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아베노믹스’가 1년도 채 안돼 좌초의 기미를 보이고 있다. 일본 내각부가 지난 17일 공개한 2013년 4분기 국내총생산(GDP) 증가율은 연율로 환산해 1.0%에 그쳤다. 각 기관들의 2.8% 예측을 무색하게 한 성적이고 3분기의 1.1%에 비해서도 둔화했다. 지난 1월 스위스에서 열린 ‘다보스 포럼’에서 “일본의 신새벽”이라는, 자화자찬 일변도의 연설을 한 아베 총리가 아연실색할 만하다.사실 일본의 희망은 아베가 야심차게 들고 나온 임금 인상에 있다. 일본의 경제인단체연합까지 나서 사회적 대타협의 모습으로 임금 인상이 이뤄진다면 내수에 의한 성장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재까지의 통계는 오히려 실질임금이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오는 4월 소비세율이 예정대로 인상된다면 소비는 더욱더 줄어들 것이다.하지만 ‘아베노믹스’의 진정한 문제는 시위를 떠난 지 얼마 안된 세 번째 화살에 있다.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미·일 FTA라고 생각해도 좋다)이라는 외부 충격에 의해 서비스 시장의 민영화와 규제완화를 노리는 정책은 그나마 유지되고 있는 일본 고유의 안정성마저 뒤흔들 것이기 때문이다. 이른 시기에 총리를 바꾸지 않는다면 일본은 그야말로 희망없는 사회가 될 것이다. 관심있는 분은 지난해 이 지면에 쓴 ‘과녁을 벗어난 화살’(2013년 6월10일자)을 읽어 보시기 바란다.일본은행은 즉각 돈을 더 풀겠다고 천명했다. 15년 전 미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이 내놓은 인플레이션에 의한 소비진작 정책을 더 밀고 나가겠다는 것이다. 단기 정책으로 나무랄 데 없는 뻔한 이야기인데 왜 소비는 늘지 않는 것일까? 정책 효과가 나타나려면 시간이 좀 더 걸리기 때문일까?내 생각에 일본의 인구문제를 함께 숙고하지 않으면 이 문제는 풀리지 않는다. 2009년 일본의 65세 이상 인구는 23%였고 2030년에는 3명 중 1명이 될 것이며, 5명 중 1명은 75세 이상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말 그대로 초고령사회이다.문제는 이들 노인이 부를 움켜쥐고 있다는 사실이다. 일본 통계청 소비자실태 조사(2009)에 따르면, 30대 가계의 부채를 뺀 순금융자산은 마이너스 262만엔인 반면 60대 가계의 순금융자산은 1785만엔, 70세 이상 고령자는 이보다 많은 1860만엔이다. 한 통계에 따르면 무려 1600조엔(약 16조달러, 한국의 1년 GDP의 약 15배)이 예금으로 묶여 있다.이들은 웬만한 인플레이션에는 꿈쩍도 하지 않을 것이다. 인플레이션이 일어나 미래의 소비가 현재 소비보다 10%나 줄어든다 해도, 진료비가 없거나 생활비가 부족해 아이들에게 부담을 주는 상황은 어떻게든 막아야 하지 않겠는가?핵가족마저 또다시 분열 반응을 하는 상황에서 믿을 것은 돈밖에 없다. 1992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케리 베커 교수가 설파한 호모 이코노미쿠스(경제적 인간)의 합리적 선택이 그러하다. 돈이 효도를 낳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모두 그렇게 행동하면 거시경제는 더욱 깊은 늪으로 빠져든다. 아이들을 위한 행동이 바로 그 아이들을 곤경에 빠뜨린다.한국이라고 다를까? 노인복지를 얘기하자면 일본의 꽁무니도 못 따라가는데 지역의 작은 공동체나 노인들끼리 상부상조하는 협동조합도 없다. 어떻게 해야 할까? 품격있는 노인으로 죽을 수 있다면 굳이 수전노가 되어야 할 이유가 없다. 단순히 기초연금 얼마가 아니라 노인이 존중받는 사회, 노인의 지혜를 배우려는 사회, 품격있는 죽음을 위해 모두 노력하는 사회가 되면, 즉 진정한 의미의 노인복지가 이뤄진다면 거시경제 문제도 해결될 수 있다. 조세제도 개선부터 노인 친화적 도시설계까지, 세대 간 학습에서 노인 참여형 마을 만들기까지 해야 할 일은 무수히 많다. 기실 노인이 행복한 사회는 아이도, 장애인도 행복할 터이다.1997년 이래 우리 사회는 “어떻게든 나와 내 아이만은 살아남아야 한다”는 경쟁 속에서 “부자되세요”를 실천해 왔다.하지만 일본의 현실은 “우리 모두 함께 사는 방향밖에 다른 길은 없다”는 사실을 10년 앞서 보여주고 있다. 다시 말하면 정치와 사회의 논리가 경제에 선행해야 한다. 이것이 “경제를 사회에 재착근시켜야(reembedded) 살 수 있다”고 한 칼 폴라니의 말이 의미하는 바일 것이다.*본 글은 경향신문에 기고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