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유주의와 괴벨스가 만났을 때

By | 2014-04-01T17:55:38+00:00 2014.04.01.|

“거짓말은 처음에는 부정하고 그 다음에는 의심하지만 되풀이 하면 믿게 된다. … 나에게 한 문장만 달라. 그 어떤 누구라도 범죄자로 만들 수 있다.” – 요제프 괴벨스 제1차 세계대전에 패한 독일은 막대한 배상금을 물어야 했다. 여기에 대공황의 여파까지 겹치자 참혹한 경제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어마어마한 물가상승으로 인해 수 년 동안 하루벌이를 술 마시는 데 탕진한 형이 모아둔 술병들의 값이 매일 착실하게 모은 동생의 저금보다 더 컸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을 정도이다. 실업률은 하루가 다르게 치솟고, 일을 해도 높은 물가로 인해 국민들의 삶은 비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 파탄 난 경제 상황을 기반으로 나치가 집권하였다. 그 과정에 폭력적인 행태도 있었다지만, 민주적 선거를 통해 독일의 국민들은 나치를 선택하였다. 그 중심에 괴벨스의 탁월한 선동전략이 있었다. 예술의 경지에까지 이르렀다는 평가를 받는 괴벨스의 전략은 “이성은 필요 없다, 감성과 본능에 호소하라”로 요약된다. 수많은 괴벨스의 작품 중에서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다분히 정치계의 의도로 여겨진다) 매우 소름 끼치며 참혹한 결과를 낳은 전략이 있다. 바로 “모든 것이 유태인 때문이다”라는 선동문구이다. 물가가 높은 건 유태인(상인) 때문이다. 실업률이 높은 건 유태인(자본가) 때문이다. 우리가 가난한 건 유태인(고리대금) 때문이다. 이렇게 시작된 선동문구는 독일인이 천시 받는 것도 유태인 탓, 어젯밤 도둑이 든 것도 유태인 탓, 애들의 말썽도 유태인 탓, 문란하고 저속한 사회도 유태인 탓이라는 집단최면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신문지상의 모든 부정적 사회이슈 뒤에는 유태인이 원인이라는 유언비어가 따라 붙었다. 결국 어제 시험을 망친 것도, 지금 두통에 시달리는 것도 모두 유태인 탓이 되었다. 엉뚱한 분노를 발판 삼아 정권을 잡는 데 성공하였지만, 그 결과 유래를 찾기 힘든 인종 학살이 일어났다. 근거도 없는 분노를 정당화하기 위해 존재하지도 않는 ‘순수 아리안 혈통의 우수성’이란 이념이 만들어졌고, 아리안이 아니라서 사회병리의 원인이 되는 열등한 유태인, 집시 등의 소수 민족을 소멸시켜야 한다는 논리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어제까지 친구이고 이웃이었던 사람들이 어디론가 끌려가는데도 아무도 막지 않았다. 그들이 다시 돌아오지 못 할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위와 같은 선동술은 정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위험스럽게도 전 세계의 거의 모든 정치집단에서 활용되고 있다. 유감스럽게 아직도 그 효과가 뛰어나기 때문이다. 우리의 경우에도 예외는 아니다. 2006년 무렵부터, 인터넷의 모든 부정적인 글에는 ‘이것은 ㅇㅇㅇ때문이다’라는 댓글이 달리기 시작했다. 그 시기는 모 정당의 관계자가 ‘십 만 알바 양성론’을 거론했던 때와 겹친다. 그 정당이 주도했다는 증거는 없지만 당시에 형성된 프레임으로 아직까지 이득을 보고 있다는 건 부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먹잇감이 된 그는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했다. 2014년 4월, 우리의 삶도 고달프다. 가난 때문에 목숨을 버리는 이웃들이 늘어나고, 청년들은 무거운 학비와 주거비에 짓눌리고 있다. 안정적인 일자리는 비정규직으로 바뀌고, 그나마 그런 일도 구하기가 어렵다. 전세금은 하루가 다르게 오르는데 좀처럼 소득은 늘지 않는다. 이에 대해 박근혜 대통령은 “규제 때문이다”라고 선언했다. “규제는 암 덩어리다”라는 수사를 앞세운 정부회의를 과감히 몇 시간에 걸쳐 생중계하였다. 신자유주의자들의 오랜 숙원이 풀릴지도 모르겠다. 괴벨스가 살아 돌아온다면 이 상황을 보면서 흐뭇한 미소를 지을 것이다. 전형적인 선동술이기 때문이다. 정책의 뜻을 풀어보면 ‘부정을 바로잡고 바르게 하는 정부의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미국의 정치학자 테오도어 로위(Theodore J. Lowi)는 정부의 정책을 세 가지로 분류하였다. 첫째, 공공체계의 구성정책이다. 행정, 입법, 사법과 관련된 공공체계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지에 관한 것이다. 둘째, 분배 또는 재분배 정책이다. 재원을 누구에게 얼마나 제공하고 그 비용을 누구에게 얼마나 물릴 것인지에 관한 것이다. 조세 및 복지, 사회간접자본 등과 관련이 깊다. 셋째, 규제이다. 사회의 안녕과 민생을 저해하는 악행을 막고 공공복리에 도움이 되는 활동을 촉진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시장독점 및 담합 등을 금지하고 공정한 경쟁을 유도하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규제는 분배 및 재분배 정책과 함께 현대정부의 주요 역할이다. 이미 용도 폐기된 자유방임주의자 또는 신자유주의의들의 주장이 받아들여져서 규제가 철폐되기라도 한다면 정부는 능력을 잃게 된다. 더 이상 강자로부터 약자를 보호할 수 없게 된다. 규제가 없어서 비정규직, 재래시장, 중소기업 등 수많은 약자들이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작은 정부를 외치는 목소리의 밑바닥에 지속적인 ‘갑질’을 가능하게 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닌지 충분히 의심이 가는 상황이다. ‘일자리’를 볼모로 규제철폐를 요구하는 건 너무 잔인한 처사다. 그나마 이 정도의 일자리가 유지되는 것이 정부가 부족하나마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란 걸 뻔히 아는 사람들이 그러면 못쓴다. 현대의 정의론을 정립한 존 롤스(John Rawls)는 정의로운 정책은 가장 약한 사람들의 복리를 최대로 만드는 조건이 달성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시장에서 강한 자들이 약한 자들을 대상으로 힘자랑 못하도록 하는 것이 그 기본 조건일 것이다. 규제철폐라는 선동에 매달리지 말고 시장에서 벌어지는 무수한 횡포에 대해 진정으로 고민해야 할 것이다. 정말로 시장이 정상화 되기를 바란다면 선택의 여지가 없다. 대통령께서는 묵묵히 자기소임을 다하는 공직자들을 범죄자로 몰지 마시고 행정부의 수장으로서 헌법에 규정된 의무를 다하시기 바란다. “선의 방관은 악의 승리를 꽃 피운다” – 에드먼드 버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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