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젊은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는 이제 월드컵의 스타 축구선수만큼 유명인이 됐다. 그의 책 <21세기 자본>은 분배에 관한 이야기다. 1960년대 이래 분배 문제는 주류경제학에서 찬밥 신세였으니 상전벽해인 셈이다. 이론적으로는 보울리가 “자본과 노동이 가져가는 몫은 일정하다”는 주장을 해서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새뮤얼슨의 지지를 받았고(‘보울리 법칙’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같은 상을 받은 쿠즈네츠는 “자본주의 발전 초기에는 분배가 악화되지만 일정 단계를 넘어서면 분배가 개선된다”는, 저 유명한 ‘역U자 가설’을 내놓았다. “시장에서 자본이나 노동은 생산에 기여한 만큼 보수를 받게 된다”는 ‘한계생산력설’은 우리나라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나온다. 따라서 “분배는 신경쓰지 말고 성장만 하면 된다”, “정부가 함부로 분배 문제에 개입하면 성장을 방해해 오히려 더 나쁜 상황이 올 것”이라는 주장이 50년간 우리를 지배했다.

피케티는 이런 ‘정설’들을 단숨에 뒤집었다. 그의 무기는 쉽게 부정할 수 없는 장기 통계, 즉 역사적 사실이다. 가장 중요한 통계는 우리나라의 전 자본스톡(국부)을 한 해의 국민소득으로 나누면 얼마나 될까를 보여주는 β(=W/Y)이다. 이 수치에 자본의 수익률(r)을 곱하면 국민소득에서 자본이 차지하는 몫(α=rβ)이 된다(제1법칙). 그리고 역사에서 찾아낸 이 수치를 신고전파의 ‘균형성장 조건’(β=s/g, s는 저축률, g는 경제성장률)과 비교했다. 실제 서구의 역사에서 β, 즉 자본스톡의 상대적 크기는 19세기 말(프랑스의 벨 에이포크, 미국의 도금시대)에 6~7배에 달했고 1910년부터 1950년대까지 2~3배까지 뚝 떨어졌다가 1980년대부터 급격히 상승해서 현재는 5배를 넘어섰다. 또 그는 자본수익률(r)은 전 역사를 통해서 4~5%로 일정했다는 사실도 발견했다. 하여 현재 선진국의 불평등 지표는 2차대전 후 최저치를 기록한 후, 1980년대부터 19세기 말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는 것이다. 20세기 초에 분배가 개선됐던 것은 두 번의 전쟁에 의한 자본의 물리적 파괴, 그리고 뉴딜 등 사회개혁에 의한 자본 및 소득의 중과세(최고 부자에 대한 소득세가 90%를 넘었다) 때문이었다. 또한 앞으로 경제성장률은 점점 더 낮아질 전망이므로 세계는 ‘잠재적으로 가공할’ 상황에 빠질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피케티 비율은 어느 정도일까? 지난 14일 한국은행과 통계청은 ‘국민대차대조표 공동개발 결과’(잠정)에서 “2012년 말 현재 우리나라의 국민순자산(국부)은 1경630.6조원으로 국내총생산(1377.5조원)의 7.7배로 추계(잠정)된다”고 발표했다. 이 수치를 피케티의 정의대로 다시 계산하면 우리나라의 β는 약 5.6이 된다. 한편 한국은행이 발표하는 노동소득분배율(1-α)은 60% 정도니까 우리나라의 α는 약 40%이다. 그러므로 한국의 r(=α/β)는 약 7.1%나 되는데, 이 수치는 세계 평균보다 훨씬 높다. 현재 우리의 β는 일본과 이탈리아 다음이고 α는 세계 1위일 것이다. 한은과 통계청 보고서의 부록을 보면 2000년 이후 이 수치가 대단히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즉 우리나라의 불평등은 선진국 어느 나라보다 더 빨리 극단으로 치닫고 있다. 아마도 1960년대에 우리나라의 β는 세계 최저 수준이었을 것이다. 농지개혁과 한국전쟁 때문이다. 하지만 외환위기 이후 불평등의 늪이 걷잡을 수 없이 깊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체감하고 있다.세월호가 우리를 절망케 했던 것은 뻔히 눈뜨고도 단 한 명의 생명도 구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 한국의 피케티 비율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 모두의 아이들이 전부, 곧 세월호에 갇힌 아이들 신세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피케티의 주장대로 과감한 자산재분배와 소득재분배가 답일 테다. 그 스스로 ‘유토피아적’ 해법이라고 말하지만 우리 아이들에 대한 현재의 심정이라면 결코 못할 일이 아니다. 아니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다시 한번 문제는 정치다.* 본 글은 경향신문에 기고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