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까지 침투한 레드 컴플렉스

“김일성의 주체사상을 우리 아이들이 배우고 있습니다” .

앞뒤도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어안이 벙벙한 문장입니다. 그러나 새누리당이 길거리에 걸어 놓은 플래카드의 글귀라는 걸 알고 나면 숨은 의도를 금방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현행 교과서에 문제가 많으니 국가가 직접 나서서 새로운 교과서를 만들겠다는 확고한 의지가 엿보입니다.

세계 여러 나라들의 역사교과서를 살펴보니 두드러지는 특징이 있습니다. 소위 ‘선진국’일수록 검인정 교과서나 자유 선택제를 실시하고, 특수한 배경을 지닌 몇몇 국가들만이 국정교과서를 사용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국정교과서를 채택하느냐 검·인정 교과서를 자유로이 선택하게 하느냐는 물론 각각의 철학에 대한 고민과 토론이 필요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박근혜 대통령은 마치 오래 전에 각본을 짜놓았던 것처럼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못박아 두고 모든 논란을 뒤로한 채 홀연히 미국으로 떠나버렸습니다. 더불어 기존 역사교과서에는 ‘좌편향’이라는 이념프레임이 씌워지게 됐습니다.

 

역사의 정치적 도구화

이에 야당은 장외로 나가고 비상대책회의를 준비하는 등 전 방위적인 반대투쟁을 준비하고 있는 형국입니다. 어떤 이는 사학법 반대투쟁을 했던 것처럼 ‘목숨을 걸으라’고 훈수까지 두고 있습니다. 견지하는 입장은 다르지만 여야 모두 어떤 면에서는 역사교과서 국정화라는 이슈를 정치적인 ‘도구’로서 이용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일전에 지인에게 한말이 있습니다. ‘정치가 국민의 의식성장을 가로막고 있다’는 말입니다. 창조의 시대, 인본의 시대에 들어섰음에도 국가가 국민에게 안겨주는 것은 신뢰와 안정감이 아닌 불안과 공포, 그리고 극심한 대립과 분노뿐입니다. 이번 국정교과서 사태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치적으로 손해 볼 게 없는 여야는 이념투쟁의 마당에 불나비처럼 뛰어들고, 애국시민들은 정치권이 자행하고 있는 민생경제의 파탄과 무책임함에 면죄부를 주고 있는 형국입니다.

 

국정교과서, 구태의 극치

국정교과서를 만들겠다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발상입니다. 관료의 지침에 의거하여 교과서를 편찬하는 일은 나라의 규모가 작고 엘리트가 부족한 시대에 한시적으로 적합합니다. 이는 이미 민주주의를 이룩해낸 대한민국의 국격에 맞지 않는, 그리고 자유와 다양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독선과 불통의 결과라고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국정교과서 편찬 강행은 대한민국의 역사와 정치 모두를 구태의 수렁에 빠뜨리는 처사입니다. 이러한 정치권의 행태가 혹 새로운 사회, 새로운 정치를 추구해야하는 시기에 대다수 국민들로 하여금 정치혐오증을 갖게 만들지는 않을까 염려가 앞섭니다.

 

때 아닌 이념 대립보다는 민생 먼저 돌보아야

국민들은 배고프고 피곤합니다.

역사에 대한 부분은 대한민국의 역사학자들의 사상적 신념과 학문적 구도(求道)에 맡기고, 정부는 민생 돌보기에 전념하길 바랍니다. 정부가 국민의 의식향상을 좀먹게 하는 정치적 불안을 야기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박근혜 정부는 국민을 장기판의 졸로 보는 소모적인 정치행위를 즉각 중단하고 올바른 기준을 찾아 국민을 위한 정치와 행정에 매진하기를 진정으로 촉구하는 바입니다.

 

2015년 10월 15일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이사장 정경진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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