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2등을 기억하지 않는다.” 삼성의 광고 문구다. “부자 되세요!”와 함께 희망차게 맞은 새 밀레니엄의 첫 10년 한국 사회를 이보다 잘 보여주는 카피는 없었다. 이들이 부추긴 ‘죽음에 이르는 경쟁’의 결과 한국은 자살률 세계 1위이고, 더구나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증가율을 기록하고 있다.이외에도 한국이 1등을 기록하고 있는 수치는 많다. 특히 성차별을 보여주는 지표들이 그렇다. 남녀 임금격차는 38.9%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의 2.5배이고 여성 임금 근로자 중 저임금 노동자 비율은 42.7%로 역시 1위다. 대체로 가사 및 돌봄노동 시간을 의미하는 무급노동 시간은 여성 135분, 남성 45분으로 OECD 국가 중 가장 격차가 크다. 여성의 비중이 큰 노인 빈곤율 또한 세계 1위다.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이 각종 성평등 지수에서 100위 밖에 머무르는 것은 당연하다. ‘다이내믹 한국’에서 다이내믹하게 자신의 지위, 특히 발언권이 위축되는 걸 체감하는 남성들로선 이 수치 자체를 믿을 수 없다. 단칸방에서 담배를 피우던 아버지, 그것도 몸짓 발짓으로 담배와 재떨이를 갖다 바치게 하는 걸 보며 컸는데 이젠 아파트 단지 외진 구석에서 숨어 피워야 하니 이런 수치를 믿지 못할 수밖에. 등수와 느낌의 차이는 성평등 지수가 남녀 간 상대적 격차를 기초로 해서 산정됐기 때문이다. 예컨대 한국 여성의 문자해독률은 세계 최고 수준이지만 남성과 비교한 상대적 해독률은 여전히 낮기 때문에 이 격차를 대상으로 순위를 매기면 이 부문에서도 한국은 100위권으로 전락한다.그러므로 “이 수치로 호들갑을 떨지 말자”는 주장은 그래서 더 못나 보인다. 문제는 여성들의 능력은 과거에 비해 훨씬 증가했는데 능력 발휘의 기회는 여전히 적다는 점에 있다. 1990년대 인기 드라마 ‘아들과 딸’에서처럼 공부를 훨씬 잘하는 딸이 아들을 위해 대학을 포기하는 일은 거의 없어졌겠지만 대학을 졸업한 딸이 취직하기란 여전히 어렵다. 즉 시장은 여전히 고루한 성차별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이 문제에 대한 주류경제학의 진단은 아주 명쾌하다. 시장이 알아서 불평등을 없애줄 것이란 얘기다. 그 논리도 아주 쉽다. 만일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능력 있는 여성을 채용하지 않는 기업이 있다면 결국 시장에서 퇴출될 것이기 때문에 시장은 능력 순서대로 고용할 것이란 얘기다.그러나 현실의 시장은 그렇게 작동하지 않는다. 최근 최고경영자들에게 그저 이름만 늘어놓고 채용 순위를 정하라는 실험을 한 결과, 이들은 앵글로색슨계 남성 백인의 전형적 이름들을 꼽았다. 냉혹한 시장의 논리와 달리 이런 결과가 나온 이유는 무엇일까. 시장이야말로 정의나 배려, 평등과 같은 다른 가치가 스며들 수 없기 때문이다. 효율성을 유일한 목표로 삼는 시장이 실은 비효율의 강고한 토대인 것이다.고용시장은 정보의 비대칭성으로 가득 차 있다. 지금 맡기려고 하는 일을 누가 더 잘할지 어떻게 알겠는가. 관행에 따라 고정관념에 의존하게 되는데 그보다는 남녀 간, 지역 간, 학력 간 또 다른 어떤 기준에 따른 차별을 없애는 게 더 효율적일 가능성이 훨씬 높다. 해마다 돌아가면서 성평등지수 1, 2, 3위를 차지하는 북유럽 국가들의 높은 성장률은 이런 추론을 간접적으로 증명한다. 노르웨이 정부는 남녀의 능력이 동일하다는 단순한 가정하에 공기업 최고경영자 비율을 30% 이상으로 단숨에 끌어올렸고 이를 민간에도 적용할 예정이다. 나아가 성평등은 성차에 따른 다양성을 확보해 주기 때문에 효율성을 더욱 북돋운다. 평등은 여러 경로로 효율을 높일 수 있는데 기회 닿는 대로 살펴보기로 하자.이 글은 여성신문에 기고한 글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