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유럽에서는 여러 개의 지역화폐 실험이 진행되고 있다. 낙후된 지역경제를 살리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 지역화폐(Community Currencies)를 활성화한다는 목적을 가지고 유럽연합 지역발전기금(ERDP)이 출연한 돈은 총 400만 유로. 이 자금을 지원받아 영국·프랑스·네덜란드·벨기에 등 많은 유럽국가에서 다양한 방식과 형태의 지역화폐 시범사업이 이뤄지고 있다. 2년 전부터 유통되기 시작한 영국의 브리스톨파운드는 그들 중 가장 넓은 화폐공간을 가진 지역화페로, 최근에 가장 뜨고 있는 ‘스타’ 화폐다. 도심인구 43만 명. 외곽지역까지 합할 경우 100만 명이 넘는 인구가 살아가는 브리스톨 지역에서 새로운 화폐실험이 시작된 배경에는 몇몇 시민사회 운동가들의 무모해 보이기까지 한 도전정신이 숨겨져 있다.
현재 영국을 비롯해 유럽 각지에는 작은 공동체를 중심으로 운영되는 풀뿌리 지역화폐가 다수 존재한다. 현재까지 실험된 바에 따르면, 지역화폐는 호혜적 관계망이 살아 있는 곳에서는 어느 정도 작동되지만 이 영역을 넘어서게 될 경우 구매력이 저하된다는 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브리스톨의 지역 활동가들은 ‘지역화폐는 한정된 물리적 공간을 넘어설 수 없다’는 경험적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고 시 전체를 아우르는 지역화폐를 만들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세웠다. 기자는 브리스톨파운드 조사를 위해 지난 6월 24일부터 29일까지 브리스톨에서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종이돈을 매개수단으로 바라보던 기존 방식에서 탈피하여 전자화폐를 도입한다면 화폐공간을 확장할 수 있지 않을까. 사람들이 가장 염려하는 대목인 화폐 신뢰 문제(화폐를 쓸 곳이 없어서 가치가 사라져버리면 누가 책임질 것인가)는 발행한 액수만큼의 돈(법정화폐)을 금융기관에 예치해 두면 해결되지 않을까. 지역화폐의 구동 원리를 알고 있는 전문가들로부터 ‘쟤들이 살짝 미쳤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브리스톨의 지역 활동가들은 수백 번의 회의A를 거듭하면서 새로운 화폐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한 작업을 이어갔다.

혁신도시 브리스톨의 지역화폐 실험

이들은 오래 전부터 지역화폐를 연구해 온 신경제재단(New Economics Foundation)으로부터 조언을 받고, 뱅킹 시스템을 개발한 전문 기관을 탐색했다. 그리고 시스템 개발비용을 지원해 줄 자선단체를 찾아다니고, 지역화폐를 세금으로 받아줄 것을 시 정부에 청원하고, 지역신협(Bristol Credit-Union) 이사장을 만나 전자화폐 시스템을 운영해 줄 수 있는가를 타진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던가. 마침내 네덜란드의 온라인 뱅킹 시스템 개발회사로부터 시스템 개발을 돕겠다는 답변을 받고, 한 자선기관으로부터 시스템 개발에 소요되는 자금을 지원받는 데 성공했다. 또 새로 당선된 시장으로부터 적극적으로 돕겠다는 약속을 이끌어내고, 신협 이사들 간의 찬반토론 끝에 이사회에서 최종 승인을 받기에 이른다. 이러한 지원에 힘입어 지역화폐 프로젝트를 이끌던 핵심그룹은 우리나라의 사회적기업에 해당하는 공동체이익회사(CIC)를 설립, 화폐 사업을 본격적으로 실행하기 위한 준비 작업에 착수할 수 있었다. 이렇게 약 3년간에 걸친 운영시스템 구축 작업을 마무리하고 브리스톨시에 지역화폐가 모습을 나타낸 것이 2012년 9월이다. 브리스톨파운드(CIC)에서 일하다가 최근 신협으로 자리를 옮긴 마크 버튼(Mark Burton) 이사는 당시를 회상하며 “화폐 시스템이 개방되긴 했지만 지역화폐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 많은 사람들이 서로 눈치만 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시청이 브리스톨파운드로 세금을 받기로 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가맹점들이 빠르게 늘어나기 시작했다”라고 전했다. 지방정부가 앞장서서 지역화폐의 도입 및 정착 과정에 든든한 지지대 역할을 해준 것이다. 현재 브리스톨시는 브리스톨파운드(CIC)에 연간 5만 파운드의 지원금과 무료로 쓸 수 있는 사무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그리고 대표적 지방세라 할 수 있는 주민세를 지역화폐로 받기 위한 준비 작업에 착수한 상태다. 나아가 공공구매 대금 중 일부를 지역화폐로 지불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한다. 조지 퍼거슨(George Ferguson) 시장은 자신의 급여 전부를 브리스톨파운드로 받으며 지역화폐 사용을 독려하고 있다. 이쯤 되면 이상적인 민관 협치 모델을 구현해가고 있다고 평가해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 브리스톨파운드는 지폐, 온라인 결제, 이동통신기기를 활용한 문자서비스(SMS)의 세 가지 결제방식을 적용하고 있다.

종이화폐는 모두 네 종류가 발행, 유통되고 있으며 2015년 말까지를 사용기한으로 정해놓고 있다(이 시점에 화폐 재발행 여부를 결정하겠다는 뜻이다). 전자화폐는 신협과 연결된 단말기를 통해 온라인으로 결제를 하거나 간단한 모바일 메시지를 통해 결제 주문 및 승인을 받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종이화폐는 브리스톨파운드(CIC)에서, 전자화폐는 신협에서 각각 관리한다. 지금까지 발행된 지폐는 총 11만5000파운드. 원화로 환산하면 2억 원 남짓의 적은 돈이다. 지폐 발행액이 적은 이유는 본위제 방식(동일 금액만큼 예치)을 적용하고 있어서 자금 여유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현재 주거래 은행인 신협에 브리스톨파운드 전용계좌를 개설한 사람 수는 1500명 남짓이고 확보된 가맹점 숫자는 370개 수준이다. 혹자는 그 정도 규모밖에 안 되냐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 화폐가 태어난 지 만 두 살이 안 된 신생아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 숫자는 결코 가볍지 않다. “골목상인 보호하는 돈, 지역화폐” 현재 브리스톨파운드의 주 수입원은 화폐 거래 시에 징구하는 수수료 수입이다. 수입구조만 놓고 보자면, 일정한 수의 가맹점이 만들어지고 적정 수준의 거래가 이뤄져야만 지속가능성이 담보될 수 있다. 브리스톨파운드(CIC) 씨아란 먼디(Ciaran Mundy) 대표는 이에 대해 지역화폐 사업은 가맹점 확보, 종이화폐 관리, 전자결제 시스템 운영, 마케팅 및 홍보작업 등 일손이 많이 필요하지만 수익구조를 창출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정말 열심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지역화폐를 알리기 위해 각종 모임과 행사장을 부지런히 쫓아다니고 있다고 말한 것이 허언이 아님을 느낄 수 있었다. 브리스톨파운드는 가맹점 확보 이외에 소비자들의 참여를 촉진하기 위한 방안으로 화폐 교환 시 10%의 인센티브를 부여하는 방법(법정화폐 100파운드를 받고 지역화폐 110파운드를 주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가맹점이 늘어도 화폐 소비자가 없으면 의미가 없기 때문에 가맹점과 소비자층 두 대상 모두에 힘을 집중하고 있는 중이다. 개인이 사용한 지역화폐에서 발생한 이익의 일부를 지역에 기부토록 함으로써 화폐와 지역사회 투자를 연동시키는 모델도 검토 중이다. 지역화폐 소비를 자극하기 위해 금전적인 인센티브를 주는 방식보다는 공익적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더 바람직한 접근법이라고 판단하고 있는 듯하다. 지역화폐가 실제 유통되고 있는 현장에서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가맹점을 직접 방문해 보기로 했다.

브리스톨파운드 가맹점이 가장 많이 밀집해 있는 스토크로포트(Stokescroft) 거리에서 친환경 유기농식품 유통매장을 운영하는 젊은 여성 사업가는 “아직까지 거래는 많이 이뤄지지 않고 있지만, 영국의 거대 유통업체인 테스코(Tesco)의 지역상권 침해가 심각한 상황”이라며 “이들 거대기업으로부터 골목상인을 보호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가 지역화폐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라고 말했다. 판매되는 상품 대부분을 외지에서 조달하고 판매이익금 대부분을 외지로 방출함으로써 지역 순환경제 달성에 하등의 도움이 되지 않는 사업체 중 으뜸이 대형마트(SSM)라는 사실은 우리나라나 영국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시내나 시 외곽 어디에서나 테스코 마트를 쉽게 발견할 수 있었고 마을에서 오랫동안 장사를 해오던 상인들이 이들 대형 유통기업에 대해 깊은 반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참고로, 테스코는 한국에 홈플러스라는 이름으로 장사를 하고 있으며 지분 100%를 소유하고 있는 다국적기업이다). 지역화폐 취급 가맹점이 적은 것은 문제 브리스톨시 인근에서 알코올 및 마약중독자들을 고용, 유기농 야채를 생산 판매함으로써 로컬 푸드를 실현하고 유기농법에 대한 교육훈련 과정을 통해 이들의 자립을 돕는 도시농업 사회적기업(CIC)을 운영하고 있는 스티브 글로버(Steve Glover)대표. 그는 “사회적기업가로서 지역화폐 사업이 가진 취지와 뜻에 공감해 유통 도매상과 직거래하는 레스토랑으로부터 브리스톨파운드를 받고 있다”라면서도 “하지만 소비할 곳(가맹점)이 많지 않아서 신협에 그냥 보관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지역화폐 사업을 이끌고 있는 이들의 치열한 노력과 분투에도 불구하고 아직 갈 길이 멀다는 느낌이 들었다. 지역화폐는 안정성과 편리성도 중요하지만 화폐 소유자가 자신이 원하는 상품과 서비스를 자유롭게 구매할 수 있는 거래처(가맹점)가 부족할 경우 화폐 효용성이 급격히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일정한 화폐 공간 안에 사람들의 일상적 욕구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다양한 업종의 가맹점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것이 긴요하다. 대체로 공동체 기반의 소규모 지역화폐들이 안정적이지 못한 이유는 화폐를 통해 거래할 수 있는 상품과 서비스가 부족해 사람들의 관심이 멀어지고 투입 비용 대비 효과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거의 만능에 가까운 법정화폐와 달리 사용처가 일정하게 제한된 지역화폐를 지역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사용토록 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돈이란 사람들이 받아들일 때만 존재할 수 있다는 말처럼, 사람들에게 이미 너무나 익숙한 기성 화폐 대신 낯선 지역화폐를 쓰도록 한다는 것이 어디 생각처럼 쉬운 일이겠는가. 그런 측면에서, 출범한 지 채 2년도 안 된 신생화폐인 브리스톨파운드를 가맹점과 화폐이용객 숫자만으로 평가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본다. 죽은 노동 되살리는 지역화폐 브리스톨파운드를 포함해 대부분의 지역화폐는 법정화폐를 대체하기 위해 만든 돈이 아니다. 지역화폐는 법으로 정한 공통화폐의 존재를 인정하지만 경쟁 원리와 희소성으로 인해 지독한 결핍을 겪고 있는 지역의 돈 문제를 해결하고, 죽은 노동을 되살린다. 또한 가격 뒤에 숨겨진 이자를 제거함으로써 소득을 증대시키고, 지역사회의 성장 발전을 촉진하는, 법정화폐의 사각지대를 메우기 위한 보완화폐(Complimentary Currency)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법정화폐와 대립각을 세우는 상대가 아니라 함께 미래를 모색해가는 동반자라는 말이다. 과거 지역화폐의 움직임에 대해 거부감을 나타내던 중앙은행(BOE)의 생각도 바뀌고 있다. 브리스톨시 탐방 전에 들렀던, 대안화폐 전문 연구기관인 영국 신경제재단(nef)의 던컨 맥컨(Dunncan McCann) 연구원은 “통화당국도 이제 지역화폐가 지닌 긍정적 요소와 기능을 자각하기 시작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