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창하다는 말이 딱 어울리는 계절인데 우리 마음은 캄캄한 어둠 속을 헤맨다. 뉴스를 볼 수도, 안 볼 수도 없다. 실낱같은 희망에 매달리면서 이 사회에 절망한다. 분노해야 한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누구의 책임인지 물어야 한다. 정치학자 보니 호닉이 명명한 “비상사태의 정치”가 발동되어야 한다. 지금이야 차마 입 밖에 못 내겠지만 주류경제학자들은 이렇게 중얼거릴 것이다. “청해진해운은 망한다. 그것이 시장의 처벌이다.” 그럴 것이다. 시장은 모든 것을 “사후에 조정”한다. 하지만 우리 아이들의 목숨은 돌아오지 않는다. 생명은 사후에 조정되거나 정산될 수 없다. 또한 시장은 시행착오의 메커니즘이다. 인간과 자연의 생명은 시행착오를 겪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시장의 근본적 한계”이다.그래서 규제가 존재하는 것이다. 금지와 의무, 그리고 공공 소유를 통해 규제는 위험을 사전에 줄이는 역할을 한다. 여객선의 수명은 20년으로 묶여 있었다. 낡은 선박은 생명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2009년 이 규제는 30년으로 완화됐다. 해운업체의 ‘전봇대’를 뽑아 준 것이다. 일본에서 18년이나 운항한 여객선을 사들인 청해진해운은 이 배를 증축했다. 더구나 한 시민단체에 따르면 목포해양경찰서는 2시간40분 동안 12척의 여객선을 ‘안전점검’했다. 한 척당 13분이다. 1년에 평균 4건의 사고가 발생한 위험지역을 지나면서 선장은 조타실에 있지 않았고 배가 기우는데도 탈출 명령을 내리지 않은 채 첫 번째로 배를 떠났다.아주 직접적인 제도적 결함과 규칙 위반만 꼽아도 수없이 나열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연루된 사람들은 법적 책임(accountability)을 져야 한다. 사고 현장에서 예의 짧은 말투로 “명령”을 내린 대통령은 자신이 더 포괄적인 시스템에 대해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2010년에 개정된 대한민국의 행정규제기본법 1조(목적)는 “행정규제에 관한 기본적인 사항을 규정하여 불필요한 행정규제를 폐지하고 비효율적인 행정규제의 신설을 억제함으로써…”로 시작한다. 대통령은 “규제는 암덩어리”라고 규정함으로써 이 법에 ‘산도 뽑아낼 만한’ 힘을 불어넣었다. 바로 그만큼 우리 아이들은 위험해졌다.“이게 나라인가?” 이 질문에 우리 모두 도덕적 책임(responsibility)을 져야 한다. 우리는 성장과 효율성의 신화를 수용했고 거기 어울릴 만한 지도자를 뽑았다. 투자가 늘고 GDP가 올라가면 아이들도 행복해질 거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야말로 죽음의 경쟁을 시키면서 “내 아이는 승리할 것”이라고 스스로를 속이고 있지는 않은가? 광우병 우려 쇠고기 수입 때처럼 우리 아이에게 위험이 닥칠 확률은 “벼락이 머리 위에 떨어질 확률보다 적다”는 ‘전문가’들의 말을 믿는 것은 아닌가? 핵발전소와 고압 송전탑의 문제는 저 멀리 있는 생명을 위협할 뿐이라고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 모두 경제의 효율성을 위해서 누군가 부담해야 할 비용일 뿐이라는 경제학자들의 말에 끄덕거리고 있는 건 아닌가?그렇지 않다. 한 톨의 모래가 산사태를 일으킬 확률은 0에 가깝지만 재난은 늘 그런 식으로 발생한다. 광우병은 전염되므로 독립적 확률이 아니다. 핵발전소는 우리가 전기를 아끼는 것만으로도 없앨 수 있다. 바보들처럼 1점 경쟁 속으로 애들을 내몰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다. 북유럽 국가들이 세계에서 제일 안전하다는 연구에 비춰 본다면 이 모두 효율성과 별 관계가 없다. 비상사태는 공감(empathy)을 폭발시킨다. 인간이 100만년 이상 발전시켜온 “측은지심”이다. “우리 아이만은”이라는 요행심이 아닌 “모두가 우리 아이”라는 공감을 바탕으로 “어떤 사회를 원하는가?”, 스스로 물어야 한다. 새로운 사회 제도와 규범이 공감 속에서 형성되고 실천될 때 비로소 비극은 사라질 수 있다. 호닉은 비상사태에서 오히려 새로운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찾아냈다. 지금 우리 사회를 감싸 안은 공감이야말로 우리의 희망이다. “반드시 기억하자, 절대로 잊지 말자”. 공감의 정치가 언제나 경제에 앞서야 한다. 이번 지방선거는 그 첫 번째 시험대가 될 것이다.*본 글은 경향신문에 기고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