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얘기, 그것도 은근슬쩍 자화자찬이 들어간 얘기를 쓰는 건 영 낯간지러운 일이다. 마치 아버지한테 받은 선물을 자랑하고 싶어 어쩔 줄 모르는 아이를 본다거나, 어떻게든 자식 자랑을 이야기 속에 슬그머니 끼워넣으려 머리 굴리는 게 뻔한 엄마를 보는 것 같을 테니 말이다.하지만 내 생각에(!) 지난 11월5일부터 7일까지 서울시가 주최해 열린 ‘국제사회적경제포럼(Global Social Economy Forum 2013)’은 여러 모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사실 한국에서 ‘사회적 경제’는 야릇한 존재였다. 학자들에게는 이름조차 생소한 동시에, 작금의 협동조합 붐에서 보이듯 현실에서는 열광의 대상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번 포럼은 사회적 경제의 정의와 의미, 각 주체가 해야 할 일을 정리했다는 점에서 한국의 사회적 경제 운동에 하나의 이정표를 세웠다고 할 수 있다.서울을 비롯해서 퀘벡(캐나다), 에밀리아로마냐와 볼로냐(이탈리아), 교토와 요코하마(일본), 퀘존(필리핀), 전북 완주 등 지방자치단체의 대표와 샹티에(캐나다), 레가코프(이탈리아), 사회적 경제 네트워크(한국) 등 주요 단체의 지도자 및 풀뿌리 활동가 100여 명이 함께 모인 자리라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사회적 경제란 지역공동체와 협동조합, 사회적 기업이 함께 만들어가는 경제이기 때문이다.글로벌 금융위기 극복하기 위해 사회적 경제 활성화 필수 ‘서울선언(Seoul Declaration)’은 이렇게 30여 나라 사람들이 모인 포럼에서 합의한 공식 문건이다. 요즘 하루가 멀다 하고 서울에서 열리는 국제 포럼마다 각종 ‘서울선언’을 채택할 테고, 또 사회적 경제 쪽은 전 세계에서 다양한 차원의 심포지엄이나 포럼이 벌어지고 있으니 그중 하나에 불과한 이 포럼에 언론이 그다지 주목하지 않는 것을 야속해할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최초의 초안을 만든 나로선 서울선언이 가지는 의미가 더 각별할 수밖에 없다. 8월28일 광화문의 한 카페에서 몇몇 전문가가 한글본 초안을 검토한 뒤, 11월7일 포럼에서 공식 채택되기까지 고작 두 달여 동안이지만, 수많은 이메일과 전화를 통해 세계적 이론가나 활동가들과 의견을 나눈 것은 새로운 경험이었다(실무자들이 정말 애썼다).서울선언은 글로벌 금융위기를 극복하는 데 사회적 경제의 활성화가 필수적이라는 점을 지적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사회적으로 배제된 사람들의 일자리와 존엄성을 회복하고, 재생 가능한 에너지 생산과 소비를 통해 생태 문제를 해결하며, 무엇보다도 참여민주주의에 의한 경제를 이룬다는 점에서 사회적 경제는 새로운 시대, 사회혁신의 요람이기도 하다.특히 이번 선언에서는 경제의 다원주의를 전면에 내세웠다. 나는 2007년께부터 시장경제, 공공경제(정부), 그리고 사회적 경제(공동체 또는 시민사회)가 박자를 맞춰야 한다고 주장해왔지만(세 박자 경제론), 이 얘기를 국제 선언문에 넣을 만큼 용감하지 않았다. 그런데 캐나다의 칼폴라니 연구소(소장 마거릿 멘델)가 초안에 대한 코멘트에서 ‘다원적 경제(plural economy)’를 명시하자고 제안했다. 불감청 고소원!폴라니는 <거대한 전환>(1944)에서 역사적으로 인간들의 교류는 시장교환·선물(공동체)·재분배(국가)라는 세 형태로 이뤄져 왔는데 19세기에 이런 다양성을 시장교환으로 단순화한 결과가 1929년의 대공황이라고 갈파한 바 있다. 그 폴라니의 딸이 설립한 연구소에서 새로운 사회의 원리로 ‘다원적 경제’를 강조한 건 당연한 귀결이다. 또한 이들 세 경제가 조화를 이루도록 하는 공공정책 연구가 절실하다는 점도 10개의 행동지침 중 하나로 제시했다. 실로 어떤 사회경제 정책을 만들면서 정부·시장·시민사회(지역 공동체)가 할 일을 동시에 고려한다는 것은 정책의 혁신이라 할 만하다. 예컨대 신자유주의 시대에 사실상 민영화(privatization)를 의미했던 ‘민관 합작(public private partnership)’을, 서울선언은 공공·기업·공동체 3자 연합의 공동정책 수립과 실천으로 대체했다.폴라니의 사상은 이제 70년이라는 시간을 뛰어넘어 구체적인 사회운동으로, 그리고 정부의 구체적 정책으로 부활했다. 지방자치단체와 사회적 경제 활동가들이 서울선언에 기초해서 더 많은 토론과 실천을 하게 된다면 ‘더 나은 세계’ ‘더 나은 삶’이라는 폴라니의 꿈이 비로소 실현될 것이다. *본 글은 시사IN에 기고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