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살기>는 ‘같이 사는 가치 있는 삶’이라는 의미로, 필자가 신정동 청년협동조합형 공공주택 에 살면서 일어난 여러 가지 일을 다룬 일기 같은 칼럼입니다. 칼럼 <가치살기>는 새사연 홈페이지에 월 1회 게재될 예정입니다. (필자 주)

 

서울살이 13년 차

나는 창원에서 올라와 서울에 13년째 거주하고 있는 서른세 살의 비혼 여성이다. 어디 가면 절대 하지 않는 나이까지 포함한 자기소개로 이 글을 시작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산다는 것’은, 개인을 둘러싼 사회적 조건에 따라 너무나도 다양한 모습을 띄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앞으로 진행될 이 글이 30대, 非서울출신, 現서울거주, 미혼, 여성, 낮은 소득 분위로 분류되는 내 위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자기소개를 통해 미리 말해둔다.

서울살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 나는 안정된 주거가 첫 번째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백수일 때에도 내 한 몸 뉘일 집과 인터넷이 있어 그럭저럭 견딜 수 있었다. 하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서울에서의 주거는 내 집이 아닌 이상 내 의사와 상관없이 언제든지 ‘이동’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동반한다. 월세일 경우 ‘내가 과연 이 월세를 꾸준히 내고 살 수 있을까’, ‘이렇게 매달 집 주인 좋은 일만 시키다가 언제 돈 모으나’ 하는 걱정을 안고 살기 마련이며, 운 좋게 전세로 들어가도 2년 마다 집 주인이 돈을 얼마나 올려달라고 할지, 갑작스레 월세전환을 요구하지는 않을지 늘 노심초사 해야만 하는 입장이다.

나의 경우는 후자였다. 서울살이 13년 동안 2천만원 전세는 두 배로 뛰었고, 3년 전에는 전세자금 5천5백만원으로도 조건에 맞는 집을 겨우 찾아 들어갈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하지만 계약이 만료되기 몇 달 전부터 계약 갱신에 대한 두려움이 다시 나를 찾아왔다. 집주인이 나의 계약날짜를 잊어 자동으로 연장이 되기를 간절히 바랐으나, 집주인은 계약이 갱신되는 날짜를 귀신같이 기억하고 있었다. 다행히도 전세금을 5백만원 올리는 것으로 그 해 계약은 갱신되었지만 안도감도 잠시, 어느 덧 1년이 훌쩍 지나고 두 번째 계약 갱신 기간이 다가왔다. 그 사이 집주인도 바뀌어 난 2년 전에 했던 전세값 상승 혹은 월세전환의 공포를 또 느껴야만 했다. 이것이 내가 ‘양천구 신정동 청년협동조합형 공공주택’에 지원하게 된 이유이다.

신정동 청년협동조합형 공공주택은 공공임대주택 조건에서 배제되었던 청년을 위한 대안으로 양천구와 SH공사가 함께 진행하는 청년협동조합형 공공주택이다. 신정동에 총 3필지 51호로 구성되어 있으며, 시중 가격보다 절반 이하로 공급한다. 입주신청 자격은 서울에 거주하는 만 19세에서 35세인 무주택 1인 청년 가구로, 도시근로자 월평균소득 70% 이하(3371,666), 부동산 가액 합산 5,000만원 이하, 자동차가액 2,200만원 이하면 누구나 신청 가능하다. 가장 큰 특징은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삶을 지향하는 입주자들의 주거공간이 있으며 입주자들이 자발적으로 관리협동조합을 설립하여 스스로 주택을 관리한다는 것이다.

위의 글은 서울특별시 SH공사 블로그에 게재된 신정동 청년협동조합형 공공주택 지원 자격이다. 난 운 좋게도 1순위인 양천구에 살고 있었고 심지어 협동조합 주택은 기존 살고 있는 집에서 도보 15분 거리라 생활권도 크게 바뀌지 않았다. 비영리단체에서 주는 월급은 SH가 요구하는 기준을 충족하고도 남았으니, 나의 결단만이 남아있었다. 결혼하기 전까지 그 집에서 살면 얼마나 오래 살거라고 이사비용 및 세탁기, 냉장고 등 각종 가전제품 비용을 들여 이사를 하나 싶기도 했지만, 사실 내가 빠른 시간 안에 결혼할거라는 것은 근거 없는 우리 엄마 생각이고, 난 언제 할지 모르는 결혼을 고려하는 것보단 오늘 돈을 더 쓰더라도 당장에 닥친 주거의 불안정이 주는 공포에서 벗어나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래서 지원했고, 각종 서류 심사와 면접 등을 거쳐 마침내 합격했다. 그리고 50명의 다른 입주예정자들과 첫 모임을 가지게 되었다.

 

우리는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입주가 발표된 이후의 입주 과정은 다음과 같다.

최종 입주자 발표 – 1차 모임(서로 인사하고 과업별 팀 나누기) – 2차 모임(동 호수 배정) – 3차 모임(임원 선출, 정관 설명 및 논의, 정관 확정) – 창립총회 (임원 및 정관 의결, 입주자 주도 프로그램) – 4차 모임(공동체 갈등프로그램, 내부 주택 관리 규약 만들기) – 집들이

1차 모임에서 우리는 서로 둘러 앉아 자기소개 및 지원 동기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나는 지원동기로 주거불안정을 들었는데,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지원동기 및 기대하는 것에 ‘친구’라고 말했다. 조금 당황스러웠다. 감정을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관계가 생긴다는 것은 나에게는 예상하지 못한 부담이었다. 대학교 및 직장에서 과도한 친분을 형성 했다가 서로의 기대치에 부합하지 않아 관계가 어그러진 과거를 집에서까지 재연하고 싶지는 않았다. 집은 온전히 외부의 방해 없이 쉬는 공간인데, 그 영역에 친구라는 것이 들어온다니 (그것도 정말 가까이에 사는) 순간 집에서 브래지어를 하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기대한 것은 과거 경험한 외국의 하우스메이트같이 예의와 규칙 속에서 ‘정’이 문제가 되지 않는 그런 관계였다. 친구는 내 예상 밖이었다.

자기소개를 한 뒤 우리의 다음 단계는 집을 선택하는 것이었다. 신정동 협동조합의 특징 중에 하나는 3개의 건물에 각기 다른 특징을 가진 방 51칸이 있는 것이다. 나는 누구나 살고 싶어할만한 가장 크고, 학교 쪽으로 큰 창이 난 방을 원했기에 초조했다. 원하는 집을 1순위, 2순위로 기입하여 추첨하는 방식이라 모두가 라이벌이었다. 경쟁자는 줄어드는 것이 좋으니까, 가능하다면 다른 사람들이 그 방이 좋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길 바랐다. 그래서 방을 볼 수 있는 날짜가 평일로 한정되었을 때 내심 기뻐하기도 했다. 각 방의 정보를 많은 사람들이 모를수록 나에게 더 유리하니까 말이다.

그런데 갑자기 예상치도 못한 일이 일어났다. 우리 과업 별 팀원들이 들어가 있는 대화방에서 팀장이 각 방의 사진을 공유한 것이다. 내가 원했던 정보의 불평등은 없어지고 모두가 유사한 수준의 자료를 가지고 방을 선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심지어 다른 팀 대화방에서는 전체 방의 동영상이 공유되고, 파일 제공자는 자신이 느낀 각 방의 장점과 단점까지 친절하게 설명했다는 소식도 들렸다.

순간 미소가 지어졌다. 그리고 안내문에서 내가 속한 집단의 이름을 다시 한 번 읽어보았다.

‘협동조합형 공공주택’

협동조합형 공공주택은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삶을 지향하는 입주자들의 주거공간으로 입주자들이 자발적으로 공동체를 형성하고, 관리협동조합을 설립하여 스스로 주택과 공용시설을 관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설명되어 있었다.

나는 냉소적이고 교만하다. 그리고 과거의 경험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기존의 내가 가진 생각과 방식은 이기적인 현대 서울에서 살아가기에는 유리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신정동에서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은 기존의 방식이 아니라 호혜와 협동의 마음을 기반으로 서로 돕고 모두가 잘 살 수 있는 방식인 것이다.

문득, 내가 여기서 친구를 사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같이 거주하는 50명이 먼저 보여준 선의에 의해 내가 살면서 누적해 온 삶의 편견이 조금이나마 무너진 것이다. 갑자기 사는 것이 기대되기 시작했다.

#. 참고로 나는 2순위로 원하는 방에 선정되었다. 내가 가장 원했던 가장 크고, 학교 앞으로 창문이 시원하게 나있는 집은 아니지만, 나름의 장점을 가진 집이다. 선정하는 자리에서 우리는 한 마음으로 모두가 원하는 방에서 살 수 있게 되길 바랐고, 아낌없는 박수를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