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자치와 베네수엘라 경험

By | 2012-01-07T13:35:11+00:00 2012.01.07.|

베네수엘라와 엘 시스테마 2010년 9월 한 언론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상일동 주민센터는 3일 ‘저소득층 자녀를 위한 바이올린 교실’ 을 개강했다. 이 프로그램은 가정형편이 어려운 저소득층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예술적 재능을 길러주고 음악으로 희망을 주기 위한 프로그램으로 개설되었다. 그간 접수 기간을 거쳐 어린이 예술학교에 10명의 초등학생들이 교육을 받게 되었으며 꿈과 기대에 부풀어 있다. 바이올린 교실은 무료로 운영되며 강사료 20만원은 구의 지원과 상일동 주민자치위원회의 후원으로 운영될 예정이다.” 이 기사에 따르면 주민센터 관계자가 “엘 시스테마처럼 가정형편이 어려운 어린 학생들이 좌절하지 않고 음악으로 꿈을 갖고 아름다운 감성을 기를 수 있도록 예술학교를 개설하게 됐다.”고 취지를 설명했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언급한 엘 시스테마(El Sistema)란 무얼 말하는 것일까. 베네수엘라 경제학자이자 아마추어 음악가인 호세 안토니오 아브레우(Jose Antonio)라는 사람이 마약과 폭력, 포르노, 총기 사고 등 각종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베네수엘라 빈민가의 아이들에게 음악을 가르침으로써 범죄를 예방할 뿐 아니라 미래에 대한 비전과 꿈을 제시하고, 협동·이해·질서·소속감·책임감 등의 가치를 심어 주기 위해 만든 무상 음악교육 프로그램이다. 물론 최근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의 빈민가 차고에서 빈민층 청소년 11명의 단원으로 출발한 엘 시스테마는 1975년에 창설되었고 35년이 지난 2010년 현재 190여 개 센터, 26만여 명이 가입된 조직으로 성장하여 세계적으로 유명한 오케스트라가 되었다. 우리나라에도 지난 2011년 10월에 내한공연을 하였다. 앞서 상일동에서 이를 본딴 시도를 했다고 기사를 인용했지만, 최근 부천, 성남, 대전 등 전국의 수많은 자치단체에서 유사한 시도가 줄을 잇고 있는 중이다. 베네수엘라에서도 이 사례를 확대하려는 정부 차원의 계획이 있었다. 2007년 차베스 대통령이 미션 뮤지카(Mission Musica)라는 이름으로 베네수엘라 어린이들에게 악기와 음악 교육을 제공하는 사업을 추진했던 것이다. 우리에게는 남미의 석유 부국, 또는 미국과 각을 세우고 있는 차베스 독재자(?)라는 정도의 이미지만 있는 베네수엘라에서도 이처럼 훌륭한 주민 자치의 시도가 오래전에 있었고, 2000년대 접어들면서는 훨씬 더 다양한 실험이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은 아직 우리에게 낯설다. 그 이유는 차베스 정권이 미국과 적대적이라는 이데올로기적 요인이 상당히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알려진 것과 달리 오히려 차베스 정부 들어서면서 대단히 풍부한 주민자치와 참여 민주주의 실험이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엘 시스테마보다 훨씬 더 내용을 들여다보아야 할 이유가 있다. 대의제 민주주의를 뛰어넘는 참여 민주주의 주민자치운동은 흔히 풀뿌리 민주주의라고 불린다. 그러나 단지 지역의 작은 단위에서만 가능하고 영향을 미치는 제한된 방식으로만 이해할 뿐, 한 국가 전체의 제도, 규범과는 다소 동떨어진 것으로 인식하기 쉽다. 국지적으로 풀뿌리 민주주의를 활성화시킬 수 있을지언정 광역과 국가 단위로는 의연히 ‘대의제 민주주의’를 당연시 하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2011년 전 세계를 흔들면서 타임지가 2011년 ‘올해의 인물’로 선정한 시위자(Protesters)들의 세계적 저항운동은 현재의 대의제 민주주의가 얼마나 민의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2011년 벽두부터 세계의 뉴스가 되었던 튀니지와 이집트의 민주화운동은 아랍의 독재자들에 의해 대의제 민주주의조차 결여되었기 때문이라고 접어두자. 그러나 비교적 대의제가 잘 발달한 스페인에서도 2011년 5월 이른바 ‘분노하는 자들’이라는 이름의 대규모 광장시위가 한 달 내내 계속된다. 45%라는 엄청난 청년 실업률을 외면한 정부와 정당들에 분노해 청년들이 광장에 텐트를 치면서 저항운동을 하였던 것이다. 광장에서는 서로 토론하고 의견을 모으는 수평적 민주주의, 직접 민주주의가 구현되어 보는 사람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시위의 정점은 2011년 9월 17일 불과 30여 명의 청년들로부터 시작된 ‘월가 점령운동’이었다. 현대 민주주의의 상징인 미국의 중심부에서 비롯된 작은 규모의 월가 시위는, 불과 수주 뒤에 수 만 명으로 불어났고 전 미국을 넘어 세계로 확산되면서 타임지 올해의 인물로 선정되는 결정적 역할을 한다. 아랍과 스페인, 월가, 그리고 영국과 인도, 이스라엘 등에서 벌어진 이들 시위는 무엇을 의미할까. 현재의 정부와 정당, 의회 시스템이 정상적으로 민의를 반영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청년들을 중심으로 소셜 네트워크라는 소통수단을 통해 서로 의견을 공유하면서 거리로 나가 직접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고자 한 것이었다. 거리에서도 과거처럼 조직된 노동자나 사회단체가 단체가 아니라, ‘익명’의 다수들이 나와서 특정한 지도부도 없이 수평적으로 서로 토론하고 의견을 모아가면서 다음 행동을 결정하는 방식을 채택했던 것이다. 바로 이러한 대의제 민주주의 한계를 정면에서 비판하면서 13년 전에 집권한 베네수엘라 정부가 바로 차베스 정부다. 1999년 차베스 집권 이전의 베네수엘라는 수 십 년 동안 양당체제가 지속되면서 ‘평화적 정권교체’가 이루어졌지만 사회는 개혁되지 못했고 빈민층은 계속 늘어가기만 했다. 중앙정부나 지방정부들도 관료주의에 젖어 민생을 제대로 돌보는데 실패했다. 1998년 집권한 차베스 정부는 이러한 베네수엘라의 엘리트적 정치구조를 타파하고 불평등한 사회개혁을 이루고자, 관료나 대의제를 경유하지 않고 직접 시민들의 참여를 유도하는 방식으로 사회 경제적인 과제들을 해결해가기 시작한다. 집권 초반기에는 교육미션, 의료 미션, 주거와 토지개혁 미션, 상점과 물품 조달 미션 등 다양한 이름의 미션(Mission)을 만들어낸 후, 거기에 시민들을 참여시키고 중앙정부가 각 지역의 미션 조직들에게 자금을 직접 제공한다. 특히 이런 방법으로 빈민지역과 이른바 비공식 경제부문(노점상 등)에서 문맹을 타파하고, 의료 서비스를 개선하고 도로와 주거 환경을 바꾸며, 생필품을 값싸게 공급받을 수 있는 유통망을 넓히는 등의 중요한 사회개혁을 단행한다. 이와 함께 낙후한 산업구조와 높은 실업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협동조합’을 대대적으로 창설한다. 단순히 소비자 협동조합이 아니라 지역에서 생산자 협동조합을 만들어 부족한 생필품 생산을 담당하게 하는 한편, 지역 주민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역할을 하게 한다. 2000년대 중반에는 그 수가 15만 개에 달하고 여기에서 일하는 조합원이 150만 명에 달할 정도로 폭발적으로 협동조합이 늘어나기도 했다. 베네수엘라 주민자치의 상징 주민평의회(Communal Council) 각종 사회개혁 미션, 엄청나게 팽창한 협동조합과 함께 베네수엘라 주민자치 실험의 상징으로 꼽히는 것이 바로 주민평의회(Communal Council)다. 2000년대 초 중반까지 베네수엘라에서 진행된 것은 교육, 의료, 주거, 치안 등 각 사회개혁과제 별로 주민들을 참여시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인적, 물적으로 중복과 혼란이 발생하고 지역 단위에서 효율적이고 통일적으로 사회개혁이 진행되지 못하는 단점이 있었다. 주민 평의회는 이런 중복과 혼란을 방지하고 지역에서 주민들의 통일적인 참여조직을 만들자는 취지로 2005년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브라질의 지역 참여예산제 등에서 영감을 얻어 비교적 넓은 지역단위에서 자치조직을 만들려고 했지만 곧 실패한다. 범위가 넓으면 주민들 전원이 참여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기존의 정당 지역조직이나 지역 유지 등에 의해 민의가 왜곡되는 현상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지자체에서 나타나는 모습과 유사하다. 실패를 교훈으로 베네수엘라는 주민 전원의 참여가 가능한 아주 작은 단위, 도시에서는 대략 200~400가구를 묶어서 주민평의회를 만들게 된다. 우리나라로 보면 중간 규모의 아파트 단지 정도가 되는 셈인데, 만 15세 이상 성인 전부를 대상으로 최소 20%이상이 참여하는 주민총회를 열고 도로건설, 주거, 수도, 전기, 치안 등 주민생활문제 관련 위원회를 만들고 대표를 뽑는다. 일종의 서민은행 겪인 주민은행도 만든다. 정부는 주민평의회가 제대로 만들어지도록 컨설턴트를 파견하고, 요건을 갖춘 주민 평의회를 등록해주고, 지역 현안에 대해 스스로 의사결정권을 갖게 해주고 이를 법적으로 보장해준다. 공동체 주민들이 수평적이고 직접적으로 참여하여 동네의 각종 현안들에 대해 의사결정을 하고 실행을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2006년 4월 주민평의회 법을 제정해 법률적 조직으로 지위를 격상시킨다. 특히 등록된 주민평의회에게 지자체를 거치지 않고 직접 자금을 제공하는데, 주민 평의회가 조직된 1년 후 중앙정부가 지방자치 단체를 거치지 않고 직접 주민평의회에 약 5조 원을 제공한다. 이는 중앙정부의 지방 자치단체 전체 교부금의 30% 정도에 해당할 정도로 큰 것이다. 각종 사회개혁 미션을 만들어 본 경험과 중앙정부의 적극적 지원에 힘입어 주민평의회는 2006년 1년 동안 1만여 개를 넘을 정도로 빠르게 만들어졌고 이후 대략 3만 여개가 만들어진다. 베네수엘라 인구 기준으로 대략 3~400가구 당 1개가 만들어진 셈이다. 2009년에는 주민평의회법이 개정되면서 그 규모를 확장시키는데, 특징적인 것은 여러 개의 주민평의회가 모여서 코뮤나스(Comunas)라고 하는 것을 만들고 좀 더 큰 규모의 지역 공동과제를 해결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200~400가구 단위로 할 수 있는 과제는 매우 제한될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수도 카라카스의 한 외곽지역에서는 5개의 주민평의회가 공동으로 사회적 기업 형식의 생필품 유통시장(일종의 중형 수퍼마켓)을 만들고 주민평의회 공동소유로 운영하는 실험을 했다. 상품은 농촌 지역과 직거래 하는 방식으로 조달하면서 유통마진을 줄이고 수익금이 발생하면 지역의 또 다른 공동사업에 투자하기로 한다. 그런 방식으로 지역 라디오 방송국, 독거노인을 위한 요양시설, 그리고 지역 공동체를 위한 교육시설을 단계적으로 만들어 나갈 구상을 하고 있다. 우리의 경우에는 이런 분야에 거대 유통기업이 기업형 수퍼와 같은 방식으로 동네 상권에 진출하거나, 아니면 영리적인 자영업 형태로 보육, 요양시설 등이 난립할 것인데, 베네수엘라는 주민 자치조직이 스스로 공동체의 이름으로 해결하도록 하는 것이다. 물론 주민평의회 운동이 6년째 이어오면서 늘 성공적이었던 것도 아니고 목표한 대로 주민의 열성적인 참여를 보장해온 것만은 아니다. 최근의 조사 자료를 보면 짧은 시간 동안 수만 개의 주민평의회가 급조되면서 그 가운데 적지 않은 수가 형식적으로 만들어진 것도 있고 운영 방법이 미숙해 실패한 것도 대단히 많다고 알려졌다. 특히 2007년 이후 베네수엘라 전역에 생필품 부족이 계속되고 세계 경제위기가 닥치면서, 중앙정부는 지역 주민자치 조직보다는 중앙의 대기업들이 생산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쪽으로 방향을 돌린 탓에 주민평의회에 대한 자금 지원이 절반가량으로 줄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일부 지역에서 주민들의 참여 열의가 떨어지고 주민평의회도 상당부분 동력을 상실했다고 한다. 그러나 베네수엘라의 주민평의회운동은 유럽이나 다른 지역의 풀뿌리 운동과는 상당히 다른 특징을 갖는다. 무엇보다 특정 지역의 자발적 소규모 자치운동이 아니라는 점이다. 주민평의회 운동은 주민의 자발적 참여를 위한 운동이기는 하지만, 중앙정부의 적극적인 정치적 기획이자 전국적으로 동시에 추진된 운동이었고, 지역의 자생력에만 의존한 것이 아니라 중앙정부의 법률적 지위 인정과 직접적 자금지원을 받아 조직된 운동이라는 점이다. 때문에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전국적으로 만들어졌다는 절대적 장점과 함께, 주민들의 착실한 참여 경험과 시행착오를 축적하지 못해 내실이 부족하다는 단점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역사적으로 특이한 베네수엘라의 주민자치운동은 아직 성공과 실패를 예단하기는 이르다. 현재 진행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민 참여와 주민자치에 대한 실험에 있어서 매우 독특하고 중요한 경험이 될 것은 분명하다. 엔리케 두셀 멕시코 국립자치대학 교수(77) 베네수엘라 주민 평의회에 대해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민중의 참여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민주주의의 시도이며, 세계 정치의 새로운 경험”이다. “제도적으로 보장된 3만여 개의 주민평의회가 각각의 의제를 심의하고 제안하는 베네수엘라의 모습에서 새로운 형태의 민주주의를 발견”했으며, “중요한 것은 이 모델이 실패하느냐 성공하느냐는 것이 아니라 시도 자체가 가치 있고 깊이 있게 분석할 필요가 있으며 21세기 정치철학에 있어서 근본적인 문제가 될 것이라는 확신이 있다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도 베네수엘라 주민자치운동을 진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할 것이다.이 글은 월간 주민자치에 기고한 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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