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은 선거의 계절이다. 우리나라는 선거만 되면 의례히 ‘굵직한 개발공약’들이 줄줄이 발표되곤 했었다. 그런데 올해는 좀 다르다. 이미 지난해 보편 복지의 파고가 한국사회를 한차례 휩쓴데 이어 재벌개혁과 경제 민주화의 담론이 급격히 부상하고 있는 것이다. 5년 전의 ‘성장과 경제 자유화’ 의제 대신에 지금은 ‘복지와 경제 민주화’ 의제가 선거 공약을 좌우하는 판이한 지각변동이 일어난 셈이다. 특히 극적으로 등장한 경제 민주화라는 말을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경제 민주화는 재벌체제라고 하는 선출되지 않은 경제 권력에 대한 문제제기일까. 아니면 너무 심각해진 소득 불평등을 해소하자는 것인가. 도대체 지금까지 시장 경제는 얼마나 민주주의를 제대로 구현하지 못한 것인가. 사실 외환위기 이후 우리 사회를 지배해온 신자유주의는 시장경제의 효율성과 자기조절 능력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자본주의라고 할 수 있다. 시장에서 각 개인들이 자기 이익을 추구하게 되면 저절로 모두의 이익이 달성되므로, 시장의 자율을 존중하고 국가나 제도가 섣불리 개입하지 말라는 것이다. 특히 정치가 이른바 ‘정치논리’를 가지고 경제에 개입하면 시장의 효율성이 떨어진다면서 관치 경제나 정경유착 사례 등을 지목하기도 한다. 이런 논리에 입각해서 보면 시장 경제의 논리구조에 민주주의를 끌어들이는 것 자체가 부자연스럽다. 시장은 그 자체로 가장 합리적인 지점을 찾아 움직이는 것인데 여기에 민주주의와 같은 정치적 가치를 들이밀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시장이 잘못되어 실패할 가능성은 아예 없어 보였다. 더구나 시장 경제를 논하면서 윤리 도덕적인 냄새가 짙은 정의나 공정, 공평을 말하는 것은 대단히 어색한 것처럼 간주될 수밖에 없다. 한 발 더 나아가 신자유주의는 전통적인 경제영역뿐 아니라 의료, 교육, 주거 등 사회적 영역, 심지어는 정부 조직과 같은 영역에 이르기까지 시장 원리를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 마디로 모든 사회운영원리를 시장 원리로 작동시키는 사회를 주장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흔히 신자유주의를 ‘시장 지상주의’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1980년 미국과 영국을 필두로 지난 30년 동안 세계를 지배해왔던 이데올로기이자 현실에서 관철되어온 규칙이었다. 외환위기 이후 15년 동안 우리나라도 사회 구석구석까지 이러한 논리가 스며들었다. 그러나 세계를 풍미했던 ‘시장 지상주의’는 2008년 중대한 도전에 직면했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지면서 시장이 작동을 멈추고 붕괴해버렸기 때문이다. 단순한 금융시장 기능의 실패를 넘어 시스템 자체가 문제가 있는 것으로 판명되었고 4년이 넘는 지금까지도 시스템은 복구되지 않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 수석 경제학자를 역임한 라구람 라잔 교수는 글로벌 금융위기를 목도하면서 시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통렬하게 한탄했다. “도대체 규제기관과 감독 기관은 무엇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도대체 시장 원칙은 어디에서 한눈을 팔고 있었단 말인가? 도대체 자기 보존을 위한 민간 기업의 생존 본능은 다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자유 기업 정신에 의거한 제도가 총체적으로 망가졌단 말인가? 이번 위기가 어느 개도국에서 발생한 그저 그렇고 그런 위기였다면 위와 같은 질문은 절대 나올 수가 없다. 그리고 이번 위기의 심각성을 고려해볼 때 쉽게 답을 찾으려 하거나 아무 답이나 갖다 붙이려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시장은 스스로 완벽하지 않고 스스로 문제를 조정하는 능력이 매번 있는 것도 아니며, 거대한 시장 실패가 발생했을 때 세계 경제와 인류에게 미치는 충격과 고통은 엄청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가 목도하게 되었다. 그 동안 알고 있었고 주류 경제학자들이 설교해왔던 시장에 대한 무한한 믿음과 확신이 터무니없이 과장된 것임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러면 진짜 시장의 능력과 한계는 어디까지이며 시장은 과연 정의롭고 공정한 결과를 가져오기는 하는 것인가. 아니라면 어떻게 시장의 실패를 방지해야 하고 교정해야 하는가. 이정전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는 선거의 화두가 되고 있는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에 대해 다음과 같은 논지를 편다. 민주주의는 1인 1표의 원칙에 기초하고 있지만 시장에서 관철되는 의사결정 방식은 1원 1표다. “모든 사람이 동일한 권리를 행사한다는 점에서 1인 1표의 원칙은 철저하게 평등주의에 입각한 원칙이다. 하지만 1원 1표의 원칙은 돈 많은 사람들에게는 돈에 비례해서 더 많은 권리를 부여하는 한편, 돈 없는 사람들의 의사는 아예 묵살한다는 점에서 매우 불평등한 원칙이다.” “시장은 조직 구매력을 가진 선호만을 반영하는 까닭에 가난한 사람들의 요구는 무시되기 일쑤이지만 부자들의 선호는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존중된다.”(이정전, 『시장은 정의로운가』, 142쪽) 바로 시장경제의 1원 1표 원칙에 내재한 불평등성 때문에 정치 영역에서 1인 1표 민주주의는 시장이 초래한 불평등을 완화하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정치에서 민주주의가 적극적으로 역할을 하지 않으면 시장이 만들어내는 불평등은 완화될 수 없고 점점 더 심각한 사회문제가 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정치가 시장에 개입하면 안 된다는 신자유주의 논지와 달리 시장경제와 민주주의가 각각 어떤 적극적 역할을 맡아야 하는지를 정확히 묘사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런 논지는 사실 우리나라 헌법에도 비교적 잘 반영되어 있다. 우리 헌법 119조 1항은 “대한민국의 경제 질서는 개인과 기업의 경제상의 자유와 창의를 존중함을 기본”으로 한다고 되어 있다. 일종의 ‘자유 시장 존중’으로 해석될 수 있는 조항이다. 곧바로 이어서 2항은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주체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흔히 말하는 ‘경제 민주화’ 조항이다. 그런데 외환위기 직후 국민의 정부 시절부터 시장경제라고 도입했던 신자유주의는 고용불안과 가계부채, 소득 불평등과 양극화라고 하는 결과를 초래했고 이는 이명박 정부까지 계속되었다. 금융과 교육, 보건과 보육 등 더 많은 삶의 영역이 자유 시장에서 거래 되도록 작동했고,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민주적인 의사결정은 설자리를 잃게 되었다. 자유 시장은 민주주의와 함께 작동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결과 2012년, 우리는 시장의 자유가 아니라 경제의 민주화라는 국민적 요구 앞에 서게 되었다. 이정전 교수는 더 나아가서 우리사회가 시장원리 하나만으로 작동되어서는 안 된다면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영역에서 각자 알맞은 운영원리가 있음을 적시해주고 있다. 첫째는 가정과 이웃, 공동체에서 적용되는 필요의 원리다. “가정에서는 성과주의가 별로 지지받지 못하는 가운데 필요의 원칙이 지배적이다.” 엄마는 용돈을 나눠줄 때 아이들에게 필요한 만큼 나눠주지 성적이나 집안일에 기여하는 정도를 가지고 나눠주지 않는다. 둘째는 경제에서 적용되는 성과주의 원리다. “응답자의 80%이상이 직장에서의 소득은 일의 성과 및 개인의 능력에 따라서 결정되어야 한다고 보는 셈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정치에서 적용되는 민주주의 원리 즉 평등의 원칙이다. 시장만이 지배하는 사회를 버리고 2012년 선거를 통해 우리는 어떤 사회를 염원해야 하는가. “경제 영역에서는 성과주의에 입각해서 자원을 최대한 활용하고 생산을 많이 하도록 하며, 정치 영역은 평등의 원칙에 입각하여 분배를 고르게 하고, 사회화 영역에서는 필요의 원칙에 알맞게 나누어 쓴다면 우리 사회는 잘 조화된 사회가 될 수 있다. 바로 이런 사회야 말로 정의로운 사회요, 일찍이 그리스 철인 플라톤이 꿈꾸던 이상 사회다.”(이정전, 『시장은 정의로운가』, 279쪽).이 글은 4월 5일자 기획회의에 기고한 글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