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으로 한국사회에서 “내란음모”는 5.16 군사쿠데타와 12.12 군사 쿠데타가 있었을 뿐 재야시민사회세력과 야권에 대한 “내란음모” 혐의 적용은 모두 무죄로 귀결되었다. 그 대표적 사례가 1974년 4월 3일 벌어졌던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이다. 




민청학련 사건이란 대학생들의 모임이었던 민청학련이 불온세력의 배후조종에 의해 국가를 전복시키고 공산정권 수립을 추진했다는 혐의로 유신정권에 구속, 기소되었던 사건으로 유신시대의 대표적 공안탄압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당시 민청학련 사건으로 탄압받았던 이들 중 일부는 이해찬, 김근태, 장영달, 유홍준, 이철, 유인태 등 민주당 전현직 정치인들이 적지 않다. 70년대 반유신투쟁에 나섰던 이들은 이후 “민청학련 세대”로 불리면서 민주당 내에 비중있는 영향력을 끼쳐왔다. 

민청학련 사건이란? 

민청학련 사건은 1974년 4월 3일, 박정희가 선포한 <긴급조치 4호>에 의해 대학생을 포함한 총 1024명을 조사해 이 중 180명을 군법회의에 회부시킨 공안탄압 사건이다. 이 사건의 과정에서 변론을 맡던 강신옥 변호사가 법정모욕, 긴급조치 위반혐의로 구속되기도 하였으며 일본인 관련자 2명에게 징역 20년형이라는 중형을 부과해 한일간 외교문제로 비화되기도 하였다. 

유신정권은 이 사건이 배후세력으로 인혁당 관련자들을 지목하고 인혁당 재건위 사건을 조작, 1974년 7월 13일, 김용원, 도예종, 서도원, 송상진, 여정남, 우홍선, 이수병, 하재완 등 8명에게 사형을 선고하고는 1975년 4월 9일, 대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된 지 18시간만에 전격적으로 사형을 집행하였다. 국제법학자회(International Commission of Jurists)는 인혁당 판결이 난 1974년 4월 8일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했다 

한편 김병곤, 김지하, 나병식, 이철, 유인태, 이현배 등은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집행되지는 않았으며 김지하의 경우는 이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총 14명에 대해 법정최고형인 사형이 선고되었고 이 중 8명에 대해 대법원 상고가 내려진 지 18시간만에 전격적으로 사형이 집행된 것은 민청학련 사건이 “내란음모” 사건으로 조작된 것이 영향이 크다. 

이후 서울고법 형사4부는 2009년 9월 11일, 1974년 내란음모와 대통령 긴급조치 위반죄로 처벌받은 장영달 전 민주당 의원 등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 8명의 재심에서 내란음모 혐의에 무죄, 긴급조치 위반 혐의에 대해 면소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당시 교사, 대학생 또는 대학원생이던 이들이 유신헌법 반대 및 긴급조치 철폐를 목적으로 조직을 강화하고 활동한 사실은 인정되나 이를 위해 폭동을 모의했다는 사실은 인정할 증거가 없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긴급조치 1·4호 위반 혐의에 대해서는 “근거법인 유신헌법 제53조가 폐지돼 실효가 없어 면소 판결한다”고 밝혔다. 

2010년 10월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이 사건의 관련자와 가족 등이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국민을 보호해야 할 국가가 유신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오히려 가해자가 돼 불법행위를 저질렀다”면서 국가가 520억여 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내란음모”로 탄압한 유신정권 

이제는 무죄임이 백일하에 드러난 민청학련 사건도 1974년 사건 당시에는 온갖 충격적인 언론기사들로 국민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다. 민청학련 사건은 어떻게 “내란음모”란 어마어마한 내용으로 부풀려졌는가? 

당시 공안기관은 민청학련의 배후를 이른바 “인민혁명당(인혁당)”으로 규정하고는 1차 인혁당 사건으로 이미 옥고를 치른 도예종, 서도원, 하재완 (1975년 사형집행)등을 과거 공산주의 지하 활동을 하다 검거되었다며 또 다시 혐의를 뒤집어 씌웠다. 

그러나 민청학련 사건의 경우에서도, 국내 재야인사들만으로 사건을 터트려서는 “내란음모”의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다. 그래서 당시 공안기관은 1966년 일본 좌익계 인사인 다치카와 마사키가 한국을 수차례 왕래하며 공산당원 출신의 하야카와 요시하루와 함께 사건 주동자인 이철, 유인태 등과 접촉, 폭력혁명 계획을 선동했다며 일본인 2명까지 체포, 구속하는 국제조작사건을 벌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공안당국은 황인성이 이철 등에게 전국 대학생 연합조직방법과 투쟁방법, 목표를 전달하고 자금을 제공하는 한편 데모 때 사용할 유인물의 원고를 제공했다는 혐의를 뒤집어 씌웠다. 이 과정에서 ‘한국기독학생총연맹’ 간부들은 민청학련이 주도하는 反정부 데모가 실패할 경우 2단계 데모를 계획했다며 내란의 목적성을 포장한 것이다. 

심지어 언론은 민청학련 관련자들이 경찰의 불심검문을 피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주민등록증을 가지고 다녔던 점을 언론에 “회합-전선-연락 등에 있어 특수훈련을 받은 간첩들이 사용하는 수법”이라고 대서특필했다. 

1974년, 공안기관은 민청학련을 “내란음모” 사건으로 조작하기 위해서, 첫째, 인혁당 재건위 사건을 조작해 민청학련의 배후조종세력으로 날조하고, 둘째, 일본인 인사들을 구속해서 일본공산당과의 연계성을 날조하고, 셋째, 반정부 데모가 실패할 경우 2단계 데모를 계획한 점을 내란의 치밀한 사전계획이라 날조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70년대 유신시절에도 재야인사들을 “내란음모”로 처형하려면 적어도 배후조종세력을 날조해내고, 해외 공산당과 연계성을 입증하고, 단계별 실행계획과 같은 구체적인 행동계획을 만들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기소부터 흔들리는 진보당 내란음모 

그러나 이번 진보당 사건은 철권통치의 유신시절이었던 74년 민청학련 사건에서도 준비하였던 배후조종세력도 전무하며, 북한이나 기타 해외세력과 연계되어있다는 혐의자체가 없으며, 단계별 실행계획조차도 아닌 실행계획도 없는 단순 토론 내용을 가지고 프락치 매수를 통해 “내란음모”로 날조한 것이다. 

지난 민청학련 조작사건의 피해자들 가운데는 이해찬, 김근태, 장영달, 유홍준, 이철, 유인태 등 민주당 전현직 정치인들이 적지 않았다. 이들이 지하조직의 배후조종을 받으며 일본공산당과 연계했다는 “내란음모”의 혐의를 뒤집어쓰고 “간첩 특수훈련을 받았다”며 옥고를 치르고 있을 때, “사실이라면 큰일”이라며 거리두기에 급급한 모습을 보였다면 그는 진보인사, 민주인사로서 자격이 없다고 할 수 있다. 

거리를 둘 것이 아니라 공안당국의 탄압으로 규정하고 공안탄압 분쇄에 함께해야 한다. 그 당시 “사실이라면 큰일”이라는 둥, “그러게 왜 남의 주민등록증을 가지고 다녀서 공안당국이 간첩활동이라 공격할 빌미를 주느냐”며 민청학련과 거리두기에 급급했던 인사들이 민주와 진보를 자부하고 다녔다면, 역사상 그런 희극은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제 2013년, 40년이 지났지만 역사는 정확히 반복되고 있다. 40년전, 민청학련 세대들의 억울함이, 40년 후, 진보당원들에게 반복되고 있다. 더구나 이른바 “배후조종세력”의 실체도 없으며 북한, 내지는 해외 공산당과 연계는 더더욱 찾아볼 수 없으며 하다못해 구체적 데모계획조차도 없는 진보당 사건을 “내란음모”로 조작한 것은 공안탄압의 역사에서도 전무후무한 일이다. 

문제가 불거지자 검찰은 이석기 의원을 구속시켜놓고 그 이후에 죄목을 검토하는 진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사람을 구속시키려면 구속의 이유가 있어야 한다. 검찰이 기소의견을 결정하지 못해 우왕좌왕하는 상황에서 현직 국회의원 체포동의안이 통과되었다는 것은 대한민국 국회에서 민주주의가 길을 잃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누가 보더라도 노골적인 정치탄압이다. 이번 진보당에 대한 탄압만행은 70년대 유신시절에 우리 국민들에게 커다란 아픔을 주었던 민청학련 사건을 능가하면 능가했지 결코 덜하지 않은 폭압만행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