적으로 생환했다. 북한이 기대했던 민중봉기는 일어나지 않았다. 거꾸로 한국전쟁을 거치며 남과 북 사이에 불신과 적대감이 극에 달하고 말았다. 한국전쟁은 애초의 목표와는 정반대로 분단을 장기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하드파워를 과신하고 소프트파워 영역을 경시하는 착오는 언제든지 재발될 수 있다. 지금의 한국 정치 또한 그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최근 치러진 당 대표 선거에서 새누리는 친박이, 더민주는 친문이 압도적 조직력을 과시하며 승리를 거머쥐었다. 조직력은 하드파워 영역이다. 하드파워 영역에서는 친박과 친문이 절대 우위를 점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현대 정치는 하드웨어보다는 메시지, 이미지 등 소프트파워가 지배하고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친박과 친문 모두 약점을 드러내고 있다. 문재인의 경우도 지지율에서 부동의 1위를 달리고 있으나 강력한 소프트파워를 장착한 주자에 의해 언제 추월될지 모르는 상황이다.

2017년 대선 판을 좌우할 강력한 소프트파워는 어느 지점에서 만들어질 수 있을까? 분명한 것은 여야 대선 주자들이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정치적 상상력이 현상 속에 갇혀 있는 한 그러한 소프트파워는 확보될 수 없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