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클리펀치 411호 : 민주주의의 한계? 지켜야 할 최후의 보루

민주주의의 본령에 대하여 얼마 전 대전의 모대학에서 선배들이 후배들의 기강을 잡겠다며 기합을 주는 어이없는 사건이 있었다. 이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는데 그 이유는 대학을 비롯한 모든 학교는 민주시민으로서의 자유와 권리에 대해 본격적으로 체험하는 공간이 되어야하기 때문이다. 학교뿐만 아니라 이 사회 전체가 자유와 권리에 대해 본격적으로 체험하는 공간이어야 한다는 것에 이의가 있을 수 있을까.
하지만 이 당연한 명제에 반발하는 사람들, 계급의식, 엘리트주의, 특권의식을 과시하는 괴물들이 도처에 출몰하고 있다. 그들의 명분을 모아보면 대체로 이렇다. ‘나는 선배고 너는 후배이다.’ ‘잘 아는 사람들이 주도해야 한다.’ ‘자고로 질서는 아름다운 것이다.’ ‘효율성이 최고의 가치이다.’ 등등. 그 중의 백미는 ‘조직을 민주적으로 운영하면 망한다’는 말이다. 이것의 확장판이 ‘안보와 경제를 위해서는 구국의 일념이 중요하지 민주적 절차를 강조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이다. 졸지에 민주주의가 나라를 망치는 이념이 되었다. 심지어 어린 학생들은 ‘자신과 생각이 다른 소수를 집단으로 폭행, 언어폭력을 하는 행위’를 민주화라고 조롱하는 경우까지 나타나고 있다. 우리는 이에 동의해야 하는가. 민주적 가치에 우선하는 다른 무엇이 존재한다고 인정해야 하는가. 어떤 이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우리끼리 일하는 데 민주주의가 필요한가?’ 혹은 ‘이렇게 작은 조직에서 민주주의가 구현되기 어렵다.’ 어려우니 다 같이 노력하자는 얘기라면 모르겠으나 이런 말을 하는 저의는 민주적 절차를 강요하지 말라는 것이 대부분이다. 어느 정도 규모의 조직이라야 민주적 절차가 필요하고 민주주의의 실현이 가능한가.

역으로 이런 주장도 있다. ‘수천만이 모여 있는 국가에서 민주주의라는 것을 구현하기 어렵다.’ 달리 표현하여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국가를 경영하는 데에는 (지도자의) 결단이 필요하다.’ 다수의 의견을 모으는 것이 사실 상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작은 규모에서도 구현되지 않고 큰 규모에서도 구현되지 않는다면 민주주의는 허상이란 말인가. 현대국가로서 대한민국은 민주주의를 표방하고 있으며 그 이상을 헌법에 명시하고 있다. 즉 헌법을 살펴보면 최소한, 합의에 의해 결정된 민주주의가 무엇인지는 확인할 수 있다. 우리가 합의한 민주주의 체제에서 우리가 마땅히 누려야 할 기본권을 침해하는 행위가 곧 민주주의를 훼손하는 것이다. 대한민국헌법은 국민 모두 인간으로서 존엄과 가치를 지니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10조). 누군가의 존엄과 가치, 행복을 침해한 적이 있는가. 그렇다면 반민주적 행위일 수 있다. 국민 모두는 법 앞에 평등하다.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모든 영역에서 차별받지 않으며, 어떤 특수계급도 인정되지 않는다(11조). 지금 앞에 마주하고 있는 사람이 내 친구가 아니라서 차별하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라는 틀을 만들어 다른 사람들을 배제하거나 특권을 누리지는 않았는가. 그렇다면 반민주적 행위이다. 잘못된 행위(범죄)의 정의와 처벌은 법률에 의한다(13조). 후배들이 맘에 들지 않는다고 자의적으로 처벌(기합)을 하는 것이 우리에게 불쾌감을 주는 이유는 정의롭지 못한 일일 뿐만 아니라 명백한 반민주적 행위이기 때문이다. 모든 국민은 양심의 자유를 가진다(19조). 내 앞에 일제를 옹호하는 사람이 앉아있다. 당연히 분개할 만한 일이고 공개적으로 비판을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생각을 바꾸라고 강제할 수 있을까. 어떤 일의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을 강요하는 것 또한 민주적 행위가 아니다. 물론 그런 사람이 주요 공직에 임명되는 것 또한 반민주적이다. 국민 다수가 그에 찬성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국민은 언론ㆍ출판, 집회ㆍ결사의 자유, 학문과 예술의 자유를 가진다(21조, 22조). 타인의 명예나 권리 또는 공중도덕이나 사회윤리를 침해하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의 사상을 굽힐 이유가 없다. 누군가의 생각이나 조직의 공식적 입장과 다르다거나 누군가의 불편한 심기 때문에 언로를 막는 것은 심각하게 민주주의를 훼손하는 행위이다. 그렇다면 조직의 질서를 해치고 조직 구성원에게 불이익을 끼치는 행동을 방치하라는 것인지 의문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 행동이 공공복리를 해치고 어떤 사람들의 주장처럼 안보에 중대한 위협이 되는 행위일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이에 대해 헌법에서 정한 기준은 어떤 사람의 기본권을 제한하기 위한 판단과 평가뿐만 아니라 그 절차와 처분에 대해서도 법률에 따라야 된다는 것이다. 즉 자의적 해석을 배제하고 명백하게 합의된 기준에 따르는 것이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방법이다. 따라서 조직 구성원의 권리와 행동을 제한하기 위해서는 민주적 절차에 따라 분명하게 합의된 기준에 근거해야 한다. 누군가의 감정, 모호한 대의명분, 상사의 명령, 권위자의 주장, 관행과 관습, 불공정한 계약, 목전의 이익, 위계질서 등 모든 자의적이고 정의롭지 못한 그래서 공식적으로 합의되지 못한 기준은 근거가 될 수 없다. 민주적 절차를 무시하는 것이 지금 당장은 이익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민주주의 원칙의 훼손은 치유하기 어려운 상처이다. 민주주의는 우리 사회가 지켜야 한다고 합의한 최후의 보루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가 무너진 이후의 사회는 힘이 지배하는 야만상태일 뿐이다. 최근 정부와 여당은 잇달아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후보자가 낙마하자 청문제도 자체를 손볼 기세다. 명분은 민주적 절차가 경제와 민생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걸림돌은 인사청문회를 통과하지도 못할 정도로 민주시민으로서 제대로 된 자질을 갖추지 못한 그 사람들이다. 자신들에게 유리하지 않다고 민주적으로 합의된 기준을 망가트리려는 정부와 여당도 정의롭지 못한 걸림돌이긴 마찬가지이다. 21세기에 들어선지 10년도 훨씬 지난 이 시점에, 너무나도 당연한 민주주의의 원칙과 시민의 기본권에 대해서 다시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 당혹스럽고 서글프다. 하지만 기초가 허술하면 무너지는 법, 계속해서 이 사회가 진보하기 위해서는 오만가지 화려한 정책들을 요구하고 쏟아내기 이전에 민주주의의 원칙이 제대로 구현되고 있는지에 대해서 고민해야 한다. 지금 나 자신이, 내가 속한 조직이 민주주의를 실천하지 못하는데 이 사회에서 민주주의가 실현되기를 바라는 것은 헛된 희망이거나 자기기만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