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지금 “우리는 모두 경제 민주화론자”라고 말해도 좋을만한 분위기다. 야당에서 재벌개혁 경제 민주화를 강도 높게 주장하는 것은 새삼스러울 것이 없지만, 여당 유력 후보인 박근혜 전 비상대책위원장도 대선후보 출마를 선언하면서 경제 민주화를 주요 3대 공약의 하나로 제시했다. 가장 대표적인 성장론자이자 친기업론자인 이명박 대통령까지 경제 민주화를 부정적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면서 대기업을 훈계했다. 마지막으로 개혁의 대상이고 당사자인 재계조차 “경제 민주화 자체를 반대하지는 않는다”면서 공식적으로 경제 민주화에 발을 담그게 된다.이쯤 되면 재벌개혁과 경제 민주화는 시대의 화두이자 대세가 되었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제 경제 민주화를 위해 무엇이 가장 시급한 것인지를 정해 입법이 필요하면 국회에서 법을 제정하고, 제도 설계를 해야 한다면 정부와 함께 제도 기획을 시작하면 된다. 그런데 일부 정치권에서는 ‘경제 민주화’가 무얼 말하는지 합의된 것이 없다고 주장한다. 물론 학문적으로는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명확하다. 우리 헌법 119조 2항에 명시된 것처럼,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성장과 안정, 적정한 소득분배의 유지,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 남용 방지, 경제 주체간의 조화를 액면 그대로 실행하면 되는 것이다. 또한 최근 진행되고 있는 논쟁을 보면 실제 재벌개혁과 경제 민주화를 위한 진정성을 의심케 하는 대목들도 눈에 띈다. 예를 들어 민주통합당에서 “박근혜의 경제 민주화에는 재벌개혁이 없다”는 주장에 대해, 당사자인 박 전 위원장이 “재벌해체, 때리기는 안 된다”는 식으로 대응한 것이 그 사례다. 권위주의 정치 종식 없이 정치 민주주의가 불가능한 것처럼, 재벌개혁 없는 경제 민주주의도 무의미한 것이다. 철저한 재벌개혁을 통해 경제 민주화를 해야 한다고 수용하면 되는 명백한 사인이지 논쟁할 필요가 있는 대목이 아니다.또한 정치권을 포함한 시민단체 거의 대부분 현재 재벌해체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없다. 그런데도 재벌개혁 요구를 곧바로 재벌해체로 비약시키는 것은, 마치 지나친 시장 개방과 자유무역협정에 비판적인 견해를 보이면 ‘그러면 쇄국을 하자는 것이냐’ 하는 식으로 반발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일련의 규제가 필요하다며 요구하는 재벌개혁에 대해 재벌을 해체하자는 것이냐며 국민을 자꾸 불안하 게 해서는 안 된다. 이처럼 여야 정치권 가릴 것 없이 경제 민주화를 요구하면서도 한 발만 더 들어가 보면, 경제 민주화가 합의된 내용이 없다든지, 재벌 때리기로 가면 안 된다든지 하면서 출발부터 막히는 모양새다. 자칫 재벌개혁 경제 민주화는 시작도 해보기 전에 국민들 사이에서 재벌개혁 피로감, 경제 민주화 피로감이 올까 우려된다. 특히 정치권에서 이런 방향으로 몰고 갈까 걱정이 앞선다.이 시점에서 필요한 것은 진정으로 재벌개혁 의지가 있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여야 정치권이 모두 합의하고 당장 실행 가능한 것들이 있다. 재벌의 횡령, 배임과 같은 경제범죄에 대해 원칙적으로 집행 유예 등이 불가능하도록 엄격한 형벌규정을 강화하는 것이 그 사례다. 미국의 경우 회계부정을 저지른 기업 엔론의 전 CEO가 종신형 에 가까운 24년 징역형을 선고 받아 실형을 살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 재벌 총수들은 대부분 집행유예를 받고 풀려 나왔던 전례를 생각한다면 재벌 총수의 경제 범죄에 대한 엄격한 형벌규정을 당장 입법화시킨다면 그나마 재벌개혁의 진정성을 국민이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또 하나 있다. 새누리당 대선후보로 나온 박 전 위원장을 포함해 대부분 대선 후보 출마자들이 경제 민주화와 사회복지를 핵심 공약으로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두 공약이 만나는 지점이 있다. 바로 재벌이 세금을 더 내서 사회적 책임을 다하면서 복지에도 기여하는 것이다. 감면 혜택의 절반 이상이 10대 재벌에게 돌아가는 각종 세액공제 특혜를 폐지하고 최저한세율도 올려야 한다. 나아가 1%미만의 재벌 대기업에 대한 최고세율을 상향 조정해서 복지재원을 확충하는 데까지 진전시켜야 한다.이 글은 한국일보에 기고한 글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