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자 등문공 상

[孟子 滕文公上]>에 보면 맹자와 진상이 허행을 두고 나눈 흥미로운 대화가 실려 있다. 허행은 삼황오제 중 한 사람인 신농의 말씀을 따라 농가사상을 펼친 이로써 “왕을 포함한 모든 사람이 자신의 노동으로 자신의 생활을 유지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노동의 결과에 의한 잉여는 각자 노동자의 몫이라야 천하가 고루 공평하게 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농민 등 민초에 대한 봉건지주의 착취나 상인의 이윤추구를 배척하고 저항한 것이다.

진상은 원래 유학을 익히고 있었으나 허행의 사상에 심취하여 당대의 맹자에게 호기롭게 도전을 한다. “등 나라 임금이 어진 임금임에는 틀림없으나 도(道)를 들어보지는 못한 분입니다. 어진 이라면 백성들과 똑같이 경작해서 그것을 먹고 아침저녁 손수 밥을 지어가면서 나라를 다스리는 법인데, 지금 등에는 양곡 창고가 있고 재물 창고가 있으니, 이는 백성들을 갈취하여 자기 생활을 꾸려가는 것입니다. 그러고서야 어찌 어질다 할 수 있겠습니까.” 이에 맹자가 묻기를, “허행은 옷가지, 식기를 어찌 구하는가?” 진상이 답하기를, “손수 지은 농작물과 맞바꿉니다.” 이에 맹자가 다시 물으니, “옷가지, 식기는 왜 손수 만들지 않는가?” 진상은 “농사일이 바쁘니 세상 모든 일을 다 할 수는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라고 답한다. 꼬투리를 잡은 맹자, 진상을 몰아 부친다. “그렇다면 천하를 다스리는 일만은 밭갈이하면서 할 수 있다는 것인가. 대인이 하는 일이 따로 있고, 소인이 하는 일이 따로 있는 것이다…그러므로, ‘혹은 마음을 쓰기도 하고, 혹은 힘을 쓰기도 하는데, 마음을 쓰는 자는 남을 다스리고, 힘을 쓰는 자는 남에게 다스림을 받는다.’ 하였으니, 남의 다스림을 받는 자는 남을 먹여주고, 남을 다스리는 자는 남에게서 먹는 것이 천하의 공통된 원칙인 것이다…인간으로서 도리가 있는데…바로 부자 사이는 친(親)이 있고, 군신 사이는 의(義)가 있고, 부부 사이는 별(別)이 있고, 장유 사이는 서(序)가 있고, 붕우 사이는 신(信)이 있는 것이다….성인이 백성을 걱정함이 이러한데 어느 겨를에 손수 밭갈이를 하겠는가.” 그리고는 향후 수천 년 간 유학자들에게 인용되는 유명한 말을 덧붙인다. “나는 으슥한 골짝에서 나와 교목으로 옮겨간다고는 들었어도 교목에서 내려와 으슥한 골짝으로 들어간다고는 듣지 못했다네[吾聞出於幽谷遷于喬木者 未聞下喬木而入於幽谷者].” <시경> 소아(小雅) 벌목(伐木)에 “깊은 골짝으로부터 나와서, 높은 나무로 옮겨 가도다.[出自幽谷 遷于喬木]”라는 시구를 인용한 것으로써 ‘질 낮은 오랑캐의 언설에 놀아나서 어찌 고매한 유학을 버리느냐’는 의미이다. 허행을 따르는 것은 사상적 퇴보라는 것이다.

허행에 대한 비판은 계속된다. 진상이 “허행의 도를 따르면 저자의 물건 값이 일정하여, 나라 안에 속임수가 없어 비록 오척(五尺) 동자를 저자에 가게 하더라도 아무도 속이는 이가 없을 것입니다. 베와 비단이 길이가 같으면 값도 같고, 삼과 실, 생사와 솜이 무게가 같으면 값이 같고, 오곡(五穀)이 분량이 같으면 값이 같고, 신이 크기가 같으면 값이 같게 됩니다.”라고 하자, “물건이 서로 똑같지 않음은 물건의 자연스러운 실정이니, 혹은 값이 곱 또는 다섯 곱도 되고, 혹은 열 곱 또는 백 곱이 되고, 혹은 천 곱 또는 만 곱이 되기도 하거늘, 이것을 일률적으로 만들어 버리려고 하니 이는 천하를 어지럽게 만드는 일이라네. 큰(고급) 신 작은(저급) 신이 값이 같으면 큰 신을 누가 만들겠는가. 허행의 도를 따른다면 오히려 서로 속이는 일이 판을 칠 것이네.” 허행이 노동의 가치를 보호하기 위해 동일한 양의 물건 값을 일정하게 유지해야 한다고 하자 맹자는 가격은 품질에 따라 시장에서 형성되는 것이라고 반박한 것이다.

진상과 맹자의 대화를 통해서 이미 수천 년 전 사람들도 자급자족경제에서 시장경제로 이행함에 따른 부작용과 폐해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상업(자본)이 사회의 불평등을 심화시킨다는 인식도 보편적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사회경제적 강자가 약자를 수탈함에 따라 발생하는 불평등에 대한 문제제기에 대해서 유학자들이 ‘능력’에 따른 직분을 강조하면서 불평등이 당연하다고 대응하였는데 ‘능력 있는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어 마땅한 혜택을 누려야 한다.’는 신자유주의의 주장과 일맥상통한다.

사실 허행은 ‘노동의 가치’를 인정해야 한다고 한 것이지 모두가 농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아니다. 부모 잘 만나 귀족으로 태어났거나 돈이 많아서 무위도식하는 이들을 비판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허행의 주장이 당대 민초들에게 많은 지지를 얻을 수 있는 ‘위험한’ 사상이었기에 맹자가 말꼬리 잡듯이 강하게 반발한 것은 아닐까. 유학은 지배집단을 위한 힘 있는 자들의 명분이요 정치논리였으니까.

후대의 유학자 중에서는 맹자의 대응이 너무 야박했다고 생각하는 이도 있었던 듯하다. 백성을 굽어 살피는 왕도가 유가의 논리이니 지배계층의 수탈을 허행과 더불어 비판하면서 넉넉한 덕을 보여줄 여지가 있지 않았을까. 고려 말 유학자 이색은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 굽은 것 바로잡음도 너무 지나치면[矯枉或太過] / 이것이 곧 권형을 폐하는 행위라네[是爲廢權衡] / 근본을 힘쓰는 건 농사에 있으나[務本在農畝] / 임금 신하가 함께 농사를 짓는다면[君臣將幷耕] / 이 의리는 끝내 옳지 못한 것이라[此義竟不可] / 성현의 가르침이 매우 분명하였네[聖賢謨甚明] / 그러나 터럭은 가죽에 붙으나니[雖然毛附皮] / 삼가서 경중을 나누진 말아야 하리[愼勿分重輕] <목은집(牧隱集)>

‘다스려짐과 다스리는 것의 불평등(굽은 것)은 인정하지만 신분에 따른 직분도 분명하다. 하지만 만민은 한 몸(터럭은 가죽에 붙으나니), 다스리는 것이 다스려지는 것에 비해 더 중하다고 구별해서는 되겠는가(경중을 나누진 말자).’라는 의미일 것이다. 우리 사회가 공동으로 이룩한 부를 마치 자신들만의 재산으로 착각하는 이들, 일반 노동자의 수천 배의 이익을 챙기면서 ‘능력’에 따른 당연한 결과라고 뻐기는 이들이 되새겨봄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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