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휴가철을 맞이하여 새사연이 새로운 기획을 준비하였습니다!새사연 연구원들은 연구를 잊은빈 시간을 어떤걸하면서 보낼까요? 복잡한 현실에서 벗어나 한 템포 쉬어가자는 의미에서 교훈도, 시의성도 없는아주 ‘사적인’ 글들이 7월 넷째 주 한 주간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즐거운 휴가 보내세요!(편집자 주)[새사연 여름기획특집]숨겨진 취향vol.2김정은, 이수연,이은경댓글예배이탁연 알람소리 들린다. 비몽사몽 중인 나를 일상으로 다시 세우는 포털앱. 지난밤에는 무슨 일이 있었나? 월드컵과 재보선, 류현진과 휴양지 관련 기사가 도배된 포털 메인 화면은 나의 관음적 욕망을 부추기고, 나는 가장 많은 “댓글”이 달려 있을 것 같은 기사를 클릭한다. 새벽이라는 하루의 가장 경건한 시간에, 가장 경건한 예배를 드리러 나는 접속한다. 기사는 읽지 않는다. 나의 목적은 오직 기사를 읽고 남긴 누리꾼들의 “댓글”을 읽는 것이다. “미친놈, 이 따위 저 따위, 창중이의 부활, 새누리스럽네, 따봉은 묵직해야 한다, 당나라 군대, 똥별들, 몽전자전, 유니폼 판매원, 홍명박.” 위의 예를 넘어서는 차마 글에 담을 수 없는 모욕적이고 경악할만한 댓글은, 닉네임에 숨어 있는 인간의 타나토스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오프라인에서 충족되지 못한 누리꾼의 욕망은 타인에 대한 분노와, 비난과, 폭언과 비아냥거림으로 치환되고, 오프라인의 권력들은 조롱과 힐난의 대상, 말 그대로 “걸레”가 된다. 20세기의 신전이 백화점과 극장이었다면, 21세기의 신전은 단연 댓글창이다. 높은 힐을 신은 채 도도히 쇼핑하고, 멋진 옷을 차려입은 채 두 시간동안 스크린을 째려보던 당신의 20세기는, 힐보다 높아진 명품의 문턱과, 극장의 VIP석에 의해 다시 한 번 좌절될 뿐이다. 이제는 21세기, 그럴듯한 삶을 소비하고, 당신이 분노하는 일상으로부터의 해방은 모두에게 평등한(오직 마녀에게만 불행한) 댓글을 통해 이루어진다. 당신은 기사의 대상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유머와 평화를 얻고 세상과 화해한다. 기자님들. 어서 맛깔스러운 기사로 된 성찬을 준비하십시오. 나는 스마트폰을 들고 경건한 마음으로 포털앱에 접속합니다. 물론 저는 직접 기도를 드리지 않습니다. 타인들이 댓글창에 싸놓은 배설물을 마음껏 흡입하며 대리만족을 느낄 뿐이죠. 휴가철 하와이, 제주도는 못가도, 나는 지금 당신이 부르는 찬송댓글에 충분히 안락한걸요?————————————————————————————낱낱이 파헤쳐진 사랑의 민낯 -가장 따뜻한 색, 블루이희주 휴가철에 보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영화일지도 모르겠다. 유쾌하지도 발랄하지도 않은 작품이니. 그렇지만 시끌벅적한 바캉스 분위기에서 한 발짝 물러나 좀 더 고즈넉한 시간을 보내길 원하는 당신이라면, 한번쯤 시도해 볼만하다. 지난 해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인 <가장 따뜻한 색, 블루>는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연인의 관계’ 그 자체에 대한 서사이다. 영화는 아델과 엠마 두 사람의 첫 만남부터 헤어짐까지 사랑의 기승전결을 담담하게, 그러나 한 치의 가감 없이 담아냈다. 그 결과 두 인물의 이야기는 정제된 것이 아닌 날것으로 다가와 보는 이를 보다 효과적으로 끌어들인다. 본 영화는 사랑은 곧 생의 감각과 통한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강조한다. 이 점은 다른 영화라면 가차 없이 잘려 나갔을만한 ‘먹고 자는’ 생리적인 장면들의 반복적 배치로 잘 드러난다. 개봉 전부터 화제가 되었던 강도 높은 섹스신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컷들은 불필요하다기 보다는 오히려 사랑의 ‘일상성’을 강조하는 장치가 되어 엠마와 아델의 이야기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동성애를 그린 작품임에도 퀴어 영화의 장르적 특성이 전혀 두드러지지 않는 점도 주인공들의 사랑 이야기가 너무나 일상적인 것이기 때문일 테다. 두 사람의 만남 이전 엠마의 색채였던 파랑은 서서히 아델에게로 전이된다. 둘은 결국 아델의 외도로 파경을 맞게 되지만 천천히 물드는 파랑처럼 아델의 삶에 스며든 엠마는 그 이후로도 오랫동안 아델의 일상을 지배할 것이다. 엠마를 만나 사랑을 하고, 그 사랑을 다시 잃는 일련의 과정을 겪고 난 이후 <아델의 삶>은 결코 그 이전과 같을 수 없으리라. (<아델의 삶>은 이 영화의 원제이다.) 변치 않겠다는 연인의 속삭임은 새빨간 거짓말에 불과하고, 사랑이 주는 환희가 달콤할수록 그 끝은 더욱 잔인할 수밖에 없다. 이를 알면서도 다시금 사랑에 빠지고 마는 인간의 자가당착은 결국 스스로의 존재를 타자를 통해야만 확인할 수 있는 인간의 나약함에서 기원하는 것일 테다. 언젠가 식어버릴 것을 알아도 사랑하는 그 순간은 몸서리 쳐질 만큼 명징한 생동감으로 다가오기 때문에. ————————————————————————————-“숨겨진 취향”일리 없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