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사람을 착하게 살지 못하도록 한다. ‘착한 경제학’도 마찬가지 운명인 모양이다. 또 한 주 일탈을 해서, 요즘 유행어가 된 ‘투자자-국가 강제 중재’(Investor State Dispute, ISD)에 관한 이야기를 해야겠다. 국적을 불문하고 어떤 투자자가 국가의 정책에 의해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면 뭔가 문제를 해결할 길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FTA 투자 챕터의 핵심이고, WTO와 같은 다른 국제협정의 투자 챕터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정부가 똑같다고 주장하는 80여개 중 ‘강제 중재’, 즉 정부가 거부할 권리가 없는 것은 31개뿐이다. 더구나 FTA에 들어 있는 ISD와 투자협정에 들어가 있는 ISD는 또 다르다. 정부에 불리한 결정이 나서 정부가 이에 불복했을 때 한·미 FTA의 ISD는 보복관세를 물릴 수 있도록 했다. 실제의 재판이 어떻게 진행될지 예를 들어보자. 지난 대선에서 민주당의 정동영 후보는 암의 건강보험 보장성 100%를 내걸었고, 현재의 대선후보들 역시 이 정책을 빼 놓지 않을 것이다. 보장성 100%란 건강보험에서 보험금을 전액 내주기 때문에 본인부담금이 없어진다는 뜻이다. 당연히 민간 암보험을 따로 들 필요가 없을 것이고, 사람들은 이미 들었던 암보험도 해지할 것이다. AIA(구 AIG)는 심각한 타격을 받았으니 건강보험공단(또는 보건복지부)을 대상으로 ISD를 걸 수 있다. AIA가 한 명의 법률가를 고용하고 건보공단도 한 명의 변호사를 선임한다. 그리고 둘이 합의해서 또 한 명의 법률가를 선임하여 재판장으로 삼는데, 만일 합의가 이뤄지지 않는 경우에는 국제투자분쟁해결센터(ICSID)에서 재판장을 결정한다. 이들은 건보공단의 정책이 한·미 FTA를 위반했는지 여부에만 관심이 있다. 흔히 문제가 되는 원칙은 내국민대우, 최혜국대우, 최소기준대우이다. 명백히 내국민대우와 최혜국대우는 위반하지 않았다. 삼성 암보험도 같이 망할 것이고, 영국이나 일본의 암보험도 마찬가지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소기준대우 위반 여부는 아무도 모른다. 국제관습법에 비춰볼 때 과도한 정책인지 아닌지를 판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암 100% 보장이 국제관습일까 아닐까? 확실한 것은 미국의 관습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모든 국민이 원하는 정책이라 하더라도 국제관습에 어긋난다고 세 명의 민간인이 판단하는 순간 휴지조각이 되고 정부는 그 피해액을 현금으로 보상해야 한다.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공무원들은 미국인 투자자의 이익을 침해할 가능성이 있는 정책은 아예 기안도 하지 않을 것이다. 유통법과 상생법, 우리 농산물 무상급식이 이미 겪은 일이다. 이렇게 공공정책의 강화를 사전에 막는 것을 위축효과(chilling effect)라고 한다. 정부는 우리가 한 번도 ISD를 당하지 않았으므로 아무 문제가 없다고 주장한다. 북한의 핵무기는 한 번도 터지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또한 공공정책은 예외라고 주장한다. NAFTA(북미자유무역협정)나 다른 투자협정에도 그런 예외 조항이 있지만 현재까지 제기된 ISD의 대상은 거의 모두 공공정책이었다. 왜 공공정책의 운명을 민간 법률가 세 명의 판단에 맡겨야 하는가? 이는 공공행정의 영역을 사적인 중재에 맡기는 것이다. 2001년 아르헨티나의 예에서 보듯이 경제위기 때 국가가 취하는 긴급조치도 ISD의 대상이다. 도대체 우리의 삶과 국가의 운명을 왜 외국인들, 그것도 경제 문외한들에게 맡겨야 하는 것일까? 아무리 착한 사람이라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이 글은 ‘주간경향’ 에도 실린 글입니다