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클리펀치(491) 더불어 숲

위클리펀치(491) 더불어 숲

By | 2016-01-27T10:00:37+00:00 2016.01.26.|

#.1
얼마 전 작고한 신영복 교수의 호는 쇠귀이다. 친분이 없는 탓에 쇠귀가 무엇을 뜻하는지, 흔히 알려진 그것인지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쇠귀에 경 읽기’라는 속담처럼 ‘소의 귀’라는 의미라면 학자로서 겸손의 지극함을 보이면서 한편으로 듣는 이의 입가에 미소를 머금게 하는 좋은 이름이라 여겨진다. 경제학자였던 고인은 서예에도 달통하여 ‘쇠귀체’를 남겼다. 일반에게는 소주 브랜드의 글씨체로 유명한 그것이다. 붓이라고는 수십 년 전 초등학교 미술시간에 잡아본 것이 마지막인 서예의 문외한이 보기에도 공력이 느껴지는 글씨체인데 한글의 자연스런 멋을 살리면서 한자와 섞어 써도 어색하지 않다는 호평을 듣고 있다.

더불어 숲. 쇠귀체로 쓰인 문구 중 일반에게 익숙한 또 다른 하나인데, 고인의 수필집 제목이기도 하다. 부제는 ‘나무가 나무에게 말했습니다. 우리 더불어 숲이 되어 지키자.’ 쇠귀체가 아름다운 이유를 이보다 더 잘 설명하기도 어렵다고 느껴진다. 서예의 가장 중요한 덕목의 하나는 관계이다. 획과 획이 모여 글자를 이루고, 글자와 글자가 어울려 행을 이루고, 행과 행이 엮여 하나의 연을 이루는 것이니 그 무엇보다 관계가 우선이라는 것이다. 그 관계가 조화로울수록 보기 좋은 글씨가 될 것이고 그것으로 좋은 내용의 글을 쓴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혹은, 맥루한의 이론을 응용해 보자면, 아름다운 글씨이기에 좋은 내용이 쓰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2
서울시 사회적경제과에 근무하는 한 지인이 SNS에 다음과 같은 한탄을 올렸다. “거버넌스(Governance)란 무엇이란 말인가! 적당한 우리말이 없어 안타깝다!” 사회적경제나 마을공동체 분야에서 오래 전부터 많은 관심을 받은 주제인 거버넌스는 흔히 ‘협치(協治)’라고 번역된다. 희미한 기억을 더듬어 보면 도시계획이나 행정 분야에서 자주 회자되기 시작했던 20여 년 전에는 지배구조라는 식의 생뚱맞은 해석도 있었던 것 같은데, 그에 비해 현재는 어느 정도 바르게 개념이 잡혔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지인의 한탄처럼 그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해 느껴지는 허전함과 불만족은 여전하다.

한탄에 대한 응답들은 대체로 이런 것이다. “보통 협치라고 하는데 느낌이 덜하니, 더 좋은 표현이 있을까?” “민관협력이면 충분하다” “어느 지역에선가 다함께 어울린다는 의미로 ‘다울’이라고 하던데, 어울림의 의미를 담는 신조어를 만들어 볼까?” “더불어 행정 어떨까?” 지인의 지인이란 한정된 범위에서 나온 의견이지만 일반인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여겨진다. 여기에서 공통되는 개념은 ‘협’, 우리말로는 ‘더불어 함’이다. 즉 협치라는 말이 충분하지 않게 여겨지는 것은 협이 아니라 ‘치’라는 개념이 적절치 않아서 일 것이다. 예전에 지배구조라고 이해하던 것이 생뚱맞았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주류 학자들은 거버넌스를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행위자들의 외부권위 또는 내부의 자기조절 기제에 의한 조정과 관리’라고 정의하는 경우가 많다. 여기에서 ‘조정과 관리’가 ‘치’와 같은 것이라 한다면 ‘외부권위 또는 자기조절’이 ‘협’에 해당한다. 상투적인 표현 중에 ‘권력은 나눌 수 없다.’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권력의 속성 중 집중을 빗댄다. 이에 반하여 권력을 조직의 수장에게 집중시키는 것이 아니라 외부행위자와 내부구성원에게 나누는 것이 거버넌스에 대한주류의 해석이다. 하지만 이는 보수적 관점으로 ‘협치’라는 단어가 놓치고 있는 그 무엇인가를 충분히 고려하지 못하고 있다고 느껴진다. 아무리 수식하더라도 ‘치’는 ‘치’일뿐 다른 무엇이기 어렵기 때문이다.

‘치’ 즉 다스림이라는 개념에 집착하는 이유는 보수진영에서 거버넌스를 주장하는 배경에서 찾아볼 수 있다. 거버넌스가 필요한 이유는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공공의 능력에 한계가 있고 심지어 주권자들을 대신해야 하는 자신들의 소임을 다하지 못하고 부정을 저지르거나 복지부동하게 되는 정부의 실패가 발생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올바른 다스림을 위해서 정부뿐만 아니라 시장의 주체들에게도 권력을 나누어주어야 한다는 것이 요지이다. ‘민영화’ 또는 ‘공기업 선진화’ 등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주장이다. 이런 주장이 요구하는 것이 결국 공공자원의 배분에 대한 권력을 이양하라는 것이기 때문에 ‘치’라는 것을 거버넌스의 중심에 둘 수밖에 없다.

#.3
공공이 권력을 독점하지 말고 나누라는 주장에 더욱 부합하는 것은 ‘분권과 자치’라는 용어이다. 현대에 적합한 ‘치’는 권력을 나누는 것이라는 주장에 반대할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나누자는 것이니 ‘더불어’ 한다는 것과 결이 다른 의미이다. 또한 보수적 개념의 거버넌스는 정부 대신 자본이 ‘치’의 주체인 또 다른 거번먼트(Government)일 뿐이다. 이래서야 새로운 용어를 쓰는 보람이 없다.

주류, 비주류를 떠나서 대의제에 바탕을 둔 ‘치’의 한계가 도래하고 있다는 것에 이견이 없을 것이다. 정부실패 또한 그 중 하나이다. 이의 극복방안 중 한 축이 ‘분권과 자치’이며 또 다른 한 축이 ‘거버넌스’일 것이다. 전자는 거번먼트의 새로운 형태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후자는 거번먼트로 다루지 못하는 영역에 대한 것, 즉 대의제로 달성하기 어려운 문제를 다루는 새로운 방안이어야 한다.

대의제는 공공의제 중에서 대표적인 것을 우선하여 다루는 것이다. 한정된 공공재원을 어디에 우선적으로 배분할 것인지를 누가 결정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다수결을 통해 답을 내놓는 것이 대의제이다. 주권자의 대표를 민주적 절차에 따라 선출하여 대표성을 부여하는 것이 대의제의 기본구조이다.

문제는 ‘대표성’이라는 것은 경합적인 것이지 통합적이거나 포괄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누군가가 대표가 되면 누군가는 대표의 자리에서 물러서야 한다. 대표는 항상 소수일 뿐이며 심지어 그들이 대표하는 생각이 항상 다수를 대변하는 것도 아니며 공공성을 띤다는 보장 또한 없다. 이로 인해 나타나는 현상이 좁게는 행정적 공백, 크게는 정책적 소외이다. 대표성을 추구하는 대의제의 일반적인 한계이다. 이를 분권과 자치로 어느 정도 완화할 수는 있지만 완전히 해소할 수는 없다. 거버넌스는 이런 한계를 보완하는 개념이어야 한다. ‘협’, ‘더불어 함’에서 출발하는 주권자의 응답일 것이다.

성공적이라 평가되는 거버넌스의 특성을 살펴보면 공통적으로 열린 구조를 지향한다. 사회구성원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대표’가 아닌 ‘당사자’가 지닌 의제를 직접 논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행정이 미처 포괄하지 못하는 당사자의 의제를 다루는 것, 즉 대표성이 아니라 당사자들이 지니는 문제의 해결에 대한 ‘적합성’을 다루는 것이 거버넌스의 성공을 가르는 요소이다. 공공의 예산을 두고 경쟁하는 ‘치’에 치중하는 것이 아니라 당사자들이 서로 귀 기울이고 해결책을 같이 고민하는 ‘협’을 구현하는 것이 거버넌스의 본질일 것이다.

거버넌스를 구축한다고 하면서 공무원, 의원, 시민단체대표, 주민대표들을 한데 모으고는 정작 일반주민들은 배제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런 모습은 ‘협치’라 일컬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진정한 거버넌스라 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대표성만 강조되고 ‘더불어 한다’는 의미를 제대로 살리지 못한다면 마음 한 구석의 허전함을 채울 수 없을 것이다. 故신영복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더불어 숲을 이루는 것에서 답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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