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란

미국의 인류학자인 머독은 전통적인 가족을 이렇게 정의한다. “가족은 공동 거주, 경제적 협동 및 출산을 특징으로 하는 사회집단이며, 이 집단은 양성의 성인들을 포함하고 적어도 그 중 두 사람은 사회적으로 허용되는 성관계를 유지한다. 그리고 한 명 또는 그 이상의 친자녀 혹은 입양된 자녀들로 구성된다.”

우리에게 익숙한 ‘혈연과 제도에 의해 규정된’ 가족의 개념이다. 최근 들어 무자녀 가정, 한부모 가정, 핵가족의 파편화로 인한 일인 가구의 증가 등으로 인해 끊임없이 새로운 형태의 가족들이 생겨나고 있지만 사람들이 ‘가족’이라는 단어를 통해 떠올리는 이미지는 여전히 부-모-자녀로 이루어져 있다. 군 생활 적응 여부와 상관없이 가족 형태만으로 장병을 걸러내어 낙인을 찍는 ‘관심사병제’ 문제부터, 이혼으로 인해 아이를 곁에서 돌보지 못했단 이유로 그 진정성마저 의심받아야 했던 세월호 유가족 김영오씨의 사례까지, 한국사회에서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는 계속해서 논란의 불씨를 지피고 있는 중이다.

여기, 이러한 통념들에 대해 “아빠는 꼭 있어야 돼?” “없으면 없는 대로 살면 안 돼?”라며 끊임없는 의문을 제기하는 영화가 한 편 있다. 바로 부지영 감독의 2008년 작,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이다. 본 영화는 이런 자잘한 물음들을 아우르는 동시에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큰 질문을 하나 던진다.

‘가족이란 과연 무엇인가?’

폭력으로 변모하는 정상가족 이데올로기

영화는 엄마의 죽음과 함께 시작된다. 이부 자매인 명은과 명주는 엄마의 장례식장에서 오랜만에 재회한다. 영화 속 가족은 엄마, 명은 명주, 명주가 기르는 딸 승아, 그리고 현아 이모로 구성되어 있다. 대를 걸쳐 아버지가 부재하는 가정이다. 자매는 두 사람 다 아버지가 없지만, 영화는 명주보다는 명은이의 아버지에 대한 상처와 상실감에 초점을 맞췄다. 명주와 달리 명은의 아버지는 그 존재 자체가 불분명하기 때문일 것이다. 명은은 아버지 없이 자란 아이라고 놀림을 받고, 아이들과 싸움을 하며 자란다. 훗날 잘 나가는 커리어 우먼이 된 이후에도 명은에게 아버지의 부재는 결정적인 콤플렉스이며 지울 수 없는 멍에다. 남자 목소리를 내는 이모, 아버지 없는 아이를 기어이 낳아 기르는 언니까지. 명은에게 있어 가족의 존재는 자신의 결함이자 결핍 그 자체였다.

명은이 자신의 가족에 대해 긍정적이지 않은 이유는 그 구성원들이 ‘정상 가족’의 범주에서 벗어나기 때문일 것이다. 그 후로 십여 년이 흐른 뒤, 명은의 언니 명주가 혼외 관계에서 얻은 딸인 승아 역시 명은과 비슷한 삶을 살아간다. 세월이 흘렀어도 한국사회는 여전히, ‘사생아’에게는 살아가기 힘든 곳이기 때문이리라. 명은과 승아의 상처는 편협한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에서 비롯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렇게 혈연 중심으로만 묶인 가족 개념은 그렇지 못한 가정의 구성원들에게는 명백한 폭력의 형태로 다가온다.

가족제도의 본령

영화의 후반부, 명은의 생부가 사실은 트렌스젠더인 현아 이모였다는 충격적인 사실이 밝혀진다. 아버지에게 버림받았다는 명은의 생각과는 다르게, 현아 이모(과거 현식)는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 나름의 방식으로 딸인 명은을 보살피고 사랑해왔던 것이다.

앞서 말했듯, 시간이 흘러 여러 가지 양태의 가족 구조들이 생겨났다고는 하나 한국 사회는 여전히 전통적인 가족, 혈연 중심의 가족만이 정상이란 프레임을 강조하며 아버지-어머니-자녀들로 구성된 형태 이외의 가족은 비정상으로 규정하고 소외시켜 버린다. 명은의 생물학적 아버지인 현식(현아 이모)이 명은의 부모로서 당당하게 살지 못하고 ‘이모’라는 애매한 역할로 살아가야 했던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여자의 모습을 한 ‘비정상적인’ 아버지가 되어 함께 사는 것보다, 차라리 명은을 아버지 없는 아이로 만드는 편이 딸이 덜 상처받는 길이 될 거라 여겼던 게 아닐까.

가족의 중요한 임무 중 하나는 우리가 특별하고 소중한 사람임을 서로에게 확신시키는 것이다. 개개인이 상실되고 소외받는 냉혹한 현대사회에서 위기에 몰린 사람들이 기댈 수 있고 위로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안식처는 다름 아닌 가족이다. 현아 이모는 앞서 말한 가족의 정서적 연결의 기능은 무리 없이 해낼 수 있는 성원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젠더와 가족 내에서의 역할이 상응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딸인 명은에게서, 동네에서, 더 나아가서는 한국 사회에서 제대로 된 가족의 구성원으로 인정받을 수 없었다.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를 만든 부지영 감독은 “어깨를 빌려주는 연대 커뮤니티로서의 가족 본령을 보여주고자 했다”면서 “힘들거나 어려울 때 기댈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 그게 가족의 본령”이라고 이야기한다. 이처럼 그녀가 영화를 통해 표현하고자 했던 가족이란 굳이 피로써 묶이지 않았어도, 기존 질서 속의 책임과 의무를 이행하지 않아도 충분히 긴밀하게 연결된 성원들의 집합이었을 것이리라 예상해본다.

영화 속, 생전의 엄마가 현아 이모에게 묻는다. “나중에 명은이가 알면 널 뭐라고 부르지?” 이에 현아 이모는 대답한다. “그게 뭐가 중요해.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한데.”

‘가족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서 부족함이 없는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있는 그대로도 완전한

그동안 그렇게도 싫어했던 이모가 자신의 아버지였다는 사실을 알고 펑펑 우는 명은에게 언니 명주는 이렇게 말한다.

“일찍 얘기 못해서 미안해. 나한텐 이모가 네 아빠가 아니라 그냥 이모였어.”

가족을 구성하는 데 있어 필수 불가결한 조건이 반드시 존재해야만 할까? 그 조건들을 만족하지 못한다면 가족이 아닌 게 되는 걸까? 함께 삶을 나누고, 서로를 포용하고, 정서적 유대감을 공유하며 살아가는 것, 그것만으로도 가족이 되기 위한 조건은 충분하지 않을까. 아빠가 아니어도, 진짜 이모가 아니어도, 현아 이모는 명주에게 언제나 부족함 없는 완전한 가족이었다.

정상가족은 공동의 거주, 경제적 협동, 배타적인 성관계, 공통의 문화를 특징으로 하지만, 그 특성이 현대가족 내에서 완벽히 충족되기는 힘들다. 현대 한국 사회에서 정상가족이란 이미 모래 위의 성처럼 허약하고 위태로운 개념이다. 지금까지의 가족이 혈연이라는 관습적·제도적 개념으로 여겨져 왔다면 앞으로의 가족은 ‘관계’라는 사회적 개념이 중심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현대 가족의 범위는 보다 넓고 유연한 것이어야 한다. 그것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졌든, 혹은 평등에 기반하는 것이든 간에 그들의 이름은 변함없이 가족이다. 한국 사회가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라고 말하는 그들을 그 모습 그대로 인정할 수 있는 성숙한 사회가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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