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이든 국가든 시시 때때로 위기를 맞이한다. 그 위기에 어떻게 대응하는가에 따라 이후 운명이 판이하게 달라진다. 혹자는 위기에 짓눌려 몰락하기도 한다. 혹자는 위기를 반전과 도약의 기회로 삼기도 한다. 여기서 작용하는 것이 바로 ‘역발상 지혜’이다. 인류 역사는 그와 관련된 다양한 사례를 전해준다.

카르타고의 멸망을 불러온 역발상의 귀재 스키피오

기원전 3세기 지중해를 사이에 두고 있던 카르타고와 로마가 세 차례에 걸쳐 격돌한 포에니 전쟁이 발발했다. 1차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는 하밀카르 장군의 선전에도 불구하고 공을 시기한 원로원 의원들의 보급 중단으로 참패하고 말았다. 2차 포에니 전쟁을 주도한 것은 하밀카르 장군의 아들 한니발이었다.

한니발은 요즘의 전차 기능을 하는 코끼리 부대를 앞세워 속주인 스페인을 거쳐 눈과 빙하로 가득 덮인 알프스 산맥을 넘었다. 이후 한니발은 로마 군대를 연파하면서 궁지에 몰아넣었다. 기원전 216년 8월 2일 치러진 칸나이 전투에서는 5만 명 가까운 로마군이 몰살당하기도 했다.

로마가 운명의 기로에 서 있던 바로 그 순간 한니발에 대적할 뛰어난 명장이 등장했다. 젊은 스키피오가 바로 그였다. 스키피오는 한니발이 이탈리아 반도에 머물고 있는 틈을 이용해 카르타고로 쳐들어갔다. 방어에서 적 후방 타격으로 발상을 전환한 것이다. 불의의 역습을 당한 카르타고는 갈팡질팡했다. 카르타고 원로원은 로마에 굴욕적인 협상을 제안했다. 결국 휴전이 이루어졌고 한니발은 단 한 번의 전투에서 패배한 적이 없는데도 패장 신세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가야 했다.

3차 포에니 전쟁에서도 스키피오는 상대 전술을 역으로 이용해 승리를 거두었다. 포에니 전쟁은 최종적으로 로마의 승리로 끝났고 카르타고는 지구상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카르타고가 지배하던 지중해 서쪽 해역은 모두 로마 영향 아래로 들어갔다. 로마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역발상 지혜로 극복함으로써 크게 비상할 수 있었다.

방어에서 포위로, 스탈린그라드 전투

다음으로 인류 역사상 가장 참혹한 전투로 알려진 2차 세계대전 때의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살펴보자.

독일의 히틀러 입장에서 볼 때 볼가강 하구에 위치해 있는 소련의 도시 스탈린그라드는 코카서스 유전 지대로의 안전한 진출을 보장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스탈린의 이름이 붙은 도시를 점령함에 따른 상당한 심리적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곳이었다. 히틀러는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총력을 기울였고 마찬가지 이유로 소련 역시 스탈린그라드 방어를 위해 사력을 다했다. 인간의 상상을 불허하는 참혹한 시가전 끝에 독일군이 소련군을 제압하면서 시가지의 90퍼센트를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독일군이 승리를 눈앞에 두고 있었던 바로 그 순간 위기를 기회로 전환시키는 역발상 지혜가 전투의 운명을 갈랐다. 시 외곽으로 밀린 소련군은 시내로 진주한 독일군을 포위한 뒤 보급로를 차단했다. 방어에서 포위로 발상을 전환한 것이다. 독일군은 결사적으로 저항했으나 보급이 끊긴 상태에서 혹한의 겨울이 닥치자 결국 항복하고 말았다. 막대한 희생을 치르며 점령한 지역이 죽음의 함정이 된 것이다.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소련군이 독일군에 대해 대반격을 가하는 전기가 되었다. 공세로 전환한 소련은 최종 승자가 되었다. 참고로 항복한 독일군 포로 9만 명중에서 5만 명은 포로수용소에서 티푸스로 사망했고 일부는 중앙아시아로 가던 도중 사망했으며 최종적으로 귀국한 병사는 5000명에 불과했다. 이후 전투가 진행된 지역을 발굴하자 독일군 14만 7200명, 소련군 4만 6700명의 사체가 발견되었다.

같은 갈등, 다른 해법 : 페리프로세스와 사드배치

가까운 한국 현대사에서도 역발상 지혜를 통해 위기를 호기로 반전시킨 사례를 찾아볼 수 있디.

1998년 미국이 금창리 지하에 핵 시설이 있다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는 와중에 북한이 장거리 로켓을 발사하였다. 서방 세계에서는 대포동 장거리 미사일을 시험 발사한 것으로 표현했다. 북미 관계는 극도로 악화되었다. 바로 그 때 1998년 초에 출범한 김대중 정부는 당시 위기 상황을 호기로 판단하였다.

김대중 정부의 대북정책 총괄 기획자인 임동원은 클린턴 행정부가 대북정책 조정관으로 임명한 윌리엄 페리를 아홉 차례나 만나면서 집요하게 설득했다. 그 과정에서 임동원은 ‘포괄적 접근을 통한 대북 포용 정책’을 미국 측에 제시하였다. 즉 북한의 핵미사일 문제 해결과 한반도 냉전 체제 해체를 함께 추진하는 방향에서 미국 스스로 줄 것은 주고, 받을 것은 받는 ‘빅딜’에 나서도록 유도한 것이다. 달리 뾰족한 수가 없었던 미국의 클린턴 행정부는 김대중 정부의 제안을 적극 수용하였다.

1999년 10월 페리는 북한 문제에 대한 포괄적 해법을 담은 ‘페리 프로세스’를 제출하였다. 클린턴 행정부의 대북 정책 골간을 담은 페리 프로세스 내용은 김대중 정부가 제시한 내용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작성자인 페리 자신은 이를 두고 ‘임동원 프로세스’로 표현하기도 하였다.

클린턴 행정부가 협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것으로 가닥을 잡자 북미협상을 최종 목표로 삼았던 북한은 적극 호응하고 나섰다. 그에 따라 빠른 속도로 현안 문제들이 해결되어 갔다. 금창리 지하 시설은 현지 방문 결과 핵 시설이 아닌 것이 판명되었고, 북한은 장거리 로켓 발사 실험을 유예하기로 하였다. 더불어 2000년 하반기 북한의 조명록 특사와 미국의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이 상호 교환 방문을 통해 관계개선을 천명하는 북미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북미 관계 개선 흐름은 부시정권 등장으로 암초에 부딪치고 말았으나 남북관계 변화에 긍정적 영향을 미쳤다.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되었고 이를 계기로 얼어붙었던 한반도에도 훈풍이 불기 시작했다.

박근혜 정부는 북핵 위기에 대한 대응책으로 사드 배치를 추진하고 있다. 이를 둘러싸고 찬반양론이 맞서고 있으나 북핵 위기를 해소시키는데 기여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무엇보다도 중국이 강하게 반발하면서 북핵 공조 체계에서 이탈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자칫 북핵 위기가 더욱 심화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위기를 호기로 전환시키는 역발상 지혜와는 거리가 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