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TV채널을 돌리다가 <어셈블리>라는 제목을 좌상단에 박은 드라마가 눈에 들어왔다. 요즘 정보기관에 의한 해킹이 이슈인지라 잠깐 공부한 적이 있는 컴퓨터언어가 먼저 떠올랐지만 이내 국회를 다룬 드라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검색해보니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정도전>을 집필한 작가가 극본을 맡은 것이었다.

드라마에서 날카로운 사회풍자나 비판을 찾아보기 어려운 시절이라 시큰둥한 맘에 봐서인지 꽤 어수선해 봬는 등장인물들의 동선, 상호관계, 갈등이 진부하다고 느껴졌다. 보좌관 출신인 작가는 재벌가의 막장드라마만큼 역동적이고 자극적인 국회의 뒷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지 모르겠지만, 그 판의 사람들이 어떤 일을 벌여도 별로 놀랍지가 않은 세상이니까. 이런 게 정치에 대한 무관심이거나 무감각일 것이고 지배계층이 대중에게 바라는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기득권의 바람과 달리 사람에게는 지겹도록 들은 옛 유행가도 반복해서 들을 수 있는 묘한 능력이 있다. 이미 결말이 빤한 정치이슈가 항상 1면을 장식하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결국 힘 있는 수구의 뜻대로 흘러가더라도 손쉽게 이기도록 놔둘 수는 없는 법. 지겨운 정치면을 눈에 불을 켜고 읽어 내려가는 이유이다. 그리고 이런 기사를 보면 새삼스럽게 실망감이 든다.

기사의 요지는 이렇다. ‘○○당이 혁신을 하겠다고 하는데, 그 구성원들이 정녕 혁신을 바라고 있는지 의문이다. 정당의 주류라는 사람들이 열심히 일하려는 소장파들에게 보이는 태도는 <그대, (내가 열심히 민주화운동 하던) 80년대에 뭐했나?>라는 식이다. 이런 형국이니 나온다는 혁신안이라는 것이 ’망국적 지역감정 극복‘을 위해 지역에서 비례대표를 뽑는 상향식 비례대표 공천을 하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지지받지 못하는 것이 <지역감정> 때문일까?’

작년 보궐선거 때부터 확실하게 느낀 거지만, 이 사람들 정말 현실감각을 잃었든가 주권자를 바보로 아는 것 같다. ‘80년대에 뭐 했니?’라고 묻는 것은 그나마 봐줄 수 있다. 물론 나는 그 당시 태어나지도 않았거나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상태였거나 코흘리개 학생이었지만 이 양반들이 그 당시 고생한 것은 사실이니 충분히 토닥여 줄 수 있다. 하지만 ‘우리를 찍지 않은 사람들은 지역감정에 휩싸인 것이다!’라는 인식은 ‘어르신들은 투표하지 말고 집에서 쉬세요.’의 리바이벌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있다면 이런 태도를 보일 수는 없다.

왜 지지를 받지 못하는지는 당연히 그들 스스로 반성하고 분석하고 통찰해야 할 일이지만, ‘답답하면 니들이 하든가’라는 격언도 있으니 ‘왜 그들은 지지받지 못할까’라는 것을 고민해 보았다. 먼저 드는 생각은 ‘나는 바보가 아니다. 나는 이 나라의 주권자이고 다른 주권자들과 다를 게 없다. 고로 이 나라의 주권자들은 바보가 아니다.’라는 것이다. 따라서 지역감정은 지지를 받지 못하는 원인일 수 없다. 지역감정을 다른 말로는 ‘묻지마 투표’라고도 하는데, 주권자는 바보가 아니기에 소중한 투표권을 진지하게, 뚜렷한 이유를 가지고 행사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를 부정하는 순간 우리에게는 해결책이 없다.나고 자란 곳을 바꿀 수는 없으니까. 이렇게 생각을 진전시켜보니 우리 주권자들은 다음과 같은 고민거리를 해결할 대안을 찾고 있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1. 내가 다른 사람보다 한 발이라도 앞서고 싶다

경쟁에 뒤처지면 살아남을 수 없는 세상에서 판단의 기본은 다른 사람을 이기겠다는 것일 것이다. 시대를 막론하고 지배권력이 민중에게 심으려는 가장 기본적인 사상이기도 하다. 일단 제대로 먹히면 지속적인 ‘분리통치’가 가능해진다.

  

2. 1억 원 투자했으니 한 달에 100만 원은 수익이 나야지

경쟁주의와 우리의 욕심이 만나면 자본주의가 발호한다. 모든 가치는 얼마나 많은 부를 불러오느냐로 회귀하며 그 과정을 반복하여 부가 부를 창출하도록 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라는 사상에 이른 것이 자본주의이다. 단순함이 매력인 이 사상은 불과 2백 년 만에 우리를 지배하여 신성불가침한 소유권 사상을 만들어 내었고 주거권, 노동권과 같은 기본적인 생존권을 가벼이 여기는 풍조가 만연하게 되었다. 최저임금이나 세입자 및 철거민 보호 등과 같은 이슈에 대한 주변의 여론과 태도를 살펴보면 심각성을 깨달을 수 있다.

 

3. 내가 너보다 못 난 게 무엇이냐

자본주의에 도덕적인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 중에 하나가 ‘능력 있는 사람이 더 대우 받아야 한다.’는 사상이다. 그리고 능력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만들어진 개념이 신성불가침한 ‘노력의 대가’이다. 능력이라는 것은 피나는 노력의 대가이므로 당연히 대접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일반적으로 퍼져 있다. 이런 생각이 정당한 것이 아니며 어두운 사회를 불러온다는 것을 수십 년 전 롤스로부터 얼마 전 샌델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환기시켰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4. 10층짜리 빌딩도 서고, 우리 마을 많이 발전했지

경쟁에는 패자가 뒤따른다. 모재벌기업의 모토처럼 ‘1등만 기억되기에’ 패자에게도 어떤 대가를 주지 않으면 사회가 유지될 수 없다. 술이나 오락거리로 세상을 지우기도 하지만 좀 더 효과적인 것은 화려함을 맛보게 하는 것이다. 세계 어디에 내놔도 뒤지지 않을 고층 빌딩들, OECD⋅G20 국가라는 자부심,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국내기업의 휴대폰과 LED TV, 아시아를 들끓게 하는 한류, 세계대회를 휩쓰는 스포츠스타들이 전쟁으로 잿더미가 되었던 가난했던 조국과 대비되면서 뿌듯함을 느끼게 된다. 이런 감정을 지배권력은 애국심이라고 포장하기도 하지만 애국은 잘났던 못났던 우리가 우리 스스로에게 느껴야 하는 민주주의를 위한 보편적 정서이지 화려함에 취한 우쭐함은 아닐 것이다.

화려함에 대한 찬미는 과거에 비해 발전된 오늘이라는 환상을 만들고 자본주의의 발전에 기묘하게 결합되어 있다. 산을 깎고 바다를 메우고 강을 파헤치며 콘크리트 포장을 하고 비효율적으로 높은 마천루를 세우는 이상한 행위에 뿌듯함을 느끼는 사이 우리의 부는 거대자본으로 흘러들어간다.

 

5. 달콤한 게 계속 먹고 싶다

아무리 ‘우리 삶은 화려하다’고 최면을 걸고 싶어도 우리들은 바보가 아니기에 부조리한 세상을 잊을 수 없다. 더군다나 경쟁의 끝에는 항상 고독과 소외감이 따른다. 이를 달래기 위해 다양하고 수많은 달콤함을 찾아 헤매게 되는데, 지긋지긋하게 여기에도 거대자본이 기호품, 명품, 멋진 자동차, 번듯한 아파트, 아이돌스타, 취미활동, 연애, 지적허영심 등등 이것저것 즐길 만한 것들을 제공하면서 돈을 뜯어간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고독과 소외감을 그나마 효과적으로 덜어줄 수 있는 것은 다른 사람과의 소통이다. 하지만 경쟁사회에서 경쟁상대인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기는 어렵다. 이런 딜레마로 인해 결국 페티쉬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처지가 되는 경우가 많다. 시쳇말로 덕후가 되는 것이다.

 

6. 기자 양반, 뭐 전공했어?

이명박 시장 시절 청계천복원에 대한 질문에 부시장이 던졌던 질문이다. 무례하고 뻔뻔하기까지 한 이런 질문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어쩔 수 없이 경쟁을 하고, 지친 마음을 달래기 위해 화려함과 달콤함에 취해도, 우리는 바보가 아니기에 사회가 잘 못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우리들이 현실을 타개할 방법을 갈구할 때 만만치 않은 지배권력은 좋은 스펙과 화려한 언변을 자랑하는 전문가들을 제공하면서 우리를 현혹시킨다. 엘리트들이 설파하는 권위에 따르라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를 이끌어 줄 리더로 여기며 유명인사에 홀리는 것도 잠시일 뿐 시간이 지나면 그들이 답이 아님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 우리가 곧 주권자이고 우리 스스로 해답을 찾고 세상을 바꿔 나가야 하는 것이지 누가 대신 해줄 수 없다.

주권자인 우리들은, 지배권력의 농간에 따라 위와 같은 곤란을 겪으며 판단에 어려움을 겪기도 하지만, 결국은 이런 상황 타개에 도움이 될 것인지 여부를 따지면서 투표권을 행사한다. 그런데 정치권이 주권자들의 고민인 경쟁주의, 자본주의, 능력주의, 개발주의, 엘리트주의와 이로 인한 고독감과 소외감을 해소하기 위해서 어떤 대안을 제시하였는지 의문이다. 오히려 선거철만 되면 개발과 선심성 공약을 내세우며 우리의 고민을 더 깊게 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노인들이 표를 주지 않는다면 노년의 분노와 허탈함을 보듬을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 것이다. 청년들의 투표율이 낮다면 그들의 아픔을 치유할 만한 방법을 마련하지 못한 것이다. 이치나 저치나 근본적인 해결책을 주지 않으니 조금이라도 마음이 가는 사람에게 표를 주는 것이 현재 상황이라고 여겨야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 주권자에게 책임을 묻고 폄훼하는 것이 2015년의 정치일 수는 없다.

2015년 현재 민주주의에 대한 주권자의 노력은 80년대 못지않다. 이에 공감하고 노력하지 않으면서 ‘80년대에 뭐했나’라는 질문을 해댄다면 당신들이 결국 지배권력의 한 축은 아닌지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할 것이다. 주권자를 연령과 지역 등으로 제멋대로 나누면서 타자로 인식하는 것은 특권의식에 젖어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래서는 앞으로도 제대로 된 답을 내기 힘들 것이다. 스스로 한 사람의 시민임을 자각하고 주권자 대중에 다가와 섞이며 같이 실천하고 행동하기를 바란다. 낡은 정치놀이는 그만하고. 지금은 1985년이 아니고 2015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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