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사 마지막 순서에 ‘성찬의 전례’가 있다. 줄 서서 사제가 나눠주는 얇은 밀가루 빵을 받아먹는 순서다. 나는 “그레고리오”라는 세례명을 지닌 엄연한 신자지만 이 의식엔 참여할 수 없다. 고백성사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날라리 신자’라는 얘기다.
그러므로 그런 자가 경제학을 좀 안다고 해서 감히 “교황의 경제학” 운운하는 것은 불경일 테다. 하지만 생각이 바뀌었다. 교황께서 “유민이 아빠”의 손을 잡았을 때, 나도 뭔가 해야겠다는 생각이 솟구쳤다. 새사연은 공식 번역이 나오기 전에 “복음의 기쁨” 2장을 한국어로 가장 먼저 옮긴 바 있고, 더구나 이교도마저 사랑으로 감싸는 교황이 아닌가? 복음의 기쁨, 그리고 국내외에서 행한 강론들은 일관된 논리구조를 지니고 있다. 첫째는 당대의 사회구조에 맞서 형제애의 공동체(즉 연대의 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이번에 복자의 지위에 오른 순교자들은 조선후기의 봉건적 사회구조에 맞서, 사제 없이도 스스로 “연대의 공동체”를 만들어냈다. 교황은 그 행동이야말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일치시킨 것이라고 칭송했다. 즉 예수님의 뜻이라는 것이다. 또한 이는 우리 마음속의 “우리”를 되찾는 길이다(칼리에리 강론). 이것이 곧 공공선, 진보, 발전이다. 둘째, 그렇다면 현재의 사회구조는 어떠한가? 바로 “규제 없는 자본주의, 곧 새로운 독재”(복음의 기쁨)다. 이 사회는 여러 강론에서 “비인간적인 경제모델” “무한경쟁과 이기주의의 세계” “배제의 모델” “쓰고 버리는 문화” “죽음의 문화” 등으로 묘사됐다. 여기서부터 한국을 비롯해 전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정치적 분열, 경제적 불평등, 생태 파괴가 비롯됐다. 셋째, “자본의 세계화”는 전 지구적인 차원의 사회구조라고 할 수 있다. 교황은 자본의 세계화를 “연대의 세계화”로 바꾸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연대의 세계화는 모든 인류 가족의 전인적인 발전을 그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넷째, 이런 국내외의 사회구조 안에서 새로운 형태의 가난이 만들어지고 노동자와 가난한 사람들이 소외되고 있다. “새로운 가난”은 “새로운 독재”에 조응하는 말일 것이다. 생산력은 충분한데도 빈부격차가 극심해지면서 생긴 사회적 배제를 말한다. 다섯째, 하여 신자와 사제의 사명은 가난한 자의 편에서 당대의 사회구조와 맞서 싸우는 것이다. 특히 사제들은 거리로 나서야 한다.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사람은 착취나 노예, 그리고 다른 사회적 질병에 대해 공모하는 것이다. 침묵을 통해, 행동하지 않는 것을 통해, 무관심을 통해 우리들은 그것들과 공모하는 것”이다. 교황은 지난 5월9일 유엔 사무총장과의 만남에서 조금 더 구체적인 얘기를 했다. 개인과 국가, 국제의 모든 차원에서 우애와 연대의 정신이 과학적인 능력과 만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즉 우애의 정신에 입각해서 가장 효과적인 제도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국가 수준에서는 “경제적 수익을 국가가 합법적으로 재분배하고, 동시에 사적 부문과 시민사회가 불가결하게 협동”해야 한다. 교황은 정신적, 도덕적 운동과 동시에 국내외의 제도 개선을 촉구한 것이다.

우리 사회는 어떠한가? 재·보선에서 대승하자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3월 이래 잠시 미뤄뒀던 규제완화, 투자활성화의 칼을 뽑아들었다. 지난 8월12일의 “6차 투자활성화 대책”은 앞으로 “기업 맞춤형”으로 규제완화가 일어날 것임을 보여주었다. 교황은 연대와 공공선을, 대통령은 경쟁과 성장을 제도 개선의 지침으로 삼았다. 박 대통령에게 “규제는 없애야 할 암덩어리”인데 교황은 “규제 없는 자본주의는 독재”라고 정의했다. 교황의 말씀이 맞는다면 박 대통령의 숙원이 이뤄지는 순간 우리는 정치와 더불어 경제에서도 독재를 맞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대통령은 비록 예포와 예도라지만 대포와 칼로 교황을 영접한 것일까?*본 글은 경향신문에 기고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