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참사로 온 나라가 비통에 휩싸인 가운데 4월 25일 오바마 대통령 앞에서 두 손 모아 쥐고 조아리며 밝게 웃고 있는 박근혜 대통령의 사진이 화제가 됐다. 이 사진은 세월호 실종자 가족 앞에서 보인 고압적인 표정과 비교가 되면서 국민들의 가슴에 분노의 불을 지폈다. 국민들 위에 군림하면서 미국에게는 저자세를 보이는 박 대통령의 모습은 미국에게 장악된 한국 정치의 현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한국 정치가 미국에게 좌지우지된다는 사실은 그다지 비밀도 아니다. 정치인으로 성공하려면 일단 미국에 날아가 눈도장부터 받아야 한다는 건 상식이다. 대선 때만 되면 언론은 미국이 누구를 선호하는가 알아내기 위해 분주하다.

대통령도 좌지우지하는 미국

한국 정치가 얼마나 미국에게 장악되어 있는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는 역대 대통령의 집권과 실각 과정에서 살펴볼 수 있다.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은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집권할 수 있었다. 미군정 시절 다른 정치세력들은 모두 탄압을 받아서 제대로 활동하기는커녕 살아남기도 어려웠고 특히 국민들의 높은 지지를 받으며 이승만을 위시한 단독정부 추진 세력을 견제하던 백범 김구 선생은 미군 방첩대(CIC) 요원이었던 안두희에게 암살되었다.

이승만 정권은 집권 내내 각종 부정부패와 독재, 그리고 무능한 국정 운영으로 국민들의 지탄을 받았고 결정적으로 1960년 4.19혁명이 일어나면서 몰락하고 만다. 미국은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실망으로 전부터 ‘에버레디’라는 쿠데타 계획을 입안한 상태였다. 4.19혁명으로 더 이상 이승만 정권이 유지될 수 없다고 판단한 미국은 월터 매카나기 당시 주한미대사를 통해 이승만에게 직접 하야를 지시했다. 결국 이승만은 하와이로 망명하고 만다.

5.16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대통령 역시 미국의 지원을 받았다. 1959년 미국 상원 외교위원회 의장 폴 브라이트는 “(한국에서) 정당 정치가 실패할 경우에 군인 정치에 의한 교체를 실현해야 한다”고 하였으며 1964년 5월 3일 미 중앙정보국(CIA) 국장 덜레스는 영국 비비시(BBC) 방송에 출연하여 “내가 재임중에 CIA의 해외활동으로서 가장 성공을 거둔 것은 5?16쿠데타였습니다”고 발언하였다.

그러나 박정희 유신독재는 국민들의 저항을 불러왔고 특히 1979년 부마항쟁은 정권의 기반을 뒤흔들었다. 게다가 미국의 지시를 어기고 비밀리에 핵무기 개발까지 하면서 미국은 박정희 정권을 포기한다. 박정희 암살사건 직후 미국 백악관은 한국보다 먼저 한국에서 ‘쿠데타’가 발생했다고 발표하였는데 일본 산케이 신문은 미국이 쿠데타를 준비했던 것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했다. 휘류빈 당시 소련 외무차관도 “박 대통령은 미국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KCIA(중앙정보부) 부장에게 살해된 것”이라고 말했다.

12.12쿠데타로 정권을 쥔 전두환 대통령 역시 미국의 지원을 받았다. 1980년 5월 15일 당시 주한미군 사령관 위컴은 한미연합사령부 지휘를 받는 20사단의 출동을 승인하여 전두환의 쿠데타를 지원했고 나중에 AP통신과의 기자회견에서 “한국의 10월 사태(10.26을 의미) 이후 미국의 대한정책에서 가장 성공한 일 중의 하나는 전두환 정권이 수립된 것이다. 우리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으며 우리의 보람도 크다”고 하였다.

87년 6월 항쟁의 성과로 직선제 개헌이 이뤄진 후에도 미국은 한국의 대통령선거에 개입하였다. 1987년 대선을 앞둔 9월, 미국은 노태우 후보를 초청해 레이건 대통령이 직접 면담을 하였다. 미국이 노태우 후보를 지지한다는 점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또 1997년 대선 때 미국은 당시 이슈였던 국제통화기금(IMF) 지원 문제와 관련해 이회창 후보 측과 김대중 후보 측을 만나 IMF 프로그램의 성실한 이행을 요구하였다. 선거 막바지에 이르러 김대중 후보가 IMF 재협상을 추진하겠다고 하자 주한미대사관 부대사와 공사참사관이 김대중 후보 측 핵심인물들을 만나 “그러한 주장은 한국 경제의 신뢰 회복을 어렵게 한다”고 강조해 결국 김대중 후보는 자신의 입장을 후퇴하였다. 누가 당선되든 미국의 입장을 수용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

정치인을 철저히 관리하는 미국

미국은 후보들에 대한 정보를 수집해 어떤 후보가 자신들에게 유익할지 분석하는 작업도 빠짐없이 하였다. 2007년 대선 때는 주한미대사관 관계자들이 KBS 보도본부장과 고위급 기자들을 만나 선거전망과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평가를 전달받았던 사실이 위키리크스 폭로 전문에서 드러났다. 특히 KBS 보도본부장은 전문에 ‘빈번한 대사관 연락책’으로 분류되어 있었는데 미 대사관이 그를 주요 정보원으로 활용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미국은 대통령뿐 아니라 주요 관료들과 정치인들을 장악하여 한국 정치를 ‘미국의, 미국을 위한, 미국에 의한’ 정치로 만들어버렸다.

미국이 이처럼 한국 정치에 깊숙이 개입할 수 있는 이유는 그만큼 철저한 준비를 했기 때문이다. 김민웅 성공회대 교수는 <한겨레21> 제397호에 기고한 ‘미국이여, 낙점하소서?’라는 글을 통해 미국이 ▲CIA를 통해 친미세력을 포섭하고 장기간에 걸쳐 육성하고 ▲각종 비리사건 정보를 축적해 위협하며 ▲경제봉쇄로 위협하는 방식을 통해 정치인들을 좌지우지한다고 분석했다.

특히 미국에 철저히 의존하는 한국 경제의 특성 때문에 미국의 경제위협은 상당한 효과가 있다. 실제로 반미도 불사하겠다며 당선된 노무현 대통령은 집권 직전인 2003년 2월 미국의 신용평가사 무디스가 한국의 국가신용등급을 긍정적에서 부정적으로 강등할 수 있다고 하는 바람에 급히 미국에 사람들을 파견해 대미정책을 변화하겠다고 약속했다.

미국 내에서 대한정책을 결정하는 곳은 국가안전보장회의(NSC)며 실무책임은 국무부 동아태차관보가 맡고 있다. 예를 들어 전두환 정권 시절 미국무부 동아태차관보는 개스턴 시거였는데 6.29선언도 그의 작품이나 마찬가지다. 1987년 7월 1일자 중앙일보 보도에 따르면 1987년 6월 30일 미 연방하원 청문회에서 스티븐 솔라즈 하원의원이 “이번 일의 주역인 개스턴 시거에게 노벨평화상을 주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한국에서 미국 정부의 대한정책을 관철하기 위해 개입하는 기구로는 미대사관을 들 수 있다. 미대사관은 일상적으로 한국 정치인들을 만나 정보를 수집하고 이를 본국에 통보하며 이에 기반하여 다양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위키리크스에서 공개한 2006년 7월 25일자 전문(06SEOUL2505)은 대표적인 사례다. 이 전문은 주한미대사가 미국무장관 등에 보고한 것으로 당시 한국의 한미FTA 협상 대표였던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이 주한미대사와 전화통화를 통해 한국정부의 약가적정화방안 발표에 대해 미국 정부에 미리 알리고, 미국이 의미 있게 의견을 제출할 시간을 주며, FTA 의약품 작업반에서 협상할 수 있도록 한다는 등, 그 내용이 미국 측에 유익한 것으로 평가되는 사항들을 관철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웠다(fighting like hell)’는 내용이 나온다.

한국 정부 관료가 한미 통상 협상을 하는데 미국을 위해 ‘필사적’으로 싸우고, 청와대 회의 내용을 주한미대사에게 보고하는 일은 사실상 ‘간첩’ 행위라고 봐야 한다. 위키리크스를 통해 이런 사실이 폭로되었지만 놀랍게도 정부는 이를 문제 삼지 않았다.




국민 보다 미국을 받드는, 뼛속까지 친미인 대통령과 정치인, 관료들이 정부에 포진해있고, 이들을 미국이 직접 포섭, 장악하고 있기에 오늘날 한국 정치는 철저히 미국의 이익에 복무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